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대지32. - 쌩 떽쥐뻬리
[8] 인간들의 모순
땅 속에서 나무 우상을 파내어 그럭저럭 무엇을 증거 세운 신화를 부활시킬 수도 있고,
또 범게르만주의나 로마제국의 신비론자들을 부활시킬 수도 있다.
독일 사람들로 하여금, 독일 사람이며,
베에토벤과 동국인이라는 도취감에 취하게 할 수도 있다.
그것으로 부두 노동자까지 만취시킬 수도 있다.
그것은 분명히 부두 노동자로부터 하나의 베에토벤을 끌어내기보다는 쉬운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상들은 사람 잡아먹는 우상들이다.
지식의 진보나 질병의 치유를 위해 죽는 사람은,
그가 죽는 것과 동시에 생명을 위해 이바지하는 것이다.
영토 확장을 위해 죽는 것도 갸륵한 일인지는 모르나,
오늘날의 전쟁은 그것이 조장시켜 준다고 주장하는 그것 자체를 파괴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민족 전체를 살리기 위해 약간의 피를 희생시킨다는 것도 문제가 안된다.
전쟁이 비행기와 이페리트가스를 쓰게 된 이래로
그것은 이제 피투성이 외과 수술에 지나지 않는다.
저마다 콘크리트 벽으로 된 방공호에 의지하고,
서로가 밤마다 비행 편대를 보내어 상대편의 오장육부를 폭격하여
그 치명적인 중심부를 파괴하고, 그 생산과 교역을 마비시킨다.
승리는 맨 나중에 썩는 자에게 돌아간다.
그런데 두 적수들은 대개 같이 썩어 가는 것이다.
무인지경이 된 세상에서 우리는 동료들을 찾느라고 목이 탔었다.
동료들과 나누어 먹는 빵 맛은 우리에게 전쟁의 가치를 인정하게 했다.
그러나 같은 목표를 향해 달리는 옆 사람들 어깨의 따스함을 찾기 위해 전쟁이 필요한 건 아니다.
전쟁은 우리를 속인다.
증오가 달음박질의 흥분에 보태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왜 우리는 증오하는가?
우리는 같은 떠돌이 별을 타고 있는 한 배의 선원으로서 연대 책임이 있는 것이다.
새로운 종합을 북돋우기 위해 문명들이 서로 대립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들이 서로 잡아먹는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우리를 해방시키려면, 우리 서로를 맺어주는 하나의 목표를 인식하도록 도와주면 되는 것이니 만큼,
우리 모두를 결합시켜 주는 바로 거기에서 그것을 찾아야 할 일이다.
진찰하는 의사는 그 환자의 하소연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인간의 병을 고치고자 하는 것이다.
의사는 보편적인 언어를 말한다.
원자와 성운을 동시에 파악할 수 있는 거의 신과도 같은 방정식을 생각해낼 때의 물리학자도 마찬가지다.
순박한 양치기에 이르기까지 이와 같다.
왜냐하면 별 아래서 몇 마리의 양들을 조심성 있게 지키고 있는 그가
자기의 역할을 자각한다면, 자기가 한낱 종이 아님을 깨달을 테니까.
그는 보초인 것이다.
그리고 보초 하나하나는 나라 전체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 양치기가 자기의 역할을 자각하고자 원하지 않는다고 당신은 생각하는가?
나는 마드리드 전선에서, 참호에서 5백 미터쯤 떨어진 언덕 위의
조그마한 돌담 뒤에 자리잡은 학교를 찾아가본 일이 있다.
한 사람의 하사가 거기서 식물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손 끝으로 개양귀비 꽃의 연약한 기관을 분해해 가면서 그는 수염 난 순례자들을 끌어 모으고 있었는데,
그들은 둘러싸여 있는 진창을 빠져 나와 포탄을 무릅쓰고 그가 있는 곳으로 순례하러 기어 올라가는 것이었다.
하사를 둘러싸고 그들은 책상다리를 하고 주먹으로 턱을 괴고 앉아 귀를 기울이는 것이었다.
그들은 눈썹을 찌푸리기도 하고, 이를 악물기도 했다.
그들은 수업에 대해서는 대단한 것을 알아듣지 못했으나 이런 말은 알아들었다.
