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성을 위한 ━━/김요한목사

인간의 문제해결은 오직 한 길뿐이다

Joyfule 2024. 2. 20. 12:16


   인간의 문제해결은 오직 한 길뿐이다(롬7:1-4)



지금의 교회의 문화적인 행사는 가상한 모습이긴 하지만

하나님은 오늘도 여전히 너희들이 살 길은 오직 하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에 와서 말씀을 듣고 성령 안에 거하고, 진리 안에서 하나님의

집이 되어가야 하는데 교회가 놀이터가 되어 버린다면 이건 큰일입니다.

인생의 문제를 푸는 방법은 오직 한 길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 오직 이 한 길 밖에 없습니다.

내 인생의 매듭을 푸는 방법도 오직 이 한 길 밖에 없습니다.

로마서 7장은 성경적인 인간학 또는 심리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을 이해한다면 기독교를 확실하게 이해하는 겁니다.

그 당시 바울은 율법에 의해 돌에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로마서를 쓴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으로는 왜 구원이 안 되느냐 하는 점을

로마서 7장에서 확실하게 밝혀 줍니다.

 

Q. 어떤 원리로 율법에서 자유를 얻게 되었나요?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라 그러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 하느니라(롬7:1-3)

 

A. 법이라면 하나의 원리라고 생각하세요.

이 원리를 알고 있는 자들에게 말한다는 뜻입니다.

율법은 그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만 주인 노릇하지 않는가?

이 원리를 아는 자들에게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서7장은 변증론의 최첨단입니다.

미국에서 바빙크의 변증학 논문으로 유명한 교수가 강의하는

내용을 듣고 제가 로마서 7장을 설명하면 되는데 뭐 그리

어렵게 말하느냐고 하니 그 분이 성경은 목사님이 연구하시고

자신은 신학자이기 때문에 신학을 연구한다고 해서 웃었습니다.

 

그 당시 여자들은 남편의 소유 개념으로 있었습니다.

남편이 살아있는 동안은 아내는 법적으로 남편에게 묶여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다 이루었다’ 하신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 보세요. 우리를 율법에서 해방시켜 하나님의 자녀로 삼는 일을 성취하신 겁니다.

‘남편에게 순복하라’하는 것은 이미 창세기 3장에서 정해 놓은 법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육체의 원리입니다.  이 원리를 통해 바울은 율법이란

법에서 어떻게 해방이 되는가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다 이건 당연한 원리입니다.

비울이 음녀와 자유하는 여자를 대조하는 것은 

이런 원리를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지 않느냐 하는 말입니다.

 

4절은 1-3절의 내용의 결론입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롬7:4)

 

‘그러므로’ 이런 원리에 의해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해 율법에 대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다른 이 곧 다른 남자에게 가서는 이 분이 바로 죽은 자들에게서

살아난 자이신데 같은 분이면서 다른 분이십니다. 곧 예수가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원리는 다른 어떤 종교에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걸 모르면 기독교가 뭔지 모르는 겁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에게 속했지 않느냐고 로마서 6장에서 설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아 장사되고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그의 살으심과 연합되어 새 생명 가운데 행하려 하여 하심이라’(롬6:4)

율법에 대해 죽임을 당했지 않느냐?

그래서 다른 이에게 가서 곧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자,

다시 일으키심을 받은 자 누구시지요?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그와 함께 죽었는데 또 이 분이 다시 살아나셨으니까

그리고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시니까 같은 분인데 다른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이라고 합니다. 예수였던 분이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실제로 성경은 예수와 함께 죽었다고 하는데

지금 그 예수님이 우리 안에 누구로 말미암아 계십니까?

성령으로 말미암아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보혜사라고 하는 겁니다.

여기서 다른 이란 내용이 다르다는 뜻이 아니라 같은데 다른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나서 그에게 가서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의 열매가 안 맺히는 이유는 이 원리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육신의 껍데기로 열매를 맺으려고 하기 때문에 교회라는 유니폼을 입혀

거짓 연기를 시키고 있는 거죠. 그래서 냇가의 조약돌 같이 반질거리기만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살아나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이 원리가 바로 율법의 완성으로 가는 길입니다.

율법의 완성은 나타나는 성령의 열매를 말합니다.

 

율법아래에 있는 신자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맺긴 맺습니다만 어떤 열매를 맺는가요? 곧 행위의 열매입니다.

겉모양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걸 유대인의 상징인 무화과라고 합니다.

