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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이란 무엇인가. 1

Joyfule 2021. 5. 10. 15:05

 

 

  

   영성이란 무엇인가. 1

 이정석 (풀러신학교 조직신학 교수)

 

 현대에 영성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특히, 지성적인 그리스도인들은 헨리 나우웬이나 리차드 포스터의 책을 읽으면서 자신의 영성을 가꾸려고 노력하며, 신학 교육에서도 영성 신학이 등장하고 신학도들의 영성 형성이 중요한 관심사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도날드 카슨의 말대로, 영성에 대한 현대적 관심은 “유익하면서도 동시에 당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해방의 영성, 저항의 영성으로부터 여성운동의 영성, 동성애의 영성, 켈트 영성, 심지어 종교다원적 영성에 이르기까지 우후죽순처럼 무분별한 운동들이 영성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인들을 혼란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성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말자는 주장도 제기되는 실정이다. 그러나, 우리는 혼란된 영성의 시대에 올바른 영성과 그릇된 영성을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하며, 참된 영성의 형성과 성숙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영성에 대한 현대적 관심

 

초대교회가 오랜 핍박을 받는 동안 사막이나 동굴, 혹은 오지에 칩거하면서 발생하기 시작한 수도원적 영성운동에 이어, 중세에는 신비적 영성운동이 만발하였다. 이에 대해 생활 속의 영성을 강조하는 토마스 아 캠피스의 그리스도 모방운동(Devotio Moderna)이 새롭게 일어나 종교개혁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개신교회에서는 대표적으로 세 가지의 영성 운동이 발생하였다. 첫 번째는 17세기 개신교회가 이성과 교리 중심적인 정통주의에 치우치자 반동적으로 발생한 경건주의 운동으로, 성경에 대한 묵상과 기도를 강조하는 경건생활을 추구하였는데, 후에 존 웨슬리를 통해 감리교회를 창시하고 부흥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미국에도 각성운동과 선교운동을 일으켰다. 두 번째는 19세기 자유주의가 개발한 영성으로 슐라이에르막허의 보편적 종교성의 신학에 기초하여 자연적이고 합리적인 영성을 추구하였는데, 윌리암 제임스가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1902)에서 심리학과 신경과학을 이용하여 신비한 종교적 경험들을 설명하였다. 세 번째는 20세기 초에 발생한 오순절운동으로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를 강조하며 신비적 영성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논의되는 영성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1960년대부터 갑자기 발생하였는데, 이는 세속화신학과 사신신학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운동과 연관되어 있다. 이 시기는 제2차 바티칸회의가 열리고 개신교회와의 교류가 시작되는 때이며, 동시에 제2차 프랑스혁명이라고도 불리는 반문화운동이 과격하게 확산되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이 태동하는 때이고, 또한 미국에서는 반전운동과 히피운동이 발생하면서 힌두교의 구루들을 중심으로 뉴 에이지운동이 출범하던 때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1980년대부터 영성에 대한 논의가 전개되었는데, 로마 카톨릭의 영성 신학에 대한 소개가 시작된 후 개신교에서는 엄두섭의 수도적 관심과 함께 종교다원주의자 김경재가 1985년 [영성신학 서설]로부터 92년 [종교다원시대의 기독교 영성]까지 여러 권의 영성에 대한 저서를 출간함으로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되었다. 따라서, 영성에 대한 현대적 관심은 신자유주의에서 출발하여 점차 복음주의 계열로 확산되었는데, 이러한 역사적 발단과 전개과정이 그 문제점을 암시하고 있다.

 

자연종교적 영성

 

그러면, 우리는 현대의 혼란된 영성에 대해 어떤 분별력이 필요한가? 그릇된 영성의 첫 번째 유형은 자연종교적 영성이다. 이것은 참된 영성을 찾기 위해 기독교를 넘어 타종교로 떠나는 종교편력의 영성이다. 현대 카톨릭의 선구적 영성운동가인 토마스 머튼은 기독교의 영성을 추구하다가 보다 더 고차원의 영성을 위하여 동양종교로 향하였으며, 종교다원주의자들도 불교나 힌두교에서 영성을 추구한다. 그뿐 아니라, 심지어 복음적인 영성 논의에서도 타종교, 특히 선불교에 대한 탐구가 흔히 발견된다. 또한, 카톨릭을 교리적으로 정죄하고 이단이라고 주장하는 보수적 개신교인들도 영성에 있어서는 무비판적으로 토마스 머튼이나 헨리 나우웬을 열독한다.

