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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대지7. - 쌩 떽쥐뻬리

Joyfule 2011. 1. 28. 09:58

  

인간의 대지7. - 쌩 떽쥐뻬리

[3] 비행기

기요메, 자네가 일하는 낮과 밤이 설사 압력계를 점검하고

자이로스코우프로 기체의 평형을 유지하고, 엔진의 숨결을 청진하고,

15톤의 금속을 어깨로 떠받치는 일로 흘러간다한들 그게 무슨 상관인가.

자네에게 부과된 문제들은 결국 인간의 문제이며,

그래서 자네는 단번에 시골사람의 그 고귀함과 쉽사리 맺어지는 것이다.

시인과도 같이 자네는 새벽의 예고를 즐길 줄도 안다.

고난의 밤의 심연 속에서 자네는 그 몇 번이나 저 창백한 꽃다발,

캄캄한 땅을 동녘에서 솟아오르는 저 광명이 나타나기를 희원했던가.

이 기적의 샘이 때로는 자네 앞에서 천천히 해빙하여

자네가 죽는 물로 체념했을 때 자네를 고쳐주곤 했다.

정교한 기계의 사용이 자네를 무미건조한 기술자로 만들지는 않았다.

급속한 기술의 발달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목적과 수단을 혼동하고 있는 것 같다.
단순히 물질적인 재물만을 바라고 싸우는 사람은

누구나 삶에 보람이 있는 아무것도 거둘 수 없다.

쟁기와 같은 하나의 연장이다.

기계가 인간을 해친다고 우리가 생각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당한 것과 그렇게 급속한 변화의 결과를 비판하는데 필요한

시간적인 거리가 아직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

인류 역사의 20만 년에 비한다면 기계의 역사의 1백 년 따위가 무슨 문제란 말인가?

말하자면 우리는 이제 겨우 이 광산이나 발전소의 풍경 속에 겨우 자리잡은 셈이다.

우리는 채 다 짓지도 못한 새집에 살기 시작한 셈이다.

우리 주위에서 인간 관계도, 노동 조건도, 풍속 습관도 모두 너무나 급격하게 변화했다.

우리들의 심리조차도 가장 밑바탕으로부터 혼란되어 버렸다.

이별이니, 부재니, 거리니, 귀환이니 하는 개념의 말은

똑같아도 이미 같은 현실을 내포하고 있지는 않다.

오늘날의 세계를 파악하는데 있어

우리는 어제의 세계를 위해 만들어졌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과거의 생활이 우리들의 본성에 부합되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은

그것이 우리들의 언어에 더 부합된다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다.

진보의 하나하나가 간신히 우리가 체득해 가던 습관 밖으로

우리를 더욱더 멀리 쫓아내버렸고,

그리하여 우리는 고국을 떠나 아직 자기의 조국을 세우지 못한 이민들과도 같다.

우리는 모두가 아직 새 장난감에 감탄하고 있는 젊은 야만인들이다.

우리들의 비행기 경주도 이것 이외의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

저것은 보다 높이 올라가고, 이것은 보다 빨리 날아갈 뿐이다.

왜 그것을 날게 하는지를 우리는 잊고 있다.

경주 그 자체가 우선은 그 목적보다도 중요시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언제나 마찬가지다.

제국을 건설하고 있는 식민지 군에게 있어 삶의 의의는 정복에 있다.

즉, 병사는 농부를 멸시한다.

그러나 이 정복의 목적은 이 농부들을 정착시키는 것이 아닐까?

이와 같이 진보의 열광 속에서 우리들은

많은 사람들을 철도 부설이니, 공장 건설, 유정파기에 종사시켰다.

우리들은 이러한 건설이 사람을 위해서라는 사실을 자칫 잊어버리기 쉽다.

정복이 계속되는 동안 우리의 윤리, 도덕은 군인의 윤리. 도덕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식민을 해야 한다.

아직 모습을 갖추지 못한 이 새 집에 생명을 주어야 할 때다.

전자에 있어서의 진리는 집을 짓는 것이었고,

후자에 있어서는 거기 들어가 사는 데 있다.

우리들의 집은 아마도 조금씩 인간다워질 것이다.

기계조차도 완성되어 갈수록 그 역할이 주가 되고, 기계 자체는 몸을 감추게 된다.

인간의 온갖 생산적 노력, 그 모든 계산이며,

설계도 위에서의 모든 밤샘도 외면적인 현상으로는 모두가 단순화로 귀착되는 것 같다.

하나의 원주라든가, 하나의 용골, 또는 한 대의 비행기의 동체의 곡선을

차츰 풀어내어 여자의 유방이나 어깨의 곡선의 그 단순한 순수성을 갖게 하기까지에는

여러 세대의 경험을 필요로 했던 것처럼, 

기사들이나, 제도사들, 연구실의 계산원들의 일도 외견상으로는

그 날개가 잘 눈에 띄지 않게 될 때까지,

동체에 붙인 날개라는 느낌이 들지 않게 될 때까지

닦고 문지르고 연결을 가볍게 하고 날개의 균형을 잡고 하는데 지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광물을 지니고 있는 암석으로부터 분리되어

완전히 활짝 핀 그 형태가 신비롭게도 결합된,

그러면서도 시와 같은 훌륭한 질을 갖춘 천성의 작품으로 나타난다.

완성이란 덧붙일 것이 없을 때가 아니라 제거해야 할 아무것도 없을 때 이루어지는 것 같다.

발달의 극치에 다다르면 기계는 몸을 숨긴다.
발명의 완성은 이와 같이 발명이 없는 것과 종이 한 겹 사이이다.

그리고 기계에 있어서도 눈에 띄는 장식은 점점 사라지고

바닷물에 닦여진 조약돌처럼 자연스러운 물건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계가 사용되면서 차츰 제 자신을 잊혀지게 된다는 것도 또한 찬양할 만한 일이다.

전에 우리는 비행기에서 복잡한 공장을 조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엔진이 돌아간다는 것조차 잊고 있다.

우리가 조금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심장이 뛰는 것처럼,

엔진도 마침내 돌아간다는 자기의 기능을 다하게 된 것이다.

우리의 주의력을 도구에 빼앗길 필요는 없게 됐다.

도구 너머로, 도구를 거쳐서 우리가 찾아내는 것은 자연,

정원사의, 항해자의, 또는 시인의 그 자연이다.

조종사는 날기 시작하자마자 물과 공기와 접촉하게 된다.

엔진이 전개되고, 기체가 벌써 바다를 가르며

단단한 파도소리를 억누르고 징처럼 울릴 때,

그는 자기의 허리의 동요로써 그것을 알 수가 있다.

그는 느낀다.

이 15톤의 물질 속에 비상을 가능케 하는 그 성숙이 준비되고 있음을.

조종사는 조종간을 잡은 손에 힘을 준다.

그러면 차츰 그의 손바닥 안에 이 힘이 선물처럼 주어진다.

조종간의 금속성 기관은, 이 선물이 그에게 주어짐에 따라 그의 힘의 전달자가 된다.

이 힘이 무르익으면 꽃을 따기보다도 더 부드러운 동작으로

조종사는 비행기를 물에서 떼어서 대기 속에 얹어놓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