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대지6. - 쌩 떽쥐뻬리
[2] 동료들
(3)
나는 자네의 밤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네의 모습을 역력히 보았네.
자네가 알펜스토크(등산 지팡이)도, 로우프도, 식량도 없이 걷고 있는 모습을
4천 5백 미터의 높은 고개를 넘어, 또는 절벽을 따라 영하 40도의 혹한 속을
발과, 무릎과, 손이 피투성이가 되어 기어 걸어가는 모습을
차츰 온몸의 피를, 힘을, 의식을 잃어가면서도 자네는 개미 같은 끈기로써 전진했네.
장애물을 돌아가기 위해 가던 길을 되돌아오기도 하고,
넘어지면 다시 일어났고, 절벽으로 가로막힌 비탈도 올라갔네.
사실 미끄러졌을 때는 돌덩이로 변해버리지 않기 위해 재빨리 일어나야만 했네.
추위는 시시각각으로 자네를 돌로 만들었고,
굴러 넘어진 다음 단 1분간이라도 더 쉬려다가는
다시 일어나기 위해 죽은 근육을 움직이게 해야만 했네.
자네는 온갖 유혹에도 견뎌냈네. 자네는 이렇게 말했지.
"눈 속에서는 자기 보존의 본능이 모두 없어져 버리네.
이틀, 사흘, 나흘을 걷기만 하니까 자고 싶은 생각밖에는 없어진단 말일세.
나도 그랬어. 그러나 나는 내 자신에게 말했네."
"내 아내가 만약 내가 살아 있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걷고 있으리라고 믿고 있을 거다.
동료들도 내가 걷고 있으리라고 믿고 있다.
모두들 나를 믿고 있다.
그런데 내가 걸어가지 않는다면 나는 못난 놈이다 라고 말일세."
그래서 자네는 줄곧 걸었네.
그리고 나이프 끝으로 날마다 조금씩 더 구두의 운두를 잘라 내어
동상으로 부은 발이 들어가도록 했네.
자네는 또 이런 이상한 고백을 들려 주었지.
"이틀째부터 내 가장 큰 일이 뭐였는지 알겠나?
자신에게 생각을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네.
나는 너무나 고통스러웠고, 또 내 처지가 너무나 절망적이었네.
걸어갈 용기를 가지려면 이런 상태를 생각하지 말아야 했네.
그런데 곤란하게도 머리가 말을 잘 듣지 않았어.
그놈은 마치 터빈처럼 돌아가는 거야.
다만 나는 대상물을 골라 줄 수는 있었네.
나는 내 머리를 전에 본 책이나 영화에 집중시켰네.
그러면 그 영화나 책이 내 머리 속을 줄달음쳐서 지나갔네.
그리고는 이내 그것이 나를 또다시 지금의 처지로 되끌고 오는 걸세,
어김없이, 그러면 나는 또 머리를 다른 추억으로 돌리곤 했네."
그런데 한 번은 미끄러져서 눈 속에 배를 깔고 엎어졌을 때.
자네는 일어나기를 단념해 버렸네.
자네는 마치 결정적인 일격을 받고 모든 정열을 상실한 권투 선수가,
아득한 세계 속에서 1초 1초가 마지막
10초째까지 떨어지는 것을 듣고 있는 것과도 흡사했네.
"나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희망은 전혀 없다.
그런데 왜 나는 이런 고통을 계속하려는 걸까?"
이 세상에서 평화를 얻으려면 자네는 눈만 감으면 되었네.
이 세상에서 바위와, 얼음 덩이와, 눈들을 지워 없애려면 말이네.
이 기적과도 같은 눈꺼풀을 감기만 하면 타격도, 전락도, 찢겨진 근육도,
타는 듯한 동상도, 황소처럼 끌고 가야 할 짐수레보다도
무거운 삶의 짐도 모두 없어지는 것이다.
이미 자네는 독약으로 바뀐 추위,
이제는 모르핀처럼 자네를 큰 행복으로 채워주는 그 추위를 맛보고 있었네.
자네의 생명은 심장 둘레로 피난하고 있었네.
달콤하고도 귀중한 그 무엇이 자네 자신의 한가운데에 도사리고 있었네.
자네의 의식이 이제까지 고통으로 가득한
짐승 같았던 자네 육체의 먼 부분을 차츰 버려갔고,
벌써 대리석과도 같은 무관심을 물려받고 있었네.