"당신들은 짐승이다.
당신들은 이제 겨우 동굴에서 기어나왔다.
인간성을 따라잡아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을 따라잡으려고 무거운 발걸음을 서두르는 것이었다.
그것이 아무리 조그마한 것일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역할을 자각할 때 비로소 행복할 수 있다.
그때라야 우리는 평화롭게 살고, 평화롭게 죽을 수 있다.
왜냐하면, 삶의 의미를 주는 것은 죽음에도 의미를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이란, 그것이 자연의 질서 안에 있을 때 지극히 다사로운 것이다.
가령 프로방스의 늙은 농부가 자기 대의 끝에 임박해서,
자기 몫의 염소와 올리브 나무들을 아들에게 물려 주고,
그 아들들도 차례로 그 아들들에게 물려 줄 수 있게 하려는 그런 때 그러한 것이다.
농부의 가계에서는 사람은 반밖에 죽지 않는다.
각기의 생명은 자기 차례가 오면 깍지처럼 터져 씨앗을 넘겨 주는 것이다.
나는 언젠가, 어머니의 임종의 자리에 임한 세 사람의 농부를 곁에서 본 일이 있다.
물론 그것은 비통한 일이었다.
두 번째로 그들의 탯줄이 끊어진 셈이다.
두 번째로 매듭이, 한 대와 다음 대를 잇는 매듭이 풀어진 것이다.
이 세 아들들은, 이제부터 모든 것을 새로 배워야 하고, 명절날 모여, 앉을 단란한 식탁도 없어지고,
의지해야 할 중심을 잃어버린 외로운 자신들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와 함께 이런 것도 발견했다.
이 끊어짐 속에서 또한 생명이 두 번째로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이 아들들도 역시 차례가 되면 줄의 선두가 되고, 집합 점이 되고, 가장이 될 것이다.
그들이 그들의 차례가 와서, 지금 안마당에서 놀고 있는
저 한 배의 자식들에게 지휘권을 넘겨 줄 그때까지.
나는 그 어머니를 보고 있었다.
평화롭고도 굳은 얼굴에 입술을 꽉 다문 늙은 농사꾼 아낙네,
돌의 가면으로 바뀐 그 얼굴을, 나는 그 얼굴에서 아들들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이 가면은 그들의 얼굴을 찍어내는데 소용되었던 것이다.
그 몸은 그들의 몸,
그 아름다운 인간의 원형들을 찍어내는데 소용됐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어머니는 찌그러져서, 열매를 꺼낸 깍지처럼 쉬고 있는 것이다.
아들과 딸들도 그들의 차례가 오면 자기들의 몸으로 작은 인간들을 찍어낼 것이다.
농가에서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어머니는 죽었다.
어머니 만세!
비통하기는 하다.
그렇다. 그러나 또한 얼마나 순박한가.
백발의 아름다운 껍질을 가는 길에 하나하나 버리면서,
자기의 변신을 통해서 알지 못할 진리를 향하여 나아가는 이 혈통의 모습은...
그러기에 그날 저녁, 그 시골 작은 마을의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절망이 아닌
조심스럽고도 다정한 기쁨을 실은 것처럼 내 귀에 들린 것도 이 때문이다.
장례와 세례를 한 목소리로 엄숙한 그 종소리는
또다시 한 세대가 다른 세대로 옮아감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엾은 한 노파와 대지와의 약혼식 노래를 들으면서
크나큰 평화밖에는 느끼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세대에서 세대로, 한 그루의 나무의 성장처럼 유유한 걸음으로
전해져 가는 것은 생명이기도 하지만 또한 의식이기도 하다.
얼마나 신비스러운 올라감인가!
녹아 흐르는 용암에서,
별의 반죽에서 기적적으로 싹튼 생명 있는 세포에서 태어난 우리는,
차츰차츰 칸타타 노래를 쓰고, 은하수를 계측하는 데까지 올라온 것이다.
그 어머니는 결코 생명만을 전해준 것이 아니다.
