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성을