 

알리스터 맥그래쓰가 지적하는 대로, 기독교 안에 풍요한 영성의 전통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고매한 영성을 다른데서 찾고 빌려오는 것은 게으름의 소치인지 모른다. 더욱이, 영성을 찾아 타종교로 떠나는 영적 방황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물론, 인간의 종교성은 일반은총의 영역으로서 타종교에도 존재하지만 그것은 기초적이고 저급한 영성일 뿐이며, 참된 영성은 하나님과의 화해가 있을 때만 가능한데 고급한 영성을 위해 저급한 종교로 나아가는 것은 근본적인 오류가 아닐 수 없다. 극도의 고행이나 수련을 통과한 사람에게서 우러나는 초연한 인간성이나 난해한 경전과 선문답 같은 문구가 풍기는 오묘한 도리가 아무리 외적으로 고매해 보인다 할지라도, 그것은 모두 하나님과의 적대관계를 해결하지 않은 채 스스로 구원에 이르려는 인간의 위장된 교만에 불과하며 그리스도에 의존하는 구원을 거부하는 영적 반항의 연장일 뿐이다. 물론, 일반은총적 차원에서는 그들의 종교성이나 인간성이 어떤 측면에서는 많은 기독교인보다도 더 개발될 수 있으며 따라서 존경심을 느낄 수도 있으나, 그러한 영성은 모두 특별은총적 차원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서 승격되고 승화되어야 할 영성들이다.

 

신비적 영성

 

그릇된 영성의 두 번째 유형은 신비적 영성이다. 이것은 초자연적이고 초능력적인 신통력을 흠모하고 추구하는 영성이다. 여기서는 자기의 영적 성숙이나 수평적 차원은 무시된 채 신적 존재와의 수직적 교통을 통하여 신비한 능력을 수행하고 엑스타시적 종교체험을 추구한다. 카톨릭의 신비적 영성이 하나님과의 약혼과 결혼으로 나아가는 영성의 7단계를 제시한 아빌라의 테레사와 같이 신비적 체험을 추구하였다면, 오순절운동으로 야기된 개신교의 신비적 영성은 초자연적 능력을 추구한다.

 

한국교회 영성의 독특한 현상들을 열거하면서 “결국 현상적으로 보자면 한국 기독교의 영성은 불교, 유교, 도교와 마찬가지의 길을 걷고 있는 듯하다”는 김정훈의 진단이나, 샤마니즘을 비롯한 전통종교의 영성을 기독교의 이름으로 포장한 한국교회의 영성운동이 결국 이교화를 결과한다는 김성태의 지적은 주로 신비적 영성을 우려한 것이다. 마술적 신유를 위해 이교의 방법을 도입하여 성령수술이라는 이름으로 신비적 치유를 현혹하는 할렐루야 기도원이나 비성경적 예언들까지도 용납하여 결국 시한부 종말론의 수치를 초래한 신비주의적 신앙행태는 참된 복음보다 신비현상 자체를 추구하는 다른 복음이 아닐 수 없다. 실로, 윌리암 제임스는 무신론적 사고를 가지고도 동시에 신비현상을 긍정하였으며, 세계의 수많은 종교들의 신비현상들을 수집하여 심리학과 신경의학으로 설명하였고, 신과학이라고 주장하는 심령과학도 단순한 테크닉으로서 신비적 능력을 소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러한 신비적 영성은 세계의 모든 신과 모든 영과 모든 신비 현상을 이용하여 신비체험과 초능력을 소유하려는 뉴 에이지 영성과 본질상 크게 다르지 않다.

