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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대지15. - 쌩 떽쥐뻬리

Joyfule 2011. 2. 7. 22:01

 

인간의 대지15. - 쌩 떽쥐뻬리

 

[6] 사막에서


(6)
"비행기에 숨겨서 마라께시로 데려다 주시오...."

매일 저녁 쥐비에서 모르인들의 이 노^36^예는 이런 짧은 기도를 내게 올리곤 했다.

그러고는 살기 위해서 가능한 일을 다했다는 듯이

그는 책상다리를 하고 내 차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기를 고쳐 줄 수 있는 유일한 의사에게 내맡겼고,

자기를 구원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신에게 청원했다고 생각하고

하루 동안은 마음의 평안을 얻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는 주전자 위에 고개를 숙이고,

자기 생애의 단순한 모습들과,마라께시의 검은 땅들과,

장미빛 집들과, 몽땅 빼앗긴 하찮은 재산들을 되새겨 보는 것이다.

그는 내 침묵도, 그에게 생명을 주기를 지체하는 것도 원망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자기와 같은 사람이 아니고, 움직이게 할 수 있는 힘이며,

언젠가는 자기 운명 위에 불게 될 순풍 같은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개 조종사일 뿐이고, 쥐비 곶에서 몇 달 동안 비행장 주임 일 뿐이며,

재산이라고는 스페인 요새에 기대 세운 바라크 하나와

그 안의 대야 하나, 짠물이 든 주전자 하나, 짤막한 침대 하나밖에는

가진 것이 없는 나로서는 내 능력에 대해서 환상을 가질 수 없었다.

"바르끄 영감, 좀 두고 봅시다...."

노예들은 모두 바르끄라고 불린다.

그래서 그도 바르끄다.

붙잡힌지 4년이나 되었지만 그는 아직 체념하지 않고 있다.

그는 임금이었던 때를 회상하고 있다.

"바르끄, 자네는 마라께시에서 무얼 했나?"

그의 아내와 아이 셋이 아직 살고 있을 마라께시에서 그는 훌륭한 직업을 가졌었다.

"나는 가축 몰이꾼이었읍죠. 이름은 모하메드였구요!"

거기서는 높은 사람들이 그를 불러 이렇게 말했었다.

"모하메드, 팔 소가 있다. 산에 가서 끌고 와라."

아니면,

"들판에 양 천 마리가 있다. 그걸 더 높은 목장으로 몰고 가라."

그러면 바르끄는 올리브 나무 지팡이를 들고 그들의 이주를 지휘하는 것이었다.

많은 양들의 유일한 책임자로서,

새끼 가진 어미 양을 위해서 빠른 놈들의 걸음을 늦추고 게으른 놈들은 재촉하면서,

그는 모든 양들의 신뢰와 복종 속에서 걸어가는 것이었다.

어떤 약속의 땅을 향해 그들이 올라가고 있는지를 자기만이 알고,

별들을 보고 길을 찾는 것도 자기만이 알고,

 양들에게는 나누어 줄 수 없는 지식들을 무겁게 몸에 지닌

자기의 지혜로써 쉴 시간이며 샘터로 가는 시간을 결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밤이면 그들의 잠 속에 홀로 서서 그 많은 무지와 연약함을 측은히 생각하면서

무릎까지 양털에 묻힌 채, 의사이며, 예언자이며, 왕이기도 한 바르끄는

자기 백성을 위해 기도 드리는 것이었다.

어느 날 아랍인이 그에게 다가왔다.

"가축을 찾으러 우리와 함께 남쪽에 가자."

그를 오랫동안 걸리더니 사흘 후에 산 속 깊이 불귀순 지구 경계로 접어들자,

그는 간단히 붙잡혀서 바르끄란 이름으로 팔리었던 것이다.

나는 다른 노예들도 알고 있었다.

나는 매일 차를 마시기 위해 천막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맨발로 푹신한 양탄자 위에 누워 나는 하루가 지나갔음을 음미하는 것이었다.

그 양탄자는 그들 유목민들의 사치품이며,

그들은 그 위에 그들의 잠시 동안의 처소를 마련하는 것이다.

사막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역력히 느껴진다.

타는 듯한 태양 아래서는 짐승들도 사람들도 죽음을 향해 가는 것만치나

확실하게 저녁이라는 커다란 물구유를 향해 걸어간다.

이러한 무위함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온종일 바다로 가는 길처럼 아름답다.

나는 그 노예들을 알고 있다.

그들은 주인이 보물상자에서 풍로니, 주전자니, 컵들을 꺼내 놓으면 천막 안으로 들어온다.

그 상자 속에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물건들이 묵직하게 들어 있다.
열쇠 없는 자물통이니, 꽃 없는 꽃병이니, 서푼짜리 거울이니, 낡아빠진 무기들,

이런 것들 이 사막 한가운데 밀려 와 있어 난파선의 조각들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면 노예는 묵묵히 풍로에 마른 가지를 얹고 불씨를 붙이고 주전자를 채우고 하며,

어린 계집애면 될 일에 삼나무라도 뽑을 수 있는 근육을 움직인다.