자네의 걱정마저도 가라앉았네.
이제는 우리가 부르는 소리도 자네에겐 이르지 못했고,
더 정확히 말해서 자네에겐 그것이 꿈속에서 부르는 소리로 바뀌고 있었네.
자네는 행복한 기분으로 꿈 속을 걸으며 그에 응답했네.
평야를 걸어가는 즐거움을 쉽사리 자네에게 갖다 주는 편하고도 큰 걸음걸이로.
자네는 자네를 위해 그렇게도 다정해진 세계 속으로 얼마나 기분 좋게 미끄러져 갔던가!
기요메, 자네는 인색하게도 우리에게 돌아오기를 거부하기로 결심했었네.
뉘우침이 자네의 양심 밑바닥으로부터 왔네.
꿈 속에 갑자기 명확한 현실의 일들이 섞여 들었던 것이네.
"나는 아내를 생각했네.
내 보험증서가 아내를 궁핍에서 구해 주겠지. 그러나 보험이란...."
실종인 경우, 법률상의 사망은 4년 후로 연기된다.
이 생각이 다른 영상들을 지워 없애고, 또렷하게 자네 마음 속에 나타났네.
그런데 그때 자네는 급경사진 눈 비탈에 배를 깔고 엎어져 있었네.
자네 몸뚱이는 여름이 되면 이 흙탕물에 섞여
안데스의 수많은 늪 중의 하나로 굴러 들어갈 것이다.
자네는 그것을 알았네.
그러나 자네는 또한 50미터 앞에 바위 하나가 솟아나 있다는 것도 알았네.
"나는 생각했네.
내가 다시 일어만 난다면 저기까지는 갈 수 있을 거다.
그리고 내 몸을 저 바위에 기대 두면 여름에 날 찾아 낼 수 있을 거다."
한번 일어서자 자네는 이틀 밤 사흘 낮을 걸었네.
그러자 자네는 멀리 갈 생각은 하지 않았네.
"나는 마지막이 가까웠다는 걸 여러 가지 징조로 알았네.
그 중의 하나는 이런 거였네.
나는 대략 2시간마다 구두 운두를 더 잘라 내거나,
부어 오는 발을 눈으로 문지르거나,
또는 다만 심장을 쉬게 하기 위해 멈춰서야만 했네.
그런데 마지막 며칠이 되자 기억력이 없어지더군.
다시 걷기 시작해서 꽤 시간이 지나서야 머리 속에 퍼뜩 생각나는 걸세.
나는 번번이 무엇인가를 잊곤 했네.
첫 번은 장갑 한 짝이었는데, 그 혹한에 그건 중대한 일이었지!
나는 그것을 내 앞에 벗어 놓았다가 집지 않고 그대로 떠났던 거네.
다음은 시계였어. 다음은 나이프, 또 다음은 나침반, 쉴 때마다 나는 가난해져 갔네.
살아날 길은 한 걸음을 내디디는 것뿐이었네.
또한 걸음, 언제나 같은 한 걸음을 다시 내디디는 거였네...."
"내가 한 일은, 맹세하네만, 어떤 짐승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네."
내가 알고 있는 한 가장 고귀한 이말,
인간을 마땅히 있어야 할 위치에 앉히고,
그를 영예롭게 하고, 진정한 계급을 결정해 주는 이 말이 내 기억에 되살아난다.
자네는 마침내 잠들었다.
자네의 의식은 이미 없어 져 버렸지만
이 상처입고, 구겨지고, 타버린 육체로부터 잠이 깸과 더불어 되살아나서
다시금 이 육체를 지배하려 하는 것이다.
이때 육체는 하나의 정교한 도구, 하나의 좋은 하인일 뿐이다.
이 정교한 도구에 대한 자랑을, 기요메, 자네는 이렇게 표현했네.
"먹지도 못한 채 사흘이나 걷고 나니...
심장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리라는 건 자네도 짐작이 가겠지.
그런데 말일세! 깎아지른 듯한 비탈에서 허공에 매달려서
손잡이가 될 구멍을 눈 속에 파내면서 더듬어 가는 그때 심장이 뛰질 않는 걸세.
멈칫멈칫하더니 다시 뛰겠지. 고르지가 않은 거야.
1초만 더 심장이 멈칫거려도 나는 손을 놔버릴 것만 같았어.
