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작은 선행에 민감한 아메리카
제약회사 판매원이던 그는 서른살 무렵 무작정 미국으로 갔다고 했다. 그는 다른 한국인 이민자들과 작은 방을 공동으로 세를 얻어 살았다. 거기서 쪽잠을 자면서 마트에서 일했다. 약간의 밑천이 되는 돈이 생기자 그는 브로드웨이 귀퉁이에 작은 샌드위치 가게를 열었다. 그는 음식 만드는 걸 배운 적이 없었다. 그는 그냥 가게들을 돌아다니며 미국 사람들이 뭘 잘 먹나? 뭐가 잘 팔리나 살폈다. 먹는장사는 신선한 재료로 제시간에 만들어내는 게 중요했다. 극장가의 뮤지컬 배우들이 그의 주요 손님이었다. 미국 사람들은 장사하는 방법이 철저했다. 정해진 가격에서 몇센트만 부족해도 음식을 팔지 않았다. 음식물을 쓰레기 통에 버려도 노숙자에게 주지 않았다. 그는 가끔 주급을 못받았다면서 샌드위치를 사지 못하는 사람을 보면 나중에 돈을 갚으라고 하면서 샌드위치를 주었다. 한국에서는 너무 익숙한 외상거래였다. 그는 찾아오는 노숙자들에게도 남은 샌드위치를 아낌없이 나누어 주었다. 손해 볼 게 없었다.
금년 초 그는 사십년 동안 해 오던 가게를 폐업하기로 결심하고 출입문 유리창에 그 사실을 써 붙였다. 새벽 네시부터 밤중까지 평생 일개미 처럼 살아왔다. 칠십 고개를 넘으면서 그는 이제 인간답게 살고 싶었다. 자식도 다 키웠다. 책을 읽고 영어도 깊이 있는 내용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도록 공부하고 싶었다. 그동안 먹고 사는 데 바빠 공부를 할 기회를 가지지 못했었다. 그의 가게가 문을 닫는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단골이던 브로드웨이의 뮤지컬 배우 이백명이 그의 가게 앞에서 감사의 합창을 하는 거리공연을 해 주었다. 단골들이 찾아와 그동안 따뜻한 음식을 제공해 감사했다며 인사를 했다. 단골들은 폐업을 하는 그의 은퇴기금을 모으는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와 그의 아내는 그런 인정에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오늘 아침 신문에서 본 미담이다. 우리가 몰랐던 미국인들의 또 다른 일면이었다. 사무적이고 냉냉해 보이는 그들은 이웃을 향한 작은 선행들에 민감하게 감동하는 것 같았다. 나도 잊고 있던 아주 작은 행동 때문에 과분한 혜택을 받은 경험이 있다.
오래전 아이들을 캐나다의 학교에 유학시키기 위해 영주권 신청을 한 적이 있다. 영주권을 가져야 학비가 싸기 때문이었다. 캐나다 대사관에서 영주권심사를 위한 인터뷰가 있었다. 아내는 영주권을 담당하는 컨설팅사무실을 드나들면서 부지런히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통장에도 일정 금액이 있어야 하고 여러 서류들이 필요한 것 같았다. 결정적인 것은 인터뷰를 주도하는 영사의 마음이었다. 인터뷰 며칠전부터 아내는 컨설팅사무실에서 받아온 영어로 된 문제와 답지를 들고 암기하느라고 고생하고 있었다.
캐나다 대사관에서 인터뷰가 있던 날이었다. 아내와 함께 캐나다 대사관 인터뷰를 하는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오십대쯤 되어 보이는 백인여성이 영사인 것 같았다. 그 옆에는 바짝마른 신경질적인 한국인 여성이 있었다. 그가 통역인 것 같았다. 백인 영사와 통역의 표정에 찬바람이 도는 것 같았다. 영사의 질문에 아내는 버벅대며 영어로 대답하고 있었다. 그들은 컨설팅업체의 말을 듣고 아내가 제출한 서류는 아예 믿지 않는 눈치였다. 잠시후 영사는 통역을 살짝 보며 눈짓으로 안되겠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았다. 떨어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될 걸 괜히 영주권을 신청하게 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그때였다. 통역을 하는 한국여성이 서류에 적힌 내 이름을 살피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기억을 떠올리는 표정이었다. 이윽고 통역 여성이 백인 영사의 귀에 대고 뭔가를 속삭였다. 그 순간 얼음짱 같던 백인영사의 표정이 봄눈 녹듯 사라지고 무엇엔가 감동하는 눈빛으로 변했다. 통역이 내게 말했다.
“전과자를 집에 데리고 있으신 적이 있죠?”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예 뭐 갈 데가 없다고 해서 집에 데리고 간 적이 있긴 있습니다. 별 거는 아닌데요----”
오랫동안 징역 생활을 한 상습절도범을 변호했었다. 그가 석방되던 날이었다. 교도소의 철문을 나선 그는 내게 갈 곳이 없다고 했다. 황당했다. 그렇다고 그를 길거리에 버려둘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집으로 데리고 갔었다. 그 사실이 미화되어 인터넷에 떠돈 것 같았다. 조금 쑥스러웠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백인 영사가 나를 보는 눈빛이 완전히 달라졌다. 경이의 눈빛이었다. 이 사람이 왜 이러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백인 영사가 잠시 밖으로 나가더니 묵직한 타이프라이터를 들고 돌아왔다. 그는 내게 바로 영주권을 주겠다고 했다. 캐나다는 당신같이 죄인에게 따뜻하게 해 주는 마음을 가진 사람을 환영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줄 수 있는 혜택은 뭐든지 다 줄테니까 말하라고 했다. 그러면 서류에 그 내용을 못 박아서 쓰고 서명해 주겠다고 했다. 조금 멋적은 생각이 들었다.
미국이나 캐나다인들은 작은 선행에 민감하게 감동을 받는 것 같았다. 작은 선행도 믿어주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 것 같았다. 국가의 질은 국민들의 의식 수준이 아닐까. 우리 사회도 그랬으면 좋겠다. 그러면 훨씬 활기가 돌고 따뜻해 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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