꽃도 아니고 씨도 아닌 휴지 뭉쳐 놓은 것 같은 모습이 바로 무화과입니다. 

그러나 새 생명 가운데 있는 사람 곧 다른 보혜사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은

내적인 열매가 맺힙니다. 때가 되면 그 열매가 밖으로 다 드러납니다.

이게 바로 세상의 소금과 빛입니다.

 

무화과도 열매는 열매입니다. 그러나 씨가 없어요.

그래서 무화과는 씨로 번식하는 것이 아니고 꺾꽂이를 합니다.

모든 신자들이 그 속에 생명이 없으면 다른 사람을 구원시키지 못합니다.

자기 같은 사람을 만들어 자기도 천국에 안 들어가고 남도 못 들어가게 만들어요.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한번 왔다가 두 번 삽니다.

그래서 우리가 만약 바라는 것이 이생뿐이면

우리는 가장 불쌍한 자라고 말합니다(고전15:19) 

지금 이 세상의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풀 곳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딱 하나의 방법밖에 없습니다.

다윗을 한번 보세요. 여호와는 나의 산성이시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라.

사망에 눌린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이 오직 하나 밖에 없는데

그 길이 막혀 버리면 참 힘들어요. 세상 사람들은 방법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the way 하나 밖에 없어요.

우리는 다윗에게 배워야 합니다. 그의 원수들이, 대적들이

그의 살을 먹으려고 삥 둘러쌌지만 오직 푸는 방법은 내가 여호와

전에 거하여 그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를 사모할 것이니라(시27:4)

다윗에게는 오직 이길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죄나 인생의 문제에 있어서 묶는 분도 주님이시고

푸는 분도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문제는 지금 현재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방법으로 풀어내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가치가 하락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두 번째의 삶을 삽니다.

이 남편에서 죽고 저 남편을 다라 육의 자리를 영의 자리로 옮겨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는 해산의 수고로 구원을 받는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 측에서 볼 때 성도는 여성명사로 다 여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의 신부들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의 십자가를 따라 해산의 수고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어 그리스도의 족보에 올라갑니다.

신자들이 너무 어리니까 너무 답답하니까 주의 종들이

어떻게 하면 성도들에게 기쁨을 줄까 해서 교회가 여러 가지

방법이나 이벤트를 동원하는 것은 가상한 일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문제를 푸는 방법을 오직 십자가의 도 한 길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율법에서 벗어나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라(홈7:5-6)



 하나님께서 율법에 의한 제사나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한 몸(히10:5)을 보내셔서 그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또한 율법에 대해 죽게 하시고 다시 살아난 새로운

영의 몸을 우리에게 주셔서 성령 안에서 주와 한 영 한 몸을 이루어

율법의 요구인 사랑을 이루어 하늘에서 뜻이 이루어진 것같이

우리 속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십니다.

 

Q. 율법에 대해 죽기 전과 현재의 차이가 무엇인가요?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롬7:5-6)

 

A.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욕심은 고통스럽습니다.

사람들이 이와 같은 고통스런 욕심은 스스로 다 알고 있어요.

인생의 즐거움이 아니라 괴로움을 주는 욕심입니다.

‘우리 지체 중에 역사 한다’ 이 말은 욕심이 말초신경을 자극한다는 뜻입니다.

왜 시편1편과 같이 복 있는 사람이 되어 악인의 꾀를 쫒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과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해야 하느냐?

사람이 육적으로 향하면 우리의 모든 마음과 활동이 말초를 향합니다.

혀끝, 눈끝, 코끝, 손끝으로 향해요. 지금 세상이 다 그렇게 살고 있잖아요?

웥치만 니란 분이 이런 말을 한 기억이 납니다.

혼적인 사람일수록 호기심으로 인해 구경을 좋아한다고... 맞는 말이지요.

그리스도인 중에도 새로운 것이 없나하고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육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일수록 내향적이어서 항상 중심을 향합니다.

그것은 온순하다 내성적이다 성격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상향 내향 외향이 되어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과 바른 관계, 그 다음 나와 바른 관계, 그리고 나서

이웃과 바른 관계인데 혼적인 사람은 하나님과 관계도 아니고,

나와 관계도 아니고 사람 곧 이웃만 쫓아 다녀요. 바로 욕심으로부터 납니다.

‘사망이 열매를 맺었다’ 이 말은 오로지 죽을 짓만 했다는 말입니다.

영적으로 예민해져야 하는데 육적인 사람은 인간관계에만 예민합니다.

그 때부터 매우 힘이 듭니다. 경쟁 시기 질투 미움 다툼이 일어나지요.

