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들은 왜?
김종식 목사와 김희영이 번역
출처 wwww.segibak.or.kr
3-56. 왜 유족들은 ‘카디쉬(Kaddish)’를 낭독할까?
카디쉬(애도자의 기도문)는 회당 예배 때 낭독하는 고대 시로써, 아람어로 되어 있다. 애도자의 입장에서, 고뇌에 지쳤지만 하나님을 믿고 삶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고백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카디쉬는 욥기의 메아리라고 불리기도 한다. 욥은 13장 15절에서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소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변백하리라”라고 고백하였다.
카디쉬를 애도자의 기도로 언급하는 가장 오래된 문서는 비엔나의 랍비 모세(Isaac ben Moses, 1180-1260)가 쓴 오르 짜루아(Or Zarua)라는 책이다. 카디쉬는 하나님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자 하는 인간의 마음을 암시한다.
탈무드(Berachot 60b)가 지적하였듯이 사람은 슬픔과 비탄에 빠졌을 때 카디쉬를 통하여 하나님의 발 앞에 모든 짐을 내려놓을 수 있다. 카디쉬는 “그의 위대하신 이름을 찬미하고, 그 영광을 찬송하나이다”라는 구절로 시작되며, 하나님이 결정하신 일은 무엇이든 옳다는 고백이 함축되어 있다.
처음에는 아들만 카디쉬 기도를 할 수 있었고,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경우에만 했다. 그러나 요사이는 점점 범위가 넓어져 부모님을 여읜 딸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부모님이 아닌 친척을 위해서는 히브리어로 ‘쉘로쉼’이라 부르는 삼십일 기간 동안에 카디쉬를 낭독한다.
3-57. 왜 카디쉬는 히브리어가 아닌 아람어로 되어 있을까?
카디쉬의 마지막 구절인 “지극히 높은 곳에서 화평을 베푸시는 그 분이 우리와 이스라엘을 평화롭게 하시리로다.
아멘”이라는 구절을 제외하면 기도문 전체가 아람어로 되어 있다.
기원전 5세기 에스라 시대부터 탈무드 시대를 훨씬 지날 때까지 바벨론과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던 유대민족은 아람어를 사용하였다. 따라서 카디쉬는 일반인들이 잘 이해할 수 있고 일상에서 사용하는 아람어로 만들어졌다.
3-58. 왜 부모님을 위해 카디쉬를 암송하는 기간이 교파에 따라 차이가 날까?
카디쉬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은 아들에게 있다. 아들은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해 일 년 동안 이 기도문을 암송해야 한다.
부모님을 위해 열두 달 동안 카디쉬를 암송해야 한다는 규정은 탈무드에서 나왔다. 즉 탈무드(Berachot 58b)에 보면, “죽은 사람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지는 데 열두 달이 걸린다”는 구절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탈무드 시대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왜냐하면, ‘악한 사람이 지옥(히브리어로 게헤나 또는 게힌놈)으로 끌려 가면 최고 열두 달 동안 벌을 받는다’라는 생각이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자식이 열두 달 동안 카디쉬를 암송하면 마치 부모가 지옥에 간 것처럼 오해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폴란드 크라코브의 랍비 이셀리스(Moses ben Israel Isserles, 1525?-1572)와 다른 권위있는 학자들이 부모를 위해 카디쉬를 암송하는 기간을 열한 달로 줄여 버렸다. 심지어 유대력으로 윤년이 되어 일년이 열세 달인 경우에도 열한 달 동안만 암송하도록 하였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이 기간을 따르고 있다.
3-59. 왜 카디쉬의 마지막 절을 암송할 때 뒤로 세 걸음 물러날까?
카디쉬의 마지막 구절은 욥기에서 인용한 구절이다. 그 내용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 화평을 베푸시는 하나님이 온 인류를 평화롭게 하시기를 간청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마지막 구절은 왕의 왕이신 하나님을 대하는 마지막 부분이며, 왕 앞에서 말을 마쳤음을 표시하기 위해 암송자는 짧은 뒷걸음질을 치게 된다. 그리고 애도자도 기도를 마치면서 공손하게 뒷걸음질 친다.
뒤로 물러난 후에는 그 자리에 머물지 않고 곧 바로 원래 서 있던 자리로 돌아가게 된다.
3-60. 왜 회당 관리인이 죽은 사람을 위해서 카디쉬를 암송하기도 할까?
죽은 사람이 자식이나 친척이 없을 경우에는 회당의 관리인이나 다른 어떤 사람이 카디쉬를 맡을 수 있다.
단, 한 사람이 같은 기간에 여러 카디쉬를 맡아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이 같은 기간에 여러 번 카디쉬를 맡는 경우도 종종 있게 된다.
(www.christianmuseum.or.kr, The Jewish Book of W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