나는 꼼짝도 않고 내 가슴 속에 귀를 기울였네.
자네, 알겠나? 나는 일찍이 비행기를 타고 있을 때도
그 몇 분 동안 내 심장에 매달리듯이 그만큼 바싹 엔진에 매달려 본 적이 없었네.
내가 자네를 밤새워 간호하던 멘도사의 그 병실에서
자네는 마침내 숨이 찬 잠이 들었다. 나는 생각했다.
사람들이 그의 용기에 대해 이야기하면 기요메는 어깨를 흠칫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겸손을 찬양하는 것도 또한 그를 배반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는 이런 평범한 미덕을 훨씬 넘어서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용기를 찬양 받고 그가 어깨를 흠칫한 것은 그의 총명 때문이다.
그는 알고 있다.
사람이란 일단 사건 속에 휘말려 들면 더 이상 겁을 내지 않는다는 것을.
오직 미지의 것만이 사람들을 겁나게 한다.
그러나 그것도 누구든 그것에 도전하는 사람에게는 이미 미지의 것이 아니다.
하물며 이렇게도 총명한 신중함으로 그것을 관찰하는 때는 더욱 그렇다
기요메의 용기는 무엇보다도 그의 곧은 성격의 결과인 것이다.
그의 참된 미덕은 여기에 있지 않다.
그의 위대함은 자기의 책임을 느끼는데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우편물에 대한, 또 기다리는 동료들에 대한 책임.
그는 그의 손안에 그들의 슬픔도 기쁨도 쥐고 있다.
저기 살아있는 인간들 속에 새로이 건설되고 있는 것들에 대한 책임,
그것에 참여해야만 한다.
자기 직무의 범위 내에서 인간의 운명의 일부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도 또한 자기의 잎사귀들로
드넓은 지평선을 뒤덮는 역할을 맡은 위인들 중에 끼어 있는 것이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바로 책임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와는 무관한 것처럼 보이는 빈곤 앞에서 부끄러움을 아는 일이다.
또 그것은 동료들이 거둔 승리를 자랑으로 아는 일이다.
또 자기의 돌을 갖다 놓으면서 세계의 건설에 가담한다고 느끼는 일이다.
사람들은 흔히 이런 사람들을 투우사나 도박꾼들과 혼동하려한다.
사람들은 그들이 죽음을 가벼이 여긴다고 자랑한다.
그러나 나는 죽음을 가벼이 여기는 것을 비웃는다.
그 죽음이 맡은바 책임감에 뿌리박고 있지 않는 한
그것은 빈약함의 표시이거나 젊음의 과잉일 뿐이다.
나는 자살한 어떤 젊은이를 알고 있다.
어떤 사랑의 괴로움이 그로 하여금 조심스럽게
자기 심장에 총알을 쏘아 박히게 했는지 지금은 생각나지 않는다.
어떤 문학적인 유혹에 빠져 그 손에 흰 장갑을 끼었는지 모른다.
다만 내게 생각나는 것은 이 애처로운 광경 앞에서
숭고하다기보다는 천박한 인상을 받았다는 것뿐이다.
그렇게도 사랑스러운 얼굴 뒤에 그 사람의 두개골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아무것도. 다른 소녀들과 똑같이 어리석은 한 소녀의 모습밖에는.
이 초라한 운명 앞에서 나는 인간의 참다운 죽음의 하나를 기억해냈다.
내게 이렇게 말하던 한 정원사의 죽음을.
"아시겠지만... 땅을 파면 때때로 땀을 흘리죠
신경통으로 다리가 땅기거나 하면, 나도 이 종살이 같은 일을 저주도 했습죠
그런데 지금은요, 땅을 파고, 또 파고 싶기만 하거든요.
땅을 판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워 보이는지 모르겠어요!
땅을 파고 있으면 이렇게 마음이 편한 걸입쇼!
또, 내가 안하면 누가 이 나무들을 손질해 주겠어요?"
그는 갈아야 할 땅을 남기고 갔다.
갈아야 할 지구를 남기고 간 것이다.
그는 사랑으로써 모든 땅과 땅 위의 모든 나무들과 맺어져 있는 것이다.
그이야말로 관대한 사람이며, 멋있는 낭비자이며, 위대한 영토의 주인이었다!
그이야말로 자기의 "창조"를 위해서 죽음과 겨루어 싸웠던 때,
기요메처럼 용기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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