시편 62편에서 다윗은 자신이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답니다.

그래서 오직 주님만이 나의 반석이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요. 나의 피난처라며 다윗은 고백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으로 평강을 얻어 영적 날개를

달고 하나님께로 날아 올라가는 진리의 비밀을 터득해야 합니다.

돼지처럼 욕심의 몸집을 키우지 말고 새처럼 날개가 발달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 안에서 하늘나라의 날개를 달아 할 수 있으면 높이 날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자신이 율법에 걸려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다만 율법이 주는 무거운 짐을 느끼고 있을 뿐입니다.

불신의 사람들에게 죄가 무섭다는 느낌이 없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다만 죄의 결과가 다가와서 무섭게 하므로 그 결과가 괴롭고 불안한 겁니다.

후회 죄책감 저주의식 같은 것이 밀려올 때에 비로소 괴로운 겁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에 죄를 겁내 본적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어요.

그래서 율법을 겁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섭고 두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 그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되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고 내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에서 죽었다가 다시 산 자인 것처럼 살라고 강력하게 권합니다.

박쥐처럼 쥐도 아니고 새도 아닌 것처럼 양쪽으로 오락가락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어차피 인간은 두 가지 일에 충실치 못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따라서 항상 갈라디아서 2장 20절 묵상을 많이 하십시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 그런 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 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주신 gave Himself)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죽으신 몸과 그리고 주신

몸을 생각하므로 영의 새로운 것 곧 새 생명의 영으로 사는 겁니다.

영의 새로운 것이라고 하면 바로 생명의 성령을 말합니다.

이 생명의 성령을 섬길 일이지 의문의 묵은 것에 종노릇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후견인을 따르는 종노릇을 좋아하게 됩니다.

이스라엘과 같은 노예근성을 조심해야 합니다. 사람의 종노릇하지 말아야죠.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볼 때에 성경도 이래라 저래라 하는구나 그렇게 봅니다.

성령님이 우리 속에서 최고의 율법이 되어서 우리의 의식과 개념이나 사상,

가치관을 바꾸어 놓습니다. 성령님이 우리의 가정교사이십니다.

가정교사는 채찍을 들고 인도하시고 가르치고 생각나게도 합니다.

성령이 우리를 위해 탄식하고 기도함으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따라서 그 분이 우리에게 가정교사로 붙는 순간이 그렇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성령을 소멸시키지 말고, 근심시키지 말고, 훼방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하든 못하든 그 분이 우리들에게 총체적으로 유익을 주도록 역사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을 떼어 놓으려고 한다든가 그 분을 멸시하지 말라는 겁니다.

우리 속에서 날마다 신진대사가 일어나서 새로워지는 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읽으면 모든 성경이 다 율법이 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본성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낳고 낳는 창조입니다.

마태복음은 생명의 책이므로 낳고 낳는 이야기가 기록이 되었습니다.

우리 몸도 주님으로부터 만들어졌지만 영은 새 창조입니다.

이 창조는 그리스도 안에 계속되어 그의 형상이 이루어져 갑니다.

 

몸의 구조가 음식을 먹으면 찌꺼기는 대 소변으로 나가고 계속 새로워집니다.

살아 있는 생명체는 이와 같이 계속 재창조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창조와 지으심은 달라요. 창조는 계속 새롭게 되는 것이고,

지으심은 이미 된 것 중에서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성은 교육과 훈련을 통해서 늘 머리에서 뱅뱅 돕니다.

체화가 안 되고 지식만 가득해서 안다는 것이 오히려 더 괴롭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 영으로 살므로 기쁨과 감사의 눈물 외엔 흘리지 마세요.

가슴에서 흘리는 눈물은 머리가 깨끗해집니다.

머리가 깨끗하면 주의 생명의 기운이 골수를 윤택케 하며

피의 세포가 1초에 200만개 이상 생산된다고 하는데 혈액순환이

좋아져 원활한 산소 공급으로 인해 온 몸의 신진대사가 넘쳐요.

왜 머리가 띵합니까? 여러분의 마음이 텅 비어서 그래요. 왜 가슴이 빕니까?

생각을 딴 데 두기 때문입니다. 욕심을 따라 육신의 생각을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 담아 들으면서 내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하세요.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의 새 본성을 만들려고 노력하세요.

그러면 제2의 사주(?)가 내게 다가오는 겁니다. 새로운 운명 속에 들어갑니다.

