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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대지31. - 쌩 떽쥐뻬리

Joyfule 2011. 2. 26. 10:42

 

인간의 대지31. - 쌩 떽쥐뻬리


[8] 인간들의 모순


(3)
우리는 어떤 곳에 있으면서 우리에게 공통된 목적에 의해

형제들과 결합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숨을 쉬는 것이며,

또한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방향을 함께 바라보는 것임을 경험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그들이 같이 도달할 같은 봉우리를 향해

같은 로프에 묶여져 있지 않으면 동료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야 바로 이 안락한 세계에,

왜 사막 한가운데서 마지막 식량을 나누는 것에 그렇게도 넘치는 기쁨을 느끼겠는가?

이에 대한 사회학자들의 억측 따위에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인가?

우리들 중에서 사하라 사막에서의 그 구조작업의 큰 기쁨을 맛본 모든 사람에게는

다른 기쁨들이란 모두 하찮은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오늘날의 세계가 우리 주위에서 와지끈거리기 시작한 것도

어쩌면 이런 이유에서일지도 모른다.

누구나 자기에게 이러한 충만감을 약속해 주는 종교에 열광한다.

모순된 말들을 가지고, 우리 모두가 똑같은 정열을 표현하고 있다.
우리들은 제각기 이성의 열매인 방법에 있어서는 서로 다르지만 목적은 다르지 않다.

목적은 다 같은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놀라지 않는다.

자기 속에 잠자고 있는 미지의 것을 짐작조차 못했던 사람이,

바르셀로나의 어느 아나키스트들의 지하실에서

희생이니, 상호 원조니, 정의의 준엄한 영상이니 하는 것에 감동되어

단 한 번이라도 그것이 깨어나는 것을 느끼고 나면 ,

그 사람은 이제 하나의 진리, 아나키스트의 진리밖에는 알지 못하게 되더라도

또 스페인의 수녀원에서 겁을 먹고 꿇어앉아 있는

어린 수녀들을 보호하기 위해 한번 보초를 선 사람은 끝내 그 교회를 위해 죽을 것이다.

가슴에 승리감을 안고 안데스 산맥의 칠레 쪽 비탈을 향해

빠져 들어가는 메르모즈더러 잘못이라고,

상인의 편지 한 장이 목숨을 걸만한 가치는 없을 것이라고 당신이 반대했다면,

메르모즈는 당신을 비웃었을 것이다.

안데스 산맥을 넘었을 때 그의 속에서 태어나던 인간,

그것이 바로 그의 진리인 것이다.

전쟁을 불사하는 사람에게 전쟁의 무서움을 납득시키려거든

그를 야만인 취급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를 비판하기에 앞서 그를 이해하도록 힘써라.
리프 전쟁 당시, 두 불귀순 고지 사이의 쐐기 모양으로 설치된

전초 진지를 지휘하던 남방지구의 그 장교를 생각해 보라.

그는 어느 날 저녁, 서쪽 산악에서 내려온 군사들을 맞았다.

격식대로 함께 차를 들고 있는데 총격이 벌어졌다.

동쪽 산악 지대의 부족들이 이 초소를 공격해 온 것이다.

전투를 위해 물러갈 것을 요구하는 대위에게 적의 군사들은 이렇게 응답했다.

"오늘 우리는 귀관의 손님이오.

신은 귀관을 내버려 두고 떠나는 것은 허락지 않소...."

그래서 그들은 대위의 군대와 합세해서 그 진지를 구해주고는

그들의 독수리 집으로 다시 기어 올라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들이 이 진지를 습격할 준비를 하는 전 날,

그들은 대위에게 사자들을 보냈다.

"저번 밤에 우리는 귀관을 도왔다."
"그랬소."
"우리는 귀관을 위해 소총탄 3백을 쏘았다."
"그랬소."
"그것을 우리에게 돌려 줘야 옳지 않소?"

기품 있는 대위는 그네들의 고귀함에서 얻어낼 수 있었을 이익을 이용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자기들을 향해 쓰여질 소총탄을 돌려 주었다.

인간의 진리란 자기를 하나의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것, 바로 그것이다.

그와 적군과의 이러한 관계의 어엿함, 승부에 있어서의 성실함,

목숨을 건 상호간의 경의의 주고 받음을 이해한 그 대위가,

자기에게 주어진 이 고귀함을, 같은 아랍인에게

어깨를 툭 치며 자기의 우애를 보이고, 그들에게 아첨도 하나 동시에

창피하게도 하는 저 선동 정치가들의 비열한 친절과 비교할 때,

만일 당신이 그와 반대되는 의견을 늘어 놓는다면,

대위는 당신에 대하여 약간 멸시 섞인 연민밖에는 느끼지 못 할 것이다.

