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역사와 종교1.
역사
히브리인 : 이스라엘 나라는 아브라함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볼 수 있다. 아브라함 이전과 노아 홍수 이후의 인생들이 바벨탑을 쌓는 것을 보신 하나님은 그 탑을 무너뜨리고 그들의 언어를 흩으셨다(창 11:1-9).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노아의 자손들은 각 지역에서 하나의 부족을 이루며 새로운 족장 시대를 열어가고 있었다. 노아의 둘째 아들인 셈은 홍수 후 2년부터 약 300년 동안 자손을 낳았는데 그 자손은 유브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을 중심으로 하여 바벨론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
이곳에서 데라의 후손인 아브람이 출생하였으며 결혼도 하였다(창 11:27-30). 어느날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나타나 ‘약속의 땅’(창 15:18)을 보여 주시며, 그곳에 가서 ‘자손을 번성케 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라’고 명령하셨다(창 12:1-5).
이 때부터 아브람에게 히브리인라는 수식어가 붙게 된다. 히브리인이란 “도망자가 와서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고하니”(창 14:13)에서 ‘히브리 사람’(yrib][ih;] : 하이브리)이라고 처음으로 나오는데 이 명칭은 가나안 원주민들이 아브람을 보고 부르는 이름이다. 이 명칭은 ‘강 저편에서 건너온 자’라는 뜻으로 아브람의 가족이 유브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을 건너 왔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었다(수 24:3).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아브라함’이라는 새 이름을 주셨고, 그는 이삭을 낳았고 이삭은 야곱을 낳았다.
야곱은 형 에서를 피하여 외삼촌이 거주하는 밧단 아람으로 가서(창 28:1-2), 삼촌의 두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열두 아들을 낳고 얍복 나루에서 천사와 씨름 하여 ‘이스라엘’이란 새로운 이름을 받았다(창 32:22-28). 이 때부터 ‘히브리인’이 ‘이스라엘’로 바뀌고 한 나라로 태동하기 시작하였다.
이스라엘 나라가 태동하기까지는 야곱으로부터 약 43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서였다. 야곱은 열두 아들을 낳았고 그들은 도합 70여 명의 대 가족을 이루며 살았다. 야곱의 열 한번 째 아들인 요셉은 형들에 의해 애굽으로 팔려가게 되었고, 요셉은 그곳에서 국무총리로 등극하는 은총을 받았다. 이 무렵 애굽과 가나안 땅에 흉년이 와서, 가나안에 있던 야곱과 그의 가족들이 요셉이 있는 애굽 땅에 가서 약 400년 동안 사는 동안에 약 2백만 가량의 자손이 번성하였다(출 12:37-38).
그리고 430년이 지난 후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백성들을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땅으로 이끌어내라’는 사명을 주셨다. 이에 순종하여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젓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향했지만, 모세와 및 애굽에서 나온 1세는 일부를 제외하고 시내 광야에서 모두 죽었다. 광야에서 태어난 2세들만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 야곱의 열 두 아들, 즉 열 두 지파대로 땅을 분할하여 ‘이스라엘’이란 한 국가를 이루게 되었다.
다윗 왕은 이스라엘 왕으로 등극하여 약 40년 간 통일 국가를 이루었다. 그 후에 솔로몬이 왕이 되어 아버지의 소원이었던 하나님의 법궤가 안장할 성전을 봉헌하였고, 이스라엘의 최고의 부를 누리면서 태평 성대를 이루었다. 그러나 솔로몬 왕이 죽고 난 후에는 열두 지파로 형성되었던 나라가 두 나라로 분열되는 비극이 일어났다(왕상 12:1-33).
즉, 유다 지파와 베냐민인 두 지파는 예루살렘 성을 수도로 삼아 유다 왕국을 세웠으며, 첫 번째 왕으로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이 왕이 되었다. 그리고 약 385년 동안 19명의 왕과 1명의 여왕이 이 지역을 통치하였다. 그 외 열 지파는 느밧의 아들인 여로보암을 왕으로 세워 사마리아 성을 수도로 삼아 이스라엘 나라를 세웠으며, 약 250년 동안 19명의 왕이 이 지역을 통치하였다.