 





   죄와 율법과 나와의 삼각관계(롬7:7-10)



 성경이 그리스도 안에는 죄와 사망의 법이 행사를 못하므로

율법에서 벗어나 진리 안에서 자유를 얻었다고 말씀할 뿐 율법은

천지가 없어지기 전까지는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는다(마5:18)고 말씀합니다.

다만 그 천지가 바뀐 사실을 아는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가는 비밀을 알기 때문에 율법 외에 다른 의를 얻어서

그 의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여 드디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율법의 완성에 이르게 됩니다. 이와 같은 믿음의 경지에 이르면

다윗과 같이 보좌에 앉으신 주님을 항상 빤히 쳐다보고 앙망하게 됩니다(마22:41-46)

베드로는 이와 같은 신앙의 완성도를 파악하고 성령이 임하신 목적을 설명하고(행2:14-36)

바울은 바울대로 로마서를 기록하게 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이 성경의 원형교회를 알고 그 교회관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섬기고 주의 이름을 간절히 호소하여

전천후의 구원을 받으려면 우리 한국교회라는 편견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한국교회는 성경의 원형교회에서 한참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Q. 율법이 있으므로 죄가 드러나니 율법이 문제가 아닌가요?

“그런 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 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 하였으리라”(롬7:7)

 

A. 잘못하면 그런 논리를 펼 수가 있습니다.  율법이 있으므로 죄가 있고

죄가 있기 때문에 죄의식이 생기므로 율법을 없애 버리자 할 수가 있겠지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성립되지 않으니 우선 먹기는 곶감이 달겠지요.

인간은 거울로 자신의 추한 얼굴을 보고는 추한 얼굴을 고치려고 하지 않고

거울을 던져 버리려고 하는 죄의 본성이 있어서 그런 소리를 하는 겁니다.

그러나 율법이 우리에게 탐심이 있다는 것을 지적해 주지 않으면 우리가

탐심인 걸 모르고 삽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어디까지 갔든지 율법이

우리가 그 요구인 사랑을 완성 될 때까지는 따라와서 내 자신을 지적 해줍니다.

내 자신에게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있다는 것을 율법이 아니면 누가 가르쳐 줍니까?

내 안에 다른 것으로 채워졌다가도 율법에 의해 깨닫고 ‘이건 아니야,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진리를 따라 하나님을 사랑해야 해‘ 하고 바꿉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잘못하면 탐욕을 의욕으로 미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신앙의 의욕을 아주 훌륭하게 보는 관점이 그만 우상숭배를 하게 합니다.

특히나 다다익선인 물질만능주의 사회에서 세속화된 교회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5장 24절은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자신도 주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을 뿐 아니라 정욕과 탐심도 못 박혔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은 사람에겐 이 같은 법을 금지할 길이 없습니다(갈5:23)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시므로 우리를 위해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탐심이 죽어 버리면 그만 시체가 되어 버립니다.

힘을 잃어버리고 갈팡질팡합니다. 이 공백 곧 중간 스캔들이 무섭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다음에는 바로 성령을 구해야 합니다. 아니면 일곱 귀신이 엄습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섬기는 것만 우상숭배가 아니라

내 마음을 끌고 가서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게 하는 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못하고 늘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것 이것도 우상입니다. 그래서 보이는 우상은 하급우상이요.

마음을 이끌고 가는 건 중급우상이며 자신의 자아는 최고의 우상이라고 하잖아요?

고난을 당하면 눈에 보이는 것이나 욕심은 얼른 놓게 되지만 자아는 참 오래갑니다.

이런 죄를 율법이 없으면 이런 것을 우리가 어떻게 발견하겠습니까?

율법에 의해 아차! 내가 하나님보다 나를 더 사랑하고 있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율법이 있으니 이 죄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율법이 X레이 같이 유익합니다.

 

교회가 잘못하면 의욕을 불태우는 것을 신앙으로 아는 경우가 많습니다.

탐욕으로 신앙 생활하는 사람, 그런 사람은 말씀이 들어가면 멍청해지고 맙니다.

자연을 보세요. 자연 속에는 탐심이 없어요.

자연의 모든 만물은 기본적인 욕구에 따라 움직여요.

동물 세계는 탐심이 없기에 먹고 싶은 만큼만 먹습니다. 배부르면 잡니다.

사자들이 그렇게 으르렁거리지만 헬스클럽이 없잖아요. 사기 사건도 없고 횡령도 없습니다.

코인투자고 없고 보이스피싱도 없으며 교도소도 없습니다. 배만 부르면 오케입니다.

