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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들꽃같은 사랑들

Joyfule 2023. 11. 8. 11:37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들꽃같은 사랑들



아침이다. 치솟는 닭 울음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오전 아홉시의 투명한 태양이 허공에서 떠있다. 창밖으로 내려다 보이는 회색 바다의 표면이 반짝거리고 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결에 초여름의 싱그러운 기운이 묻어있다.

내가 글을 쓰는 조용한 시간이다. 내면의 기억 서랍을 살며시 열어본다. 정리되지 않은 수많은 기억들이 먼지를 뒤집어 쓴 채 가득 들어차 있다. 나는 가만히 앉아서 잠시 기다린다. 그렇게 하면 마음의 허공에서 부유하던 기억 하나가 조용히 다가와 내려앉을 때가 있다. 오늘은 뜬금없이

오십년 세월 저쪽의 변두리 독서실의 스산한 장면이 나타났다. 거친 콘크리트 바닥의 독서실이었다. 베니어판을 잘라 가림막을 한 나무 책상들이 붙어 있는 메마르고 삭막한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나이 먹은 초라한 모습의 남자가 거기서 살고 있었다. 그는 밤이면 독서실의 딱딱한 나무 의자들을 붙여놓고 잤다. 밥때가 되면 복도의 구석에 있는 작은 석유풍로 위에서 라면을 끓여 먹었다. 끓는 물에 라면과 스프만을 털어 넣은 것이었다. 김치도 없었다. 영양부족인지 그의 메마른 얼굴에는 버짐이 더러 보였다. 그는 고시 공부를 한다고 했다. 그는 그냥 비참해 보였다. 나는 그와 말을 섞은 적이 없었다. 그냥 옆에서 봤을 뿐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스쳐 지나간 그 남자가 이상하게 나의 마음으로 쳐들어 올 때가 있었다. 그럴때면 나의 양심에 걸리는 게 있었다. 그때 가까이 있는 우리 집에 가서 김치 한 그릇이라도 왜 가져다 주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가 일었다. 나는 참 메마른 성격을 가진 나쁜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기억이 바래거나 사위어지지 않고 아직도 나의 뇌리에 자주빛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별 게 아닌데 나는 그걸 하지 못했다는 자책감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십년 가까운 나의 변호사 생활은 소설 ‘천로역정’에서 보듯이 길을 가는 나그네가 세상 만나는 광경 비슷한 것이었던 것 같다.

여주의 경찰서 안에서 한 남자를 만났던 기억이 오래 남아있다. 절도죄로 구속된 남자였다. 그가 공허한 표정으로 내게 이런 말을 했었다.

“저는 버려진 아기였어요. 늙은 거지가 나를 거두어 어린 나를 키웠어요. 거지 아버지는 아침이면 동냥자루를 들고 이웃 마을로 구걸을 갔다가 저녁이면 돌아왔어요. 저는 저녁이 되면 마을 어귀까지 마중을 갔어요. 어떤 날은 아버지의 동냥자루에 보리쌀이 두되 정도 차 있기도 했어요. 운수 좋은 날이죠. 저는 아버지의 찢어진 고무신 속에서 진종일 동냥 다니느라고 부르튼 발가락을 보면 콧날이 시큰했어요. 저는 거지였기 때문에 어떤 경우도 견딜 수 있어요. 그런데도 도둑질을 했어요. 욕심 때문이죠. 이번에도 시골길을 가다가 농사하는 집 마당에 널어 말리는 빨간 고추를 보고 가져간 거예요. 욕심이죠. 언젠가 광에 곡식을 가득 채운 부자가 되고 싶었어요.”

인생길을 가다가 우연히 스쳤던 한 남자의 모습이었다. 그의 얘기 속에 나오는 거지 노인을 생각하면서 애잔한 마음이 들었었다. 버려진 아기에게 아버지가 되어주고 구걸을 해서 밥을 먹인 그 아버지는 어쩌면 성자는 아니었을까.

이제 유튜브에서 작은 미담 하나를 발견했다. 홍대 근처의 파스타집 주인이 제때 밥을 못 먹는 아이에게 공짜로 파스타를 준다는 내용이었다. 그 파스타 집 주인은 자신이 고시원에서 라면도 먹기 힘들었던 때를 생각해서 그런 일을 한다고 했다. 자기가 아파 보아야 남을 도울 수 있는 것 같다. 그런 사실이 우연히 알려지자 청와대 행정관이 수박 한통을 사가지고 영부인의 편지와 함께 조용히 그 파스타 집을 찾아갔다고 했다. 판사를 하던 친구가 새벽 도시락을 들고 쪽방촌 움직이지 못하는 노인들에게 배달했다. 판사를 하던 또 다른 친구는 오카리나를 배워 노숙자촌등에서 버스킹공연을 하고 있다. 법정에서는 무섭고 엄하던 재판장들이었다. 내가 묵는 실버타운 노인들 중에는 텃밭에서 부추를 키워 이웃에 나누어주는 분들도 있다.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숙여 삶의 들판을 보면 노랗고 하얀 작은 들꽃 같은 사랑이 곳곳에 피어 있는 걸 보게 된다. 그래도 살만한 세상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