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성을 위한 ━━/에세이

인생 낙원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Joyfule 2023. 4. 20. 13:48





인생 낙원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초등학교 시절 교과서에서 ‘퀸 엘리자베스호’라는 배의 이름을 보았었다. 세계의 바다를 일주하는 호화크루즈선이라고 했다. 그 배는 사람들이 만든 지상천국이라고 했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 살던 나는 지상에 있는 천국이 어떤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사십대 중반 나는 뉴욕에서 출발한 ‘퀸 엘리자베스’호를 LA에서 탔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왔던 바로 그 배였다. 그 배는 퇴역을 하지 않고 일 년에 한 번씩 지구를 돈다고 했다. 지상낙원이라고 배웠던 그 배를 타보는 게 어린 시절부터의 막연한 꿈이었다. 승객 천 오백명의 대부분이 백인이었다. 나 같은 동양인은 서너 명에 불과했다. 배 안은 과연 낙원인 것 같았다. 뷔페에 가면 최고급 온갖 음식이 풍성하게 쌓여 있었다. 우아한 분위기의 레스트랑은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흰 테이블보가 덮인 상위에는 은촛대와 투명한 와인 글래스들이 놓여 있고 정장을 한 웨이터들이 옆에 서서 시중을 들고 있었다. 방마다 잠시 자리만 비면 청소가 되고 침대도 정리되어 있었다. 승객은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됐다. 저녁마다 최고의 뮤지션과 마술사들이 공연하는 화려한 쑈와 댄스파티가 있었다. 어떤 걱정도 근심도 없는 바다위의 궁전이었다. 

그렇게 이주일쯤 지났을 무렵이었다. 승객들은 바다 위의 궁전 생활에 차차 염증을 느끼는 것 같았다. 레스트랑에도 빈자리가 생기고 댄스파티도 시들해져갔다. 권태가 배 안을 감돌았다. 급기야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는 이벤트가 만들어졌다. 풀장 옆에서 바디페인팅을 한 사람을 떠밀어 풀장에 빠뜨리는 행사였다. 배 안의 방송이 그 만들어진 사고를 수다스럽게 중계하고 사람들이 그 순간을 보면서 “와아”하고 웃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일 뿐 사람들은 곧 심드렁해졌다. 사람들은 일을 하고 싶어 했다.

한 영국인 부인이 내게 다가와서 자기에게 셰익스피어공부를 해 보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평생을 교사로 보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녀는 자기가 하던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화가출신인 듯한 사람은 줄곧 조그만 스케치 북을 열고 드로잉 연습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구석구석에서 혼자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했다. 

한 영국인 남자는 둥근테에 천을 끼워놓고 십자수를 열심히 놓고 있었다. 바닷가에서 아이들이 모래성을 쌓듯 인간은 뭔가 작은 성취라도 얻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았다. 

희랍인 죠르바는 삶이라는 것은 말썽을 찾아 나서는 것이라고 했다. 


그 무렵 변호사인 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애환과 고통을 들으면서 연민피로가 몸과 영혼을 지치게 했었다. 법정에서의 싸움도 지겨웠다. 퀸 엘리자베스호는 내가 지겨워하던 변호사 일을 감사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었다. 


의사인 이시형 박사가 애리조나 주의 ‘썬 밸리’라는 마을을 찾아갔었다고 한다. 그곳은 미국의 억만장자 부자들이 은퇴 후 모여 사는 곳이었다. 모든 시설이 초 현대화 된 호화로운 곳이었다. 그곳에는 최신 의료시설과 최고의 실력을 갖춘 의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곳은 가난한 사람도 노숙자도 잡다한 음식냄새를 풍기는 길거리 푸드트럭도 없는 부자들의 청정지역이었다.
자동차 소음도 없고 노인들이 놀라지 말라고 시속 이십오키로미터 이하로 차가 달려야 했다. 그런데 그곳의 치매 발병율이 일반 사람들보다 훨씬 높았다. 

이시형 박사는 직접 그 현장에 가 보고 그 원인을 이렇게 분석했다고 한다. 그들에게는 생활에 불편한 점이 없고 걱정될 일이 없었다. 생활의 변화도 없었다. 일상적으로 겪는 스트레스가 없는 점이 오히려 병을 유발하는 원인이라고 본 것이다. 


내가 묵고 있는 동해바닷가의 실버타운에 있는 노인들은 또 다른 고통을 겪고 있다. 아무런 일이 없는 편안함 자체가 싫은 것이다. 매일치는 골프도 전혀 재미를 느낄 수 없다고 한다. 매일 같은 자리에서 같은 노인들과 밥을 먹는 것도 싫다고 했다. 새끼줄에 연탄 두장을 끼어들고 다른 한손에는 동태한마리 사 들고 아이들과 저녁밥을 먹으러 집으로 가던 가난했던 그 때가 훨씬 행복했다고 말한다. 

가난을 벗어나려고 애를 쓰고 눈물 흘리고 사람들과 어울려 지지고 볶던 그 시절이 좋았다는 것이다. 내가 아는 고등법원장을 지냈던 분은 최고 시설을 갖춘 서울의 실버타운에서 살고 있다. 그는 매일 새벽 서초동에 있는 자신의 법률사무소에 나와 앉아 있다가 저녁무렵이 되면 돌아간다. 좋은 풀장과 오락시설 그리고 질좋은 음식보다는 의뢰인들의 애환과 마주하고 싶은 것 같다. 지상낙원은 호화크루즈선도 부자들만 사는 미국의 ‘썬 밸리’도 아닐 것이다. 지금 각자 자기가 살아가는 곳이 ‘인생 낙원’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