오직 아담 안에서 죄와 사망을 지니고 태어난 인간만이 갖는 탐심입니다.

이것을 율법이 없으면 어떻게 알아요? 그래서 율법이 유익이라고 말씀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롬7:8)고 하십니다.

죄가 나를 충동시킨다는 뜻입니다.

예컨대 누가 간증을 하는데 어느 부흥회 갔더니 500만원

헌금하면 100배가 되어 5억이 된다고 하던데요 말합니다. 

이것은 탐심을 불러일으키는 일인 겁니다. 이런 부추김에 죄가 숨어 있다가

쇼크를 받아 나도 하고 들고 일어나는 겁니다. 술 먹지 말라고 하면 지금까지

잠자코 가만히 있던 사람이 술 먹으러 갑니다. 할아버지가 밖에 나가시면서

손자들에게 얘들아 저 선반 위에 있는 홍시를 먹지 말라고 하시면 그때부터

홍시를 먹고 싶은 마음에 침을 질질 흘리게 됩니다. 모르면 그만인데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교육 같은 것 시키지 말아야죠. 그거 안 시켜도 저절로 압니다.

율법이 인간들 속에 끼어든 것은 완벽한 죄인을 만들려고 한 겁니다. 

이걸 봐라 네가 이런 인간 아니냐? 희망 없는 것 아니냐? 바로 율법의 역할입니다.

손들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을 따라 세례(침례)로 항복하라는

뜻일 뿐 탐심을 일으켜 세워서 그 율법 조항을 다 지키라는 뜻이 아닙니다.

 

Q. 율법을 깨닫기 전과 후의 나의 상태는 어떠한가요?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7:9)

 

A. 율법을 모를 때는 내가 살았습니다. 죄의 무서움을 모릅니다.

그러나 계명이 들어오므로 죄가 내 속에 활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내 속에 죄가 죽은 척하다가 살아납니다. 그리고 나는 죽어 버리고 죄만 살아납니다.

이 말은 전에 내가 열심을 가지고 하던 일이 잘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율법이 가르쳐 준대로 한 것이더라는 겁니다. 사람들이 열심을 많이 가지고 있지만

그 열심이 결국 거듭난 나로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욕심이

그렇게 하도록 만들었다고 드러납니다. 그게 죄인 줄 몰랐는데 이젠 알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롬7:10)고 하십니다.

생명으로 가게 해야 할 그 계명이 내게 사망으로 가게 만들어 버렸다는 뜻입니다.

율법이 사망으로 가는 내 자신을 드러내고 말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지각이 있어야 합니다. 지각에 뛰어난 평강이 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빛이 들어오면 맨 처음 지각이 생깁니다.

눈빛이 달라져요. 낮과 밤이 달라져요. 그래서 지각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선과 악만 알던 내가 빛과 어둠과 생명과 사망의 경계를 깨닫게 됩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인데 내가 지킨다고 하면 탐심을 일으키고

욕심을 일으켜 결국 내가 사망으로 가는 존재임을 알게 되는 지각입니다.

율법이 선한 것이라고 받았는데 결국 그것이 나를 사망으로

보내는 걸 알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나와 죄와 계명은 항상 삼각관계입니다.

내가 죄로 가면 계명이 나를 정죄하여 죽입니다.

내가 죄로 갈 때 율법이 달려들어 죄로 여기게 되고,

반대로 내가 율법을 지키려고 달려가면 내 속에서 죄가 충동질해서

나를 또 사망으로 가게 하더라는 겁니다. 반복해서 그렇게 만들어 갑니다.

그래서 아담 안에 있는 죄인은 죄로 죽든지 율법으로 죽든지 어차피 죽어요.

육신은 무조건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잘 하면 잘하는 대로 원수가 되고

못하면 못하는 대로 하나님의 원수가 됩니다. 육신이 죄로 갈 때는 율법이

가입해서 사망 아래 있는 자로 발견되어 내가 죽었구나 하고 만듭니다.

 

또 율법이 끼어들어 죄는 짓지 말고 율법대로 살아봐야겠다고 하는데 탐심이

나를 부추기고 일으켜 죽자 살자 열심히 일할 때 그만 내가 더 망하게 되더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다 지켰다고 까부는 부자 청년에게 네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너는 나를 좇아오라고 하니 그만 근심하며 떠나더라 하지 않습니까?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지 못하면서 말씀대로 순종하겠다고 덤비는 꼴이지요.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에 의하여 거듭나지 않은

인간의 육신은 죄 중에 있어도 안 되고 그 자리에서 율법을 받아 열심을 내도 안 됩니다.

