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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륜(徐相崙)과 소래(松川)교회 설립(1884)

Joyfule 2018. 3. 13. 00:19

 

   

  서상륜(徐相崙)과 소래(松川)교회 설립(1884) 

 

서상륜의 생애 (11)

 

21) 말년

주님을 위하여 평생을 바치며 야생마처럼 삼천리를 누비던 서상륜도 오는 백발 막대로도, 가시로도 막을 수 없어 60을 넘기면서 기울어진 국운과 함께 찾아 온 인생의 낙조를 바라보게 되었고 제 2의 고향인 소래로 낙향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서운하지도 슬프지도 아니하였다. 다만 감사와 만족이 있을 뿐이었다.

[땅에 떨어저 죽는 한 알의 밀]이 된 것으로 만족했고, 많은 열매를 맺게 된 것이 자신의 상급인 것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낙향하는 해(1910)는 성령의 불길이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시점이기에 더욱 만족한 마음으로 소래로 발길을 옮길 수 있었을 것이다.

소래를 찾아 왔지만 그 곳에는 그의 늙은 몸을 담을 만한 일간두옥도 있지 아니하였다. 이 사실에 대하여 그의 손자 서재현 장로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큰 할아버지는 주님께 모든 것을 바치신 분이십니다. 복음 전도를 위하여 전 생애를 바쳤을 뿐 아니라 시골의 재산까지도 몽땅 바쳤기 때문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 분은 예수때문에 패가한 분이십니다."

예수 때문에 패가한 사람, 서상륜!

이 말은 예수의 이름을 빌려서 잘 살아야 하고, 출세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현 한국 교회 교인들은 마음속 깊이 새겨 두어야 할 말이다.

패가를 하면서까지 황무지 한국을 일구기 위해 평생을 바친 서상륜의 고독하고 쓸쓸한 말년을 전해 들은 언더우드는 과거 서상륜이 소유하였던 기와집을 다시 구입하여 그에게 주어 그의 쓸쓸한 말년을 위로하여 주었다.

이 때부터 용사와 같이 달리고 또 달리던 전도자의 생애는 종지부를 찍고 그가 최초로 세우고, 동생 경조가 애써 가꾼 소래교회를 조용히 섬기며 고요속에 명상하는 은둔의 나날을 보내게 된다. 교만도, 자랑도 없이 평신도의 위치에서 교회를 섬긴 것이다.

서상륜·서경조 형제는 말년을 소래에서 지내고 싶었으나 시대는 노약한 그들의 갸냘픈 희망조차 허락지 아니하였다.

동생 경조가 국가의 독립을 위해 고생하는 아들 병호를 따라 상해로 떠나자, 동생이 없는 소래는 더 이상 그의 안식처가 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이웃 마을인 장연군 속달면 태탄리로 이주한다. 이 곳은 소래에서 약 80리정도 떨어진 곳이다.

그가 태탄리로 이주하게 된 이유에 대하여 교회사는 침묵하고 있으나 혹자는 그 곳에 있는 농촌 교회를 담임하기 위하여 이주하였다고 한다.(정용하 증언).

그러나 그의 연령과 경륜으로 보아 가능성은 희박하다.

 

소래교회의 믿을 만한 전승은 "소래교회의 젊은 목회자를 돕는 길이 그가 다른 곳으로 이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곧 실행한 일이라"고 한다. 끝까지 자기희생을 감수하며 교회에 덕이 되고 후배의 활동에 진한 토양이 되려는 경건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사회는 점차 고령화되는 반면 교회는 정년제를 실시하므로 앞으로 많은 원로 목사들이 양산되게 되었다. 그리고 원로 목사의 태도와 입김에 따라 후배 목회자들의 활동이 제한을 받는 경우도 없지 아니하다. 목회 현장에서 은퇴하는 선배 목사들은 자기 희생을 통하여 "교회에 덕이 되고 후배의 활동에 진한 토양이 되려는 경건한" 서상륜의 생활태도를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제 그의 인생도 끝을 맺어야 할 시점이 점차 다가와 1926년 1월 마침내 거절할 수 없는 주님의 엄숙한 부름이 임하니 복음을 위하여 줄기차게 달리던 정도일생(正道一生)의 막을 조용히 내리게 된다. 그의 나이 76세의 일이다.(그의 향년이 76세, 79세 등으로 엇갈리고 있으나 1849년 7월 출생, 1926년 1월 별세이니 75년 6개월이다).

장례식은 총회장(總會葬)으로 엄숙히 거행되였고, 위대한 개척자의 마지막 길을 전국 교회가 경건하게 애도해 주었다.

그의 장례식에 관하여 어떤 기록도, 역사는 간직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후세인은 "총회장으로 엄수하였다"는 한 마디 말로 아쉬운 만족을 감수할 뿐이다. 그의 유해는 그가 말년을 보낸 태탄리에 안장되었다.

그의 사후 10년의 세월이 지난 후의 일이다.

조선 예수교 장로회 제25회 정기 총회에서 황해노회장은 "고 서상륜 선생 묘소에 기념비석을 건립할 것을 청원"한다. 이 청원의 내용을 회의록에서 더듬어 보면 다음과 같다

"황해노회장의 조선 최초 전도에 가장 공헌이 만흐신 고 서상륜 (故 徐相崙)선생의 묘소 긔념비석 一좌 건설 청원은 당석에서 해 안건은 황해로회로 하면 총회는 후원하기로 가결함"

"하명하신 고 서상륜선생 긔렴비 건설에 대하야 비문은 총회 명의로 하겟사오며 공사비로 二百원을 청구하오니 허락해 주시기를 바라나이다."(총회 제25회 회록. 14쪽)

황해노회장의 청원은 즉석에서 허락되었고 건립 비용 200원도 배당되어 1938년 8월 24일에 기념비석을 건립한다. 규모는 세로 5.5척, 가로 2.8척 5분의 화강석 비석이다. 이 비석에는 앞·뒤면에 628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고 보고되어 있으나 내용은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다.

황해노회가 서상륜의 기념비 건립 보고를 총회에 제출한 내용을 소개한다.

"고 서상륜 선생 기념비 입석보고는 여좌히 받기로 가결하다.

소화 十一년 九월 제 二十五회 총회에서 허락하옵신 고 서상륜 선생의 기념비는 고 5척5촌, 광 2척, 후 8촌5분, 화강석제로 구진하여 大小 자수 六百 二十八자를 정각하여 본년 八월 二十四일에 선생 묘전에 건립하였사온바 제막식은 十월 二十七일에 거행할 예정이오며 이시통지는 기독신문을 통하여 앙고하겠사오니 혜량하심을 앙망하나이다.

 

             소화 13년 9월

 

                              황해 노회장 허간"(총회 제27회 회의록. 39쪽).

 

기념비석조차 없었던 10년 세월! 이 사실은 무엇을 시사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 것의 소중함을 망각한 세월이라고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그의 혈육은 무남독녀로 서윤애씨가 있었고 외손으로는 4남매를 두었다. 그 중 장손녀가 백령도로 출가하였다고 하나 거처는 알 수 없고 다른 자손들은 북한에 남아 있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조용히 사라질 뿐이다"(Old soldiers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

이제 100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크게 자란 한국 교회는 복음을 위하여 평생을 바친 서상륜의 업적을 재발견·재조명하여야 한다. 우리 믿음의 조상과 뿌리에 대한 재발견이 여기에 있고, 뿌리에 부끄럽지 않은 가지와 열매가 되기 위해 해야 할 노력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지 않은 노병의 뒤를 우리도 따라 가야 한다.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가루가 거룩한 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 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롬1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