 

낭만적 영성

 

그릇된 영성의 세 번째 유형은 낭만적 영성이다. 이것은 영성을 경건한 감정의 고양으로 이해하는 감상적 영성이다. 영성가들의 영적 편력을 탐독하며 문학적 영성을 형성하고 영적 무드를 즐기며, 큐티를 통하여 경건한 감정을 향유하지만, 만일 그것이 거룩한 감정의 나르시시즘에 빠져 거기서 그치고 실천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한가롭고 낭만적인 감상일 뿐 고난이나 십자가의 길은 외면하는 현대의 지성적이며 사치스러운 영성이 아닐 수 없다. 경건주의와 낭만주의에 영향을 받은 슐라이에르막허는 기독교의 본질을 종교적 감정이라고 규정하고 감성적 종교를 추구하다가 자유주의신학의 아버지가 되었다.

 

로버트 로버츠는 [영성과 인간의 감정]에서 “기독교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감정들의 세트(a set of emotions)”라고 정의하며 영성을 감정 중심으로 이해하였지만, 기독교 신앙은 단순한 감정 이상의 것이다. 물론, 그가 말한 대로, 기독교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중심적 명령이지만, 그것은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 의지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사랑을 흠모하는 하나의 종교적 감상으로 끝날 것이다. 웅장하고 아름다운 성당에 가서 느끼는 거룩한 감정이나 위대한 종교시를 읽으며 일어나는 숭고한 열정이 참된 영성의 본질이 아니며, 기독교의 영성은 느낌 이상의 실재적 삶의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실로, 참된 경건생활이란 문학적인 경건서적을 즐기고 분위기 좋은 찬송을 부르며 고요한 명상과 시적인 기도에 도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다.”(약 1:27)

 

영성의 존재론적 근거

 

실로, 영성이란 일시적 감상이나 신비적 체험이나 종교적 희열과 같이 존재론적 실체가 없는 일시적 경험도 아니며, 지성이나 감성이나 의지와 구별되는 인간의 제4성도 아니다. 영성(靈性, spirituality)이란 영혼의 성품, 성질, 혹은 성향을 가리킨다. 기독교 인간론에 의하면, 모든 사람이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어 있다. 즉, 프뉴마 혹은 프쉬케라고 부르는 인간의 영혼은 육체와 구별되어 모든 정신적 실체와 기능을 포함하는 인간의 본질적 실체로서 정신 혹은 마음이라고도 불리며, 살아있는 동안에는 육체와 불가분리적으로 연합되어 있으나 죽을 때에는 육체와 분리되어 내세로 가게 된다. 비물질적인 영혼에는 여러 기관과 기능들이 존재하는데, 지능이나 감정이나 의지 등이 포함된다. 영혼은 오로지 순수하고 완전한 영이신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에게만 존재하며, 따라서 인간은 영적인 존재(homo spiritualis)로서 영성을 소유하는 유일한 피조물이다. 그러나, 각자 그 기관들이 다르게 개발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의 지능이 가지는 성품이나 성질을 가리켜 그의 지성이라고 하고 감정이 개발된 성품과 성향을 그의 감성이라고 부른다.

 

마찬가지로, 영성이란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포함하는 영혼 전체의 성품을 가리키는 종합적이고 전인적인 개념이다. 그것은 그의 지식과 감정과 의지가 어떻게 개발되었고 무엇을 경험하였으며 어떻게 통합되었느냐에 따라 모두 다른 모습을 보이며, 이는 계속 변화하고 발전한다. 어떤 사람은 성경 연구와 독서 등 지적 노력에 집중함으로서 지성이 고도로 발전하여 훌륭한 지성을 가지고 있으나 감성이 메마르고 의지가 박약하여 종합적인 영성에 있어서는 편향적이고 미성숙한 영성을 가질 수도 있으며, 어떤 사람은 그와 반대로 감성만 발달한 경우나 의지만 발달한 경우도 있어서 종합적이고 전인적인 영성에서는 저급한 사람들도 있다. 한국교회에서 근본주의자들은 사랑의 감성이나 의지는 결여한 채 교리적 지성에 치우치고 자유주의자들은 근본적 교리도 부정한 채 사회운동만을 추구하는 행동적 의지에 치우치고 신비주의자들은 윤리나 교리보다도 신비적 감성에 치우친다. 노영상이 ꡔ영성과 윤리ꡕ를 연결한 것도 도덕성은 개발되지 못한 채 편파적 영성을 추구하는 문제점을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만일 영혼이라는 실체에 근거하지 않는 영성이 있다면, 그것은 존재론적 기반을 상실한 허구에 불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