오직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 율법에 대해 죽었으므로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 아래에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바울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율법이 아니라 우리 속의 죄가 문제이다(롬7:11-13)



율법이 아니라 우리 속의 죄가 문제다(롬7:11-13)

 

바울의 공로가 크다면 인간들이 율법을 만날 때에 우리가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죄가 주인이더라(롬7:17)는 사실을 알고 미리 공지한 사실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를 한 후에 서로 부끄러워하여 무화과 잎으로 가리고

하나님이 두려워서 숨었는데 그들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가 먹지 말라고 명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느냐 하시니

비로소 하와가 속은 사실도 드러나고 뱀의 꾐도 생각이 났던 겁니다.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었으나 서로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나 부끄러움을 가지게

되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든 것이 결국 선악과의 독성이며 죄였습니다.

사람들이 이 죄를 가진 채로 예수를 믿고 말씀대로 순종하여 복을 받자고 하든가

아니면 그리스도를 닮은 제자가 되어 주의 영광을 드러내자고 열심을 냅니다.

아뇨. 인간은 가능성의 열쇠꾸러미를 다 사용해 보겠지만 하나님은 웃으십니다.

 

Q. 신령한 율법이 왜 나를 죽이는가요?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롬7:11)

 

A. 율법에 대해 완전히 망해야 비로소 항복을 합니다.

그래서 율법이 나를 완전히 파멸시켜 버렸다고 말씀하는 겁니다.

바울은 그게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죄가 그렇게 했다고 발견했습니다(롬7:17)

그러므로 언제나 나와 죄를 분리시켜 생각을 해야 합니다.

마귀란 놈은 죄를 심어 놓고 범죄를 하면 참소를 하여 우리를 녹아웃을 시킵니다.

옛날 참새를 잡으려고 줄을 매서 틀을 놓고 그 밑에 모이를 갖다 놓는 형국입니다.

참새는 모이를 먹으려다가 망했다고 생각할 뿐 길게 늘어진 끈을 보지 못합니다.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의 범죄와 그 결과를 재구성해 보세요. 그게 마귀의 궤계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두 존재입니다. 그리스도 밖의 십자가 저쪽에 있을 때도

나와 죄 두 존재였고 그리스도 안에 십자가 이쪽에 있는 지금도 두 존재입니다.

저 쪽에 있을 때는 나와 죄가 양립되어 있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 쪽으로 넘어오면 속사람과 겉 사람이 서로 대립이 됩니다.

우리는 어차피 이중인격자라는 걸 인정하고 이 둘을 분리시킬 줄 알아야 합니다.

이를 대칭으로 설정해 놓고 설명하는 데 있어서는 바울이 전문가입니다.

내가 죄를 가지고 있으면 죄가 나의 주인이기 때문에 죄가 시키는 대로 합니다.

따라서 자세히 보면 죄의 종과 그리스도의 종의 차이가 분명히 납니다.

왜냐하면 죄도 능력이고 그리스도도 내주하시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죄는 주인의 권세가 있어 죄가 시키는 대로 하면 사망의 월급을 받습니다(롬6:23)

죄가 줄 수 있는 유일한 보상이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으로 나의 욕심과 의욕으로 열심을 내서 한 번 해 보겠다고 하는데

탐심을 이뤄 우상 숭배를 하게 해서 결국 나를 사망으로 떨어뜨리고 맙니다.

아마 현재의 교회의 신자들의 딜레마가 여기에 있을 겁니다.

그러다보니 거짓으로 연기력이 뛰어난 사람이 교회에서 돋보이게 됩니다.

그건 바로 외식에 세련된 언행의 신자라고 말할 수가 있겠지요?

 

그러나 이와 같이 원죄를 가진 인간의 육신이란 어차피 망할 존재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자유롭게 해서

다른 이 곧 그리스도에게 갖다 붙이는 길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롬11장은 접붙임을 받은 자들의 이야기가 나오는 겁니다.

돌 감람나무들이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아서 전에는

하나님의 준엄함 아래에 있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 안에 있게 되었습니다(롬11:22) 

죄에서 구원은 이 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어요. 오직 그 길 밖에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8장을 염두에 두고 1장부터 전개해 가는 것임을 다시 상기시킵니다.

1장부터 서술한 말씀을 통해 어떻게 8장의 고지에 우리를 올려놓는가 하는 겁니다.