아들에게 말을 가르쳐 주었고, 여러 세기에 걸쳐 차츰차츰 쌓여진 짐짝을,
자기가 맡아 왔던 정신적인 유산인, 뉴턴과 세익스피어를
동굴 속의 짐승들과 구별지어주는 전통과 개념과 신화 등의 조그만 몫을 그들에게 맡겨준 것이다.
우리가 배고플 때 느끼는 것,
저 스페인의 병사들을 포격을 무릅쓰고 식물학 수업으로 이끌어 가고,
메르모즈를 남대서양 쪽으로 몰아가고, 다른 사람들을 그들의 시로 본
그 굶주림에서 깨닫는 것은 천지의 생성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고,
또 우리 자신과 세계에 대하여 자각해야겠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어두운 밤에 타랍을 걸쳐 놓아야 한다.
자신들을 이기적인 것이라고 믿는 무관심으로써 자기들의 지혜로 삼는 자들만이 굶주림을 모른다.
그러나 모든 것이 이러한 지혜와는 모순된다!
동료들, 나의 동료들이여, 나는 그대들을 증인으로 세운다.
그래, 어떤 때에 우리는 행복을 느꼈던가?
이제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생각나는 것은,
조종사로서 지명된 행운을 얻어, 우리가 인간으로 탈피할 준비를 하고 있던 그때,
그 첫 우편 비행을 떠나던 새벽에 우리를 배웅해 주던 늙은 사무원들이다.
그들도 우리들과 같은 인간이기는 하나,
자기들이 굶주리고 있다는 것을 조금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잠자게 내버려 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몇 해 전에 기 기차 여행 도중에,
나는 사흘 동안이나 그 바닷물에 굴리는 조약돌 같은 소리의 포로가 되어
갇혀 있던 기차의 이 진행중인 고장이 보고 싶어서 몸을 일으켰었다.
새벽 1시경이었는데, 나는 열차 전부를 종단해서 걸어갔다.
침대 차는 비어 있었다. 1등 찻간도 비어 있었다.
그런데 3등 차는, 프랑스에서 해고되어
고국으로 돌아가는 수백 명의 폴란드 노동자들을 태우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을 타넘으면서 복도를 지나갔다.
나는 둘러보기 위해 발을 멈추었다.
희미한 등불 아래 서서, 나는 이 병영이나 유치장 같은
냄새를 풍기는 공동 숙사 비슷한 칸막이 없는 객차 안에서,
열차의 동요로 흔들리고 있는 혼잡한 군중을 보았다.
그것은 악몽 속에 파묻혀 그들의 비참함 속으로 되돌아가려는 군중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빡빡 깍은 카다란 머리들이 나무 걸상 위에서 뒹굴고 있었다.
남자들, 여자들, 아이들 할 것 없이 모두가 그들의 망각 속에서
그들을 위협하는 이 모든 소음과 동요에 시달리듯이 좌우로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단잠의 후대를 받지 못한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 이들, 경제의 조류에 밀려 유럽의 이 끝에서 저 끝으로 쫓겨다니고,
내가 전에 폴란드 광부들의 창가에서 본 적이 있는
제라늄 화분 3개와 손바닥만한 마당이 달린 그 노르 지방(프랑스 북부지방)의
작은 집에서도 떨려 난 이 사람들은 인간의 자격도 태반은 잃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엉성하게 묶어 탈장처럼 터진 봇짐 속에는 부엌 세간과, 담요와, 커튼밖에는 챙겨 넣지 못했다.
그들이 쓰다듬고 귀여워하던 모든 것,
프랑스에서 지낸 4~5년 동안에 길들였던 모든 것들,
고양이며, 개며, 제라늄 따위는 단념해야만 했고, 이 부엌 세간만을 가지고 가는 것이었다.
아기 하나가, 하도 지쳐서 잠든 것처럼 보이는 엄마의 젖을 빨고 있었다.
이 여행의 부조리와 무질서 속에서 생명이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돌덩이처럼 무겁고 까까중인 머리통, 작업복 속에 갇혀
불편한 잠 속에 빠져 오그린 울퉁불퉁한 육체, 그는 마치 진흙덩어리 같았다.
