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밤 - 노천명
앞벌 논가에서 개구리들이 소낙비처럼 울어대고 삼밭에서 오이 냄새가 풍겨 오는 저녁 마당 한 귀퉁이에 밤삼덩쿨, 엉겅퀴, 다북쑥, 이런 것들이 생짜로 들어가 한데 섞여 타는 냄새란 제법 독기가 있는 것이다. 또한 거기 다만 모깃불로만 쓰이는 이외의 값진 여름밤의 운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달 아래 호박꽃이 화안한 저녁이면 군색스럽지 않아도 좋은 넓은 마당에는 이 모깃불이 피워지고 그 옆에는 멍석이 깔려지고 여기선 여름살이 다림질이 한창 벌어지는 것이다. 멍석자리에 이렇게 앉아 보면 시누이와 올케도 정다울 수 있고, 큰애기에게 다림질을 붙잡히며, 지긋한 나이를 한 어머니는 별처럼 머언 얘기를 들려 주기도 한다. 함지박에는 가주* 져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노오란 강냉이가 먹음직스럽게 담겨 나오는 법이겠다.
쑥댓불의 알싸한 내를 싫찮게 맡으며 불 부채로 종아리에 덤비는 모기를 날리면서 강냉이를 뜯어먹고 누웠으면 여인네들의 이야기가 핀다. 이런 저녁, 멍석으로 나오는 별식은 강냉이뿐이 아니다. 연자간(硏子間)*에서 가주 빻아 온 햇밀에다 굵직굵직하고 얼숭덜숭한 강낭콩을 두고 한 밀범벅이 또 있겠다. 그 구수한 맛은 이런 대처의 식당 음식쯤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온 집안에 매캐한 연기가 골고루 퍼질 때쯤 되면 쑥 냄새는 한층 짙어져서 가정으로 들어간다. 영악스럽던 모기들도 아리숭 아리숭 하는가 하면 수풀 기슭으로 반딧불을 쫓아다니던 아이들도 하나 둘 잠자리로들 들어가고, 달이 휘영한 마을의 여름밤은 깊어지고 아낙네들은 멍석 위에 누워서 생초* 모기장도 불면증도 들어보지 못한 채 꿀 같은 단잠이 퍼붓는다.
쑥을 더 집어넣는 사람도 없어 모깃불의 연기도 차츰 가늘어지고 보면, 여기는 바다 밑처럼 고요해진다. 굴(洞 )속에서 베를 짜던 할미라도 나와서 다닐 성부른 이런 밤엔, 헛간 지붕 위에 핀 박꽃의 하이얀 빛에 나는 넋을 잃곤 했다. 한잠을 자고 난 애기는 아닌 밤중 뒷산 포곡새* 울음소리에 선뜻해서 엄마 가슴을 파고들고, 삽살개란 놈은 괜히 짖어대면 마침내 온 동리 개들이 달을 보고 싱겁게 짖어대겠다.
위키백과 노천명 | 출생일 = 1911년 9월 1일 | 출생지 = 일제 강점기 황해도 장연군 박택면 비석리 281
사망일 = 1957년 6월 16일 새벽 1시 30분 노천명(盧天命, 1911년 9월 1일 ~ 1957년 6월 16일)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의 기자, 시인..
1946 ~ 부녀신문 근무
1955 ~ 이대 출판부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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