그걸 알고 나서 아하! 드디어 내가 롬8장 안에 있구나 하는 확증이 와야 합니다.

롬8장 안에서는 큰 자 작은 자만 있을 뿐이지 거기선 되었다 안 되었다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사람들을 롬8장 안으로 안내해서 그 안으로 이끌기를 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결코 정죄함이 없고 아무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자가 없다. 이 안에 집어넣겠다는 집념을 가지고 로마서는 전개 되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이라는 구원의 텐트 속에 기어이 끌어들이겠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로마서의 의도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 전 세계의 역사를 알고, 이 세상의

생활 속에서도 승리하며 살도록 하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바울의 의도입니다.

 

Q, 우리가 율법에 문제제기를 할 수가 있는가요?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롬7:12)

 

A. 이로보건데 하고 말하는 뜻은 실상은 율법이 잘못된 것은 없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돈이 나쁘지는 않다 다만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긍정과 부정이 함께 있듯이 용도가 문제입니다.

율법과 계명도 마찬가지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을

알고 그리스도 안으로 도피하도록 하는 율법과 계명은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합니다.

 

 그래서 율법의 기능과 역할을 다시 설명합니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롬7:13)

 

 여기서 죄라는 개념은 윤리나 도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로 기울고 있는가? 그 성향을 말하는 겁니다.

이 죄의 성향이 무섭습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나 세상에서 받은 상처가

내 속에 잠복해 있다가 그럴만한 사람이 앞에 나타나면 밖으로 분노로 표출됩니다.

얼마 전에 일어난 신림동 칼부림사건의 가해자와 같이 인간 속에 있는 악성입니다.

 

그런 것이 좁은 의미에는 죄의 성향으로 개인적으로 밖으로 나타나고,

넓은 의미에선 모든 인간 안에 다 그런 죄와 악성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그걸 율법이 우리에게 알도록 말해 줍니다. 완전히 썩어 쓸모없다는 걸 가르쳐줍니다.

만약 나는 그런 것이 없다고 말하면 그건 거짓말이며 하나님도 거짓말하는 분으로 만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적 타락한 죄인임을 알게 하여 구원하는데

절대적인 도우미가 되는 율법이 전혀 잘못된 것은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와서 적용이 되고, 공식화 되어 그걸 풀어 보므로, 실제로

생애에 적용이 되어가는 겁니다. 그걸 내가 안다고 해서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에 그렇다고 하더라는 말씀대로 그 그렇다 하더라는 말씀을 안다고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게 결코 아닙니다. 계명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넌 그런 인간이다.

알기만 하면 뭐 하냐 안 되는 것 아니냐. 속에 있는 탐심이 달려들면 뜀박질하는

인간이 아니냐, 그렇게 하면  안 되는걸 알아라 하는 것이 바로 율법의 목적입니다.

그럼에도 유대인은 그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완전히 불도저 앞에 삽질을 하고 있는 거죠. 지금도 그러고 있지만 말입니다.

‘율법이 나를 죽게 만들어 버렸다’ 이 말은 철저한 죄인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신문지상에 대문짝만한 기사가 나오도록 만들어 버렸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래서 얌전한 죄인은 평생 못 고쳐요. 왕창 망해야 비로소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을 따라 그리스도 안으로 귀순합니다.

고난으로 인해 배추가 소금에 절여지듯 완전히 풀이 죽어야 주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불합리한 나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롬7:14-17)



 현대철학이 자신 속에 합리와 불합리가 공존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의 이성과 행동이 일치가 되면 합리이고 안 되면 불합리입니다.

그래서 합리적인 것은 자신이 스스로 처리하고 불합리한 것은

에라 나도 모르겠다 하나님께 맡기자 하는 기형적인 신앙이 되고 맙니다.

따라서 율법에 대한 자신의 문제가 바로 죄임을 알고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에 의해 죄가 원인이었던 내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의가 원인이 되므로 성령이 내주 역사하는 믿음에 의해

전인간적 구원을 받아 믿음에 의한 삶이 진정한 합리임을 터득해야 합니다.

 

Q. 율법이 영적인 것임에도 왜 나는 불합리에 사로잡히는가요?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롬7:14)

 

A. 율법을 신령한 것, 영적이지만 나의 육체는 죄가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않는다고 말합니다(고후5:16) 

육체로 오신 예수로만 알면 성경이 안 풀립니다.

바울은 나는 육신에 속하여 곧 육적인 존재와

사고방식으로 죄 아래 팔려 죄의 종노릇하였다고 말합니다.

