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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헌신적인 크리스천에게 불행한 삶이 떠나지 않는가?

Joyfule 2018. 8. 23. 23:39


 
     왜 헌신적인 크리스천에게 불행한 삶이 떠나지 않는가?

 


오늘은 아무도 말하지 않는 무거운 주제를 꺼내고 싶다. 칼럼의 제목처럼, 왜 헌신적인 교회지도자들과 교인들에게 불행한 삶이 덕지덕지 붙어있는가 하는 것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지는 축복의 약속이 도배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교회마당을 밟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인지, 행복이 아니라 불행과 고통으로 점철된 삶을 이어가고 있다는 게 기가 막히지 않은가? 그런데 이런 삶은 믿음이 형편없는 교인들에게 있는 게 아니라, 경건하고 신실한 교회지도자들과 순종적이고 헌신적인 교인들에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끄집어내면 연단을 통해 믿음을 견고케 하여는 하나님의 뜻이라며, 참고 인내하면서 때가 되면 좋은 날이 올 거라는 위로와 격려를 해주곤 한다. 그러나 이런 말투가 대책 없는 희망고문이라는 것은 아는 사람들은 다 안다.

 

최근 영성학교에는 해외에서 사역을 하는 사모님께서 오셔서 기도훈련을 하고 있다. 그분의 인생은 무겁기 짝이 없었다. 다 키운 아들을 골수암으로 먼저 보낸 것은 불행의 시작이었고, 최근에는 남편 목사님이 암 판정을 받아 어렵사리 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로 암은 치료가 되었지만 방사선 후유증으로 평생 암환자와 다를 바 없는 고통을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했으며, 그 힘들다는 이민목회생활 속에서도 꿋꿋하게 잘 자라준 딸이 축복 속에 결혼을 하였지만 발달장애를 가진 자녀가 태어났으니 눈물이 마를 날 없는 인생극장이 열린 셈이다.

이런 삶이 믿음을 연단시키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기 앞서 억장이 무너지지 않는가? 필자 부부를 끔찍이 좋아하며 전도하여 교회도 잘 다니면서 잘 따르던 조카를, 백혈병으로 저 세상으로 보낸 과거사가 있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그 때의 일이 생각난다. 필자가 사업에 실패하여 그야말로 무지막지하게 인생이 떠내려가고 있을 때였다.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신앙생활이 짐이 된 채 주일예배만 허깨비처럼 드리고 있을 때였다. 그 때 성령께서 아내를 통해 겟세마네라는 단어를 끝도 없이 생각나게 하셨다. 몇 달 동안 그 단어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게 하셨지만, 삶에 지친 우리는 그 기이한 현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사랑하는 조카를 먼저 보내고 나서야, 하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한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찾으라며 조카를 살릴 기회를 주셨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아픈 기억을 퇴비로 삼아 쉬지 않고 하나님을 부르는 기도를 시작하였다는 게 뼈아픈 아쉬움만 가득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무지와 어리석음이 삶과 영혼을 망하게 하는 걸 무기력하게 보고 있었으니 말이다. 사실 울 영성학교는 기가 막힌 인생극장을 살던 사람들이 찾아온다. 어떤 이들은 정신질환과 고질병으로, 어떤 이들은 사악한 목회자에게 전 재산을 탈탈 털려서, 어떤 이들은 악성부채의 수렁에 빠져서 이런 저런 불행한 삶을 살다가 찾아오고 있다.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은, 그들이 경건하고 희생적인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이들에게 이렇게 기가 막힌 인생을 살게 내버려두었을까?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은 맞지만,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인생극장을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삶을 사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자신이 세상에 살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계시는데, 자신들을 하나님이 사랑한다고 착각하며 짝사랑하며 살고 있다고 보면 된다. 필자의 말이 허구라면,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증거로서 행복하고 평안한 삶으로 증명해보여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 이렇게 고통스럽고 불행한 삶이 끊어지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녀일 수 있겠는가?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3:10~18)


위에서 바울은 구약의 다윗의 시편을 인용하여 모든 사람은 죄인이며 의인은 없다고 선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네 교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말미암아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여전히 경건하고 헌신적인 교인들이 파멸과 고생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행복과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지 누가 말해줄 수 있겠는가? 그 삶의 모습은 주일성수를 하고 각종 희생적인 신앙행위를 하면서 목회자의 권면에 순종하는 경건하고 헌신적인 교인이라고 할지라도, 여전히 죄 가운데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네 교회에서는 자의적으로 해석한 신학자들의 교리와 교회의 관행을 앞세워서 교인들이 죄다 의인이 되었다고 세뇌시키고 있을 뿐이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1:3)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14:17)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5:22,23)

 

당신에게 영혼이 잘 되는 축복으로, 천국에서 영원히 살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면 하는 일마다 잘되고 건강하며 기쁨과 평안이 넘쳐나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땅에서 눈물과 고통뿐인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면, 여전히 당신은 죄의 종이 되어 살고 있는 셈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워서 자신이 주인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긴다면 하나님의 뜻에 절대복종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뜻은 날마다 주인을 쉬지 않고 찾으며 성령의 내주를 간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인을 사랑하지도 않고 주인을 찾고 싶지도 않기에 하나님께서 이들은 귀신들이 지배하는 어둠의 세상에 내버려 둔 것이다. 그래서 눈물의 빵을 씹으며 고통의 물을 마시며 살고 있는 이유이다.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