밤이면 이와 닮은 이미 형체도 없는 표류물들이 시장의 벤치 위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문제는 이 비참함 속에, 이 불결함 속에 이 추함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그렇긴 커녕 바로 이 남자와 이 여자가 어느 날 서로 알게 되어,
아마도 남자 쪽에서 여자에게 미소를 던졌을 것이다.
그는 어쩌면 하루 일이 끝나면 그녀에게 꽃도 가져다 주었겠지.
수줍고 서투른 그는 어쩌면 업신여김 당할까봐 떨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자는 타고난 아양과 매력에 자신을 가지고 그를 골려주며 즐거워했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이제는 곡괭이질이나 망치질을 하는 기계에 지나지 않게 된
이 남자는 마음 속에 달콤한 번민을 느꼈을 것이다.
이상한 것은 지금 그들이 진흙 덩어리로 변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어떤 지독한 거푸집을 거쳐 나왔기에
이처럼 판박이 기계에 눌린 것처럼 이렇게 찍혀졌단 말인가?
늙은 짐승도 아직 제 매력을 간직하는 법이다.
어째서 이 아름다운 인간의 진흙은 망가진 것일까?
나는 잠자리가 사창굴처럼 어지러운 군중들 사이에서 여행을 계속했다.
거친 코고는 소리와, 알아듣지 못할 한탄과,
어느 한편이 견딜 수 없어 다른 쪽으로 뒤채는 사람들이
바닥을 긁는 헌 구두 소리 등이 뒤범벅이 된 야릇한 소리가 떠돌고 있었다.
그리고 바닷물에 뒹구는 조약돌 소리 같은 그칠 줄 모르는 반주가 여전히 나지막이 들리고 있었다.
나는 어느 부부 맞은편에 앉는다.
그 남자와 여자 사이에 어린 아이가 간신히 비집고 들어가 잠들고 있었다.
그런데 잠자면서 돌아 눕는 바람에 그 얼굴이 희미한 등불 밑에 드러났다.
오오! 얼마나 사랑스러운 얼굴인가!
이 부부에게서 일종의 황금 과실이 태어났던 것이다.
이 둔중한 암수 남, 녀에게서 이 아름답고 매력 있는 걸작이 생겨나온 것이다.
나는 그 반듯한 이마, 그 귀엽게 내민 입술 위에 몸을 굽혀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이것이야말로 음악가의 얼굴, 어린 모짜르트,
생명의 아름다운 약속이다라고 전설 속의 어린 왕자인들이 아이와 다를 바 없다.
보호받고, 귀염받고, 교양 받는다면 이 아이도 무엇인들 못될 것인가!
정원에 돌연변이로 새로운 장미꽃이 피어나면 정원사들은 모두 법석을 떤다.
그 꽃을 따로 옮겨 심고, 가꾸고 우대를 한다.
그런데 사람을 위한 정원사는 없다.
어린 모짜르트도 다른 아이들처럼 판박이 기계에 찍히게 될 것이다.
모짜르트는 카바레의 악취 속에서 썩어빠진 음악으로 자기의 가장 높은 기쁨으로 삼을 것이다.
모처럼의 모짜르트도 마지막이다.
나는 내 찻간으로 돌아왔다. 나는 생각했다.
그들은 자기의 운명을 조금도 괴로워하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 나를 괴롭히는 것은 자비심이 아니다.
영원히 터지기를 계속하는 상처를 연민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상처를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여기서 상처를 입은 피해자는 개인이 아니고 인류라고나 할 그 무엇이다.
나는 연민을 믿지 않는다.
지금 나를 괴롭히는 것은 정원사의 관점이다.
나를 괴롭히는 것은 결코 이 비참함이 아니다.
비참함 속에서라면 인간은 나태 속에서 그렇듯이 그 속에 안주해 버릴 수도 있다.
유럽에 가까운 동방의 여러 나라 사람들은
대대로 신분이 낮은 천함 속에 살면서도 그것을 낙으로 삼아 왔다.
나를 괴롭히는 것은, 묽은 수프(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무료 급식)만으로는 고칠 수 없다.
나를 괴롭히는 것은 그 울퉁불퉁함도 누추함도 아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이 인간들 하나 하나 속에서 학살당한 모짜르트인 것이다.
오직 "정신"만이 진흙 위로 불면 "인간"을 창조하는 것이다.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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