어떤 육신이든 육신은 죄에 끌려 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육신의 욕심이 인간의 모든 문제와 병의 원인이 됩니다.

공관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사역만 알고 있으면 영적인 비밀이 안 풀립니다.

표적과 기사는 일어나지만 예수님이 하신 육체의 일만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은 그때만 아니라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고 계십니다.

흡수하고 계십니다. 성령을 통해 우리 연약함을 계속 수용해 버리십니다.

만일 성령 안에서 주님과 하나가 되면 주님께서 우리 연약함을 담당하시고

우리 병을 짊어지십니다(마8;17) 그리스도 안에서 병을 고치는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영혼의 목자이시며 감독이신 주께로 돌아왔습니다(벧전2:25)

감독은 인도하시고 목자는 먹이시는데 이제 그 분께로 돌아왔습니다.

우리 연약함을 주께서 계속 흡수하고 계십니다.

썩은 고름을 계속 빨아내듯이 흡수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내 심령의 병이 치료되며 그 다음에 육신의 병도 치료됩니다.

이렇게 되어야지 온전한 치유가 됩니다. 껍데기만 치료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사람의 병은 심령으로 다스리거니와 심령의 병은 누가 일으키겠느냐(잠18:14)하십니다.

그 심령의 연약함을 주께서 계속 받아 주시므로 그 심령이 튼튼해지고

정신이 건강하고 강해지고 활력이 되므로 육신의 건강이 되는 것입니다.

 

드디어 바울은 자신의 불합리의 원인을 찾았습니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롬7:15)

내가 알 수 없는 짓을 자꾸만 합니다. 그건 속에 있는 죄가 문제입니다.

죄도, 사망도 존재입니다. 내 속에 있는 죄가 나를 엉뚱한 짓을 하도록 만듭니다.

이 죄가 바로 주범입니다. 그리고 내게 있는 욕심이 죄에 끌려갑니다.

그러므로 죄 안에 있는 나를 구출하는 방법도, 구원을 받아서 주님의 은혜를

향유하는 것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 이 방법 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모르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닙니다.

구원도 안 되고 구원받는 이후의 복도 없습니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롬7:16)

율법이 죄를 짓게 한 것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은 선한 것이라는 진술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문제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죄가 그렇게 하더라는 말입니다.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7:17)

드디어 자신을 발견합니다. ‘내가 아니고 내 속에 있는 죄로구나 발견한

다음에 우리 범죄함을 위해 십자가에 내어주시고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께로

가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을 발견했다는 것이 바울신학의 핵심입니다.

 

이걸 알지 못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것을 발견하지 못하면 그건 기독교가 아닙니다.

인간이 자기 속에 죄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고 하지도 않고

도무지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불합리한 자신의 원인을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기 싫은 짓을 자꾸 하고 있는 나, 내 속에 죄가 있기 때문인데 갈등을

하면서도 나를 변호하고 있는 나를 발견합니다. 고발과 변명의 내전이 항상 일어납니다.

안과 밖이 서로 싸우는데 이것이 내가 아니고 내 속에 있는 죄더라는 말입니다.

죄를 내가 갖고 있으니 그 죄가 짓는 죄의 부끄럼도 내가 당하고 갚기도

내가 갚으면서 어쩔 수가 없어 갈라서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입니다.

결국 그 죄 값으로 멸망을 받아요.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면 하나님은

그 결과를 다스립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는 원인과 결과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하나님의 은혜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원인은 하나님의 은혜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원인은 태초라는 근본 안에서 그 원인이 나옵니다.

거기서 생명이 흘러나옵니다. 그 생명이 원인이 되어서 우리의 삶에

그 결과로 나타납니다. 그 결과를 하나님이 보시고 '너는 의롭다' 하십니다.

다만 우리는 행위라는 원인이 아니라 믿음으로 그 원인을 받아들이는 의입니다. 

원인과 결과가 없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뜻은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원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원인이시고 선이시기 때문에 그 결과도 선입니다.

그래서 선을 추구하는 자는 그 심령 속에 영광과 존귀와 평강과 영생으로

하시고(롬2:7) 악을 행하는 자는 그 속에 환난과 곤고가 있습니다(롬2:9)

왜 사람들이 믿음에 원인과 결과가 없다고 할까요?

그런 소리하지 하면 안 됩니다. 분명히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어요. 

진정한 구원이란 우리 속에 있는 죄가 원인인 것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의로 그 원인이 바뀌므로 삶의 결과가 바뀌어 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를 믿는 믿음에 의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