사마리아를 수도로 삼은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침공을 받아 포로로 붙잡혀 가서 포로 생활을 하게 되었고(왕하 17장), 그후 135년이 지난 후에 남유다 왕국인 유다 왕국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약 70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하게 되었다(왕하 25장). 그 후에 분열되었던 두 나라가 타국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중에 하나가 되어서 다시 가나안 땅에 들어와 잠시 독립국가를 이루지만 이것도 잠시뿐 로마에 의해서 다시 속국이 되고 말았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약속의 땅 가나안’은 열두 지파가 점령하여 거주하는 지역으로써 성스러운 땅으로 간주된다. 이곳은 홍해로부터 페르시아만까지의 해안선을 끼고 있는 초승달 모양의 비옥한 토지를 가리키고 있다. 동서의 폭은 약 100km이며, 남북이 약 250km로 동은 요단강, 서는 지중해, 남은 브엘세바, 북은 단까지로 그 경계를 하고 있다.
기후 : 산악과 평야로 이루어져 있고, 서부는 바다로 동부는 사막으로 형성되어 있어 기후차가 매우 심하다. 지중해의 영향으로 겨울에는 비가 오고, 여름에는 사하라 사막의 열풍으로 건조하여 가뭄이 온다. 1년을 대략 2계절로 구분되는데 4월 하순부터 10월 중순까지는 건조기로 보고, 10월 중순부터 4월 중순까지는 우기로 본다.
의식주 : 신발은 샌들과 발바닥을 보호하기 위해서 야자 껍질 또는 동물의 가죽을 신으로 만들어 신었다. 남자들의 옷은 ‘탈리트’(4개의 장신술이 달린 푸른 빛을 띤 겉옷)를 입어 유대인의 상징으로 나타냈다. 그리고 속옷은 부드러운 옷감을 만들어 입었다.
오늘날과 같은 공업이 발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집에서 손수 옷감을 짜서 옷을 해 입었다.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옷이 화려하고 곱다. 겉옷 위에 외투를 걸치는데 이것은 여행할 때 잠자리에 침구로 사용되기도 했다. 옷감 재료로는 낙타털, 양털, 염소털이 사용되었다.
이들의 주식은 보리와 밀로 만든 빵과 과자이며 채소를 주로 먹었다. 그러나 특별한 날 즉 축제를 벌일 때에는 짐승을 잡아 고기를 먹기도 했다. 이들은 또한 점심과 저녁을 중히 여기고 규례를 따라 식사를 했다.
가족 제도, 풍습, 교육 : 이스라엘 사회는 대가족 중심 체제로 이루어졌다. 초기에는 모가장 제도(남편과 아이들이 모계를 따르는 데릴사위제도)였으나 차츰 가부장 제도로 정착되어 남성 위주의 사회체제로 정착되었다.
자녀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생명은 자녀를 통하여 이어진다는 생각으로 대가족 제도를 이룬 것 같다. 아이가 태어나면 탯줄을 자르고 물로 씻긴 후에 정결한 의미로 또 소금으로 씻었으며, 8일째에 할례를 행하였다.
결혼은 돈을 주고 받는 계약행위로 간주되어 기록문서가 작성되고 신부의 값이 지불되었는데, 후에는 ‘케투바’ 즉 신랑이 죽거나 이혼할 때에 신부의 값을 지불한다는 약속증서로 대치되었다. 신부는 지참금을 가져왔는데 이것은 그녀의 재산이 되었다. 결혼예식은 신부가 신랑집으로 가고 약 7일간 잔치가 있었다.
종교
이들은 삶 자체가 신앙으로 이루어져 있다. 출애굽에서 다윗 시대까지는 성막 중심으로, 솔로몬 시대에서 포로기까지는 성전 중심으로, 포로기 이후에는 재건된 성전과 회당 중심으로 예배가 이루어졌다. 종교 의식은 레위인이 당담하였고, 매일 조석으로 제사를 드렸다.
민족적 제사는 연 1회 가을에 드리는 속죄 일의 제사였으며, 율법에는 유대인 남자의 경우 1년에 3회 이상 성전에 올라오도록 되어 있었다(그러나 거리가 아주 먼 사람들은 1회만 올라왔다). 보다 직접적인 신앙행위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포로기 이후에는 각 고을의 회당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이 회당은 마을 장로회의에서 선출된 회당장이 관할하였다.
유대인들의 교육은 토라 중심 즉 신앙 교육의 중심 생활이다. 대부분의 교육은 가정에서 이루어졌으며 포로기에는 학교와 회당에서도 교육을 담당하였다. 여자의 교육은 어머니가 담당하였고, 주로 가사와 관계된 것을 가르쳤다. 남자는 3세까지만 어머니가 교육할 뿐 계승할 가업, 율법, 교양들의 일체를 아버지가 가르쳤다.
회당에서는 랍비들이 6세 이상된 남자에게 쉐마(신 6:4-9), 할렐(시 135편), 창조 이야기, 율법 등을 가르쳤다. 13세 되는 생일에는 ‘바르미추바(율법의 아들)’라는 성인식을 거행하고, 이때부터 학교외의 사회 여러 곳에서 농사법, 장사법, 천문학, 응용수학 등을 배웠다.
장례 의식을 살펴보면 죽은지 8시간은 장례식과 무덤 시신을 깨끗이 씻은 다음 손과 발을 천으로 붕대를 감듯이 감고 얼굴과 몸은 흰천으로 덮는다 (요 11:44). 그리고 무덤에 안치하고 나서 무덤 입구는 문을 만들어 돌로 그 입구를 막는다.
돌 무덤은 동굴 형태로 되어 있어 사람들이 들어 갈 수 있고 그 안에는 여러 개의 방의 형태로 된 무덤들이 있다. 인공적으로 만든 동굴 무덤은 가족 무덤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자손이 함께 사용하였다.
B.C. 1세기부터는 매장 후 약 1년이 지나 살이 부패하고 뼈만 남으면 그 뼈를 추려서 석관에 보존하였다. 이 석관은 석회암으로 만들었고 그 길이는 50~60cm로 겉면에 6개의 꽃잎과 기둥, 문, 아치와 같은 건축의 문양을 넣었다.
때로는 한 가족이 한 석관에 보존되기도 한다.1) 이런 풍속은 아마도 부활의 사상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구약 성서에는 부활에 관한 내용들이 나오고 있고 또 B.C. 1세기인 마카비오 때는 부활의 신앙을 믿고 전쟁을 한 기록이 있다.2)
로마시대 : 로마의 가장 위대한 것은 법률 제도이다. 로마의 법률은 모든 공법과 사법의 효시인 12동판법(B.C. 449년)에서 시작하여 민사 소송법, 명예법, 황제의 칙령을 포함하는 사법과 형법으로 발전해 간다. 이러한 일련의 법률들은 유스티니아누스에 의해 12권의 법전과 50권의 요람, 4권의 법학 개요로 정리되었다.
로마 당국은 법과 질서의 효율적 운영을 위해 지역 안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그 지역 내에서 해결하도록 각 총독과 행정장관에게 자치권을 부여했다. 그러나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가 권리를 주장할 경우에는 황제 앞에 가서 재판을 받는 특권이 주어졌다(행 25:21).3)
로마에게 정복 당한 이스라엘 : 예루살렘은 함락되고 이스라엘은 로마 관할 하에 모든 것이 움직였다. 또한 로마에서 제정한 세금을 내었다. 로마는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아 언어는 주로 헬라어를 사용했으며, 교육 방식은 암기 위주로 출세를 위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가정과 회당에서 철저히 토라 중심으로 교육하여 속국 속에서도 결속을 다지는 민족의 혼이 있었다.
A.D. 70년에 로마의 티토스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 성이 파괴되는 동시에 팔레스틴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은 전 세계로 떠돌아 다니는 유랑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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