그는 온순하다. 그는 차를 끓어내고, 낙타를 돌보고, 밥을 짓고 하는 일에 열중한다.

찌는 듯한 태양 아래서는 밤을 향해 걸어가고,

얼음같이 찬 벌거숭이 별들 아래에서는 찌는 듯한 태양을 그리워하면서.

4계절의 변화가 여름이면 눈의 전설을,

겨울이면 태양의 전설을 이루어주는 북쪽 나라들은 얼마나 행복한가!

한증막 속에서 별다른 변함이 없는 열대지방은 불행하다.

그러나 낮과 밤이 사람들을 이 희망에서

그렇게도 간단하게 오가게 해주는 이 사하라는 역시 행복한 곳이다.

가끔가다 검둥이 노예가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저녁 바람을 맛보고 있다.

이 포로의 둔중한 육체 속에는 이제 추억도 떠오르지 않는다.

유괴되던 때의, 지금의 어둠 속으로 그를 거꾸러뜨린 사나이의 팔이며,

고함소리며, 주먹질 따위가 겨우 생각날 뿐이다.

그때 이후로 그는 소경처럼 세네갈의 느린 강물도,

남부 모로코의 흰 암석의 도시들도 보지 못하고,

귀머거리처럼 그리운 목소리도 듣지 못한 채 이상한 잠 속에 빠져들어가고 있다.

이 흑인은 불행한 것이 아니라 병들었다.

어느 날 이 유랑민들의 생활 속에 굴러들어, 그들의 이동에 매이고,

그들이 사막에 그리는 궤도에 평생동안 붙들려버린 그가,

그때부터 그의 과거니, 그의 집이나, 그의 처자식이니,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이런 것들과 무슨 공통된 것을 간직할 수 있겠는가?

오랫동안 위대한 사랑으로 살아오던 사람들이 그것을 잃고 나면

자기의 고독하고 높은 신분에 싫증이 나는 수가 있다.

그들은 겸손하게 삶에 접근하여 평범한 사랑으로 자기들의 행복을 만든다.

그들은 체념하고 몸을 굽혀 평온한 생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마음 편함을 깨닫는다.

노예는 주인의 불씨로 자기의 자랑을 삼는다.

"자아, 마셔라."

가끔 주인이 종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모든 피로와, 모든 심한 더위에서 놓여나고,

어깨를 나란히 하여 저녁의 시원함 속에 들어가고 있으므로

주인이 노예에게 어질어졌을 때다.

그래서 주인은 차 한 잔을 노예에게 준다.

그러면 노예는 감격에 겨워, 그 차 한 잔 때문에 주인의 무릎에 입을 맞추게까지 된다.

노예가 쇠사슬에 매여 있는 일은 없다.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렇게도 충실한데!

그는 현명하게도 박탈당한 검둥이 왕을 자기 속에서 배척한다.

그는 이제 행복한 포로일 뿐이다.

그러나 어느 날엔가 그는 해방될 것이다.

그가 먹는 식량이나 입는 옷에 알맞은 값어치가 없을 만큼 너무 늙으면

그는 분에 넘치는 자유를 허락 받는다.

사흘 동안 그는 이 천막에서 저 천막으로 다니며 헛되이 사정할 것이다.

하루하루 몸은 더 허약해진다.

그리고 사흘째 되는 날 끝날 무렵,

언제나 그렇듯이 얌전하게 모래 위에 드러누울 것이다.

나는 쥐비에서 알몸으로 죽어 가는 노예들을 본 일이 있다.

모르인들은 그들의 죽을 때의 오랜 괴로움을 아주 가까이에서 보고 있지만 잔인성은 없다.

모르인의 아이들은 그 검은 표류물 옆에서 놀고 있다.

그리고 날이 새면 그것이 아직도 움직이고 있는지 보기 위해 달려가지만

늙은 종을 조롱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극히 자연적인 질서였다.

그것은 마치 이렇게 말해 주는 것 같았다.

"너는 일을 잘했다. 그래서 잠들 권리가 있다. 자아, 이제 자거라."

그는 여전히 누운 채 현기증과도 같은 배고픔은 느끼지만,

괴로움을 주는 바르지 못함을 느끼지 않는다.

그는 조금씩 조금씩 흙에 동화되어 갔다.

태양에 말리고, 대지에 받아들여져서. 30년 동안의 노동,

그래서 얻은 잠과 대지에 대한 이 권리.

내가 처음 만난 노예는 신음하는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하기야 신음해 보일 상대도 없었겠지만,

나는 그에게서 힘이 다 빠져 눈 속에 누워, 꿈과 눈에 파묻혀 들어가는

길 잃은 두멧사람과도 같은 일종의 체념을 느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