그런데 옳은 것은 바로 그다.

그러나 당신들이 전쟁을 증오하는 것도 일리는 있다.
인간과 그 갖가지 욕망을 이해하고,

그가 가진 본질적인 것 속에서 인간을 이해하려면,

당신들의 진리의 명백한 사실을 서로 대립시켜서는 안된다. 그렇다.

당신들은 옳다. 당신들은 모두 옳다.

논리는 모든 것을 증명한다.

세계의 불행을 꼽추에게 전가시키는 자에게도 일리는 있다.

만약 우리가 꼽추들에게 선전포고를 한다면,

우리는 이내 흥분할 이유를 찾아 낼 것이다.

우리는 꼽추들의 죄악에 보복하는 것이니까.

그리고 물론 꼽추들도 죄악을 범한다.

이 본질적인 것을 끌어내어 보려면, 잠시 이들의 차이를 잊어야만 한다.

차이란 한 번 인정받게 되면 온통 코란 한 권만큼의 요지부동의 진리와,

거기서 쏟아져 나오는 광신까지도 끌어오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을 좌익과 우익, 꼽추와 꼽추 아닌 사람,

파시스트와 민주주의자로 구분할 수 있고,

또 이러한 구분은 비난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진리란 여러분도 알다시피

세계를 단순화하는 것이지 혼돈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다.

진리란 보편성을 끌어내는 언어이다.

뉴턴은 결코 퀴즈 풀이처럼 오랫동안 숨어 있던 법칙을 발견한 것은 아니다.

뉴턴은 하나의 창조적인 실험을 행한 것이다.

그는 풀밭에 사과가 떨어지는 것과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동시에 표시할 수 있는 인간의 언어를 창조했던 것이다.

진리란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단순화시키는 것이다.

이데올르기를 논쟁한들 무슨 소용인가?

모든 것을 증명할 수 있다면 그것들을 또한 반증될 수 있으며,

이러한 논쟁은 인간의 구원을 절망으로 이끌 뿐이다.
그런데 인간은 우리 주위 어디서고 똑같은 요구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우리는 해방되고 싶어하다.

곡괭이질을 하는 사람은 그 곡괭이질의 의미를 알고 싶어한다.

그런데 형량을 선고 받은 사람을 모욕하는 수형자의 곡괭이질은

탐험가를 위대하게 하는 곡괭이가 박힌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행위 속에 추악이 있는 것이 아니다.

도형장은 의미를 갖지 않은 곡괭이가 박힌 곳,

그 사람을 인간의 공동체와 맺어 주지 않는 곡괭이가 박힌 곳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도형장을 탈출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다.
현재 유럽에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아 다시 태어나기를 원하는 2억의 인간이 있다.

공업이 그들을 농민으로서의 전통에서 끌어내어

시커먼 열차들로 혼잡한 역과도 같은 거대한

게토(유태인 지정 거주 지역) 속에 가두어 버렸다.

노동자 도시의 밑창에서 그들은 깨어나기를 바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개척자의 기쁨도, 종교적인 기쁨도,

학자로서의 기쁨도 금지된 온갖 직업의 톱니바퀴 틈에 끼어 들어가 있다.

그들을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옷을 입히고, 먹이고,

그들의 모든 욕망을 만족시켜 주기만 하면 된다고 사람들은 믿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차츰 차츰 자기 속에 꾸르뜰린 같은 소시민이나, 촌뜨기 정치가,

내면 생활에 관심이 없는 기술자를 만들어 놓고 말았다.
그들에게 교육은 잘 시킨다 하더라도 정신을 북돋주어줄 생각은 이미 없다.

문화에 대해서도 정말 보잘것 없는 의견을 갖게 되어,

그것이 단지 공식의 암기에 근거를 두고 있는 있는 것이라고 믿게 된다.

전문학교의 열등생이라도 자연이나 그 법칙에 관해서는

데카르트나 파스칼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

그런데 그가 정신에 있어서도 같은 걸음걸이가 가능할까?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막연히 태어나고자 하는 욕망을 느끼고 있다.
그런데 그 해결 방법이 잘못되어 있다.

물론 사람들에게 군복을 입힘으로써 활기를 줄 수는 있다.

그러면 그들은 군가를 부르고 전우들과 더불어 빵을 뜯어 먹을 것이다.

그들은 또 자기들이 찾는 보편적인 것의 맛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에게 주어진 빵으로 인해 그들은 죽어 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