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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이란 무엇인가

Joyfule 2016. 4. 30. 12:48

 

 

아래의 글은 "목회정보 2000" 사이트에서 가져온 글입니다.

이슬람이란 무엇인가

 

 

수니, 시아파의 원류
이슬람법이 종교와 세속의 일을 포괄하는 성격을 가졌음으로 말미암아서 이슬람 개혁자가 항상 직면해야 하는 것은 이슬람법의 전부 또는 일부를 유지해야 하느냐, 폐지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이쥬티하드의 문이 닫혔다고 함으로써 절대적 권위를 갖게 된 이슬람법을, 걸핏하면 근대 이슬람 개혁자들은 격렬하게 비판한다. 그들이 의도하는 바는, 이쥬마와 이쥬티하드를 방패로 1천년 전의 옛날로부터 꼭꼭 문을 닫아걸고 있는 샤리아를 두들겨 깨려는 것이다.
 
제4대 칼리프, 알리의 죽음은 다수파 수니와 소수파 시아의 분열을 초래했다. 알리 이후의 정치관, 종교관은 시아파가 계승했는데 그것은 그대로 이슬람 원시 종교관이었다. 시아파는 이마무의 위치를 신과 인간의 중개역이라는데 두었고 이마무는 동시에 반신격화된 종교 권위자였다. 그러한 이마무가 지도자로서 세속 사회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는 것이라고 했다. 한편으로 수니파는 중개자를 두지 않고 신자들 개인이 직접 신과 대치한다는 사고방식을 보이고 있다.
 
 불교나 그리스도교에도 이와 비슷한 분열은 있다.
즉, 시아가 대승불교나 로마 카톨릭과 같은 입장이라면 수니는 소승불교나 프로테스탄트인 셈이다. 시아에서는 알리를 12대에 걸친 이마무의 초대로 보고 있으며 신성한 지도자로서 숭배하고 있다. 최후인 12대의 이마무, 무하마드 마하디는 940년에 돌연 세상에서 모습이 사라졌는데 그 후로 그를 계승하는 자는 없다. 시아는 1502년에 샤아(왕) 이스마일에 의해 건국된 신생 페르시아에서 정교가 분리되었다.
 두 종파의 교의상의 차이는 다음과 같은 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수니는 법률의 근원으로서 코란과 허디스, 공동체의 합의, 「전례」등을 들고 있는데, 이에 반해서 시아는 코란, 허디스, 이마무의 합의, 그리고 이마무의 판단이라는 4가지를 법의 근원으로 삼고 있다.
시아는 허디스의 독자적 집록을 가졌으며, '자파리'라고 불리는 독자적인 학파를 가지고 있다. 시아파 교도 역시 메카 순례를 하지만 종교상의 정열적인 발로에서 이라크의 나자프와 카르바라에 있는 알리의 두 아들 핫산과 후세인의 무덤을 참배하기도 한다.
 
'지하드'란 무엇인가
전투적 이슬람의 대표자는 이슬람의 뛰어난 점을 찬양하는 것에 너무도 정력적이었기 때문에 이슬람에 대한 다음과 같은 비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슬람은 칼과 '지하드'(성전)에 의해서 세력을 확대했다. 그리고 어떤 종류의 범죄에 대해 이슬람 경제는 비현실적이다. 이슬람은 중혼을 인정하고 여성을 차별한다.」
 
이런 모든 일은 사실 코란에 의해 정해진 젓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것은 현재 정해진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것은 현재의 사우디 아라비아와 파키스탄의 정부 방침이기도 하다.
지하드라는 말 그 자체는「노력」이라는 뜻을 가진 말에 지나지 않다. 초기의 혁신적 일파인 '하리지'파는 지하드를 이슬람의 5가지 기둥에 곁들인 6번째의 기둥으로 삼으려고 했지만 그것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무하마드의 우상숭배와의 싸움이 지하드였던 것이고, 지금도 그것은 의무라고 생각하는 학파가 있다.
 
그러나 이슬람은 유태교, 그리스도교 등 다른 일신교 신자를 「계전의 백성」이라 하여 그 존재를 인정하고 있으며 초기의 세력 확장 시기에서도 이슬람 국가는 세금을 내기만 하면 그들의 사회를 보호했다.
서구에 이슬람이 침입하자 서구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이슬람은 침략자라는 이미지가 심어지게 되었다. 근년에 와서 가장 새로운 지하드로는 1914년에 최후의 칼리프이던 터키의 스루탄이 동맹국 독일을 지원하기 위해 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하던 싸움이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실패로 끝났다. 아주 최근에는 주로 이스라엘에 대한 지하드가 고창 되어 있지만 그것은 아직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형벌
 
코란에 규정된 형벌은 실제로는 실행이 불가능한 것이었다.
예를 들면 부정한 짓을 범한 남녀를 유죄로 규정하고 돌로 쳐죽이는 형벌에 처하기 위해서는 현장을 목격한 4명의 확실한 증인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증인을 찾기는 사실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이슬람교도가 4명의 아내를 가질 수 있다고는 하지만 4명을 공평하게 대할 수 있는 경우(금전의 분배도 포함해서)에 한해서만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므로 그것은 인간으로서 불가능한 일이다. 고리대금은 금지되어 있지만 투자에 의한 경제적 수입은 인정되고 있다. 아무리 코란에 엄격한 원칙들이 있다고 하지만 그런 것들은 모두 7세기 아라비아 세계의 상황에서만 어울리는 것이라는 사실에 이슬람 개혁자들은 이제 동의할 때가 온 것이다.
 
그러나 시대착오라고 생각될지도 모르지만 그들은 자신들을 이슬람교도, 그리고 운마의 일원이라고 자부하고 있어서 이슬람 규범을 굳게 지켜나가고 있다. 이러한 깊숙한 이슬람의 침투성이야말로(인물백결』「역사상 가장 큰 영향력을 가졌던 100명」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다)에서 뉴튼, 그리스도, 석가, 공자, 사도 바울보다도 무하마드가 상위에 놓여진 이유이기도 하다.
 
무하마드보다 6백 년 전에 지구상에 존재했던 그리스도는 분명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지만 그가 세속적인 일의 모든 면에서 영향을 끼쳤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그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는 말로써 통치권(가이사)은 종교와 관계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이슬람은 통치권이 종교를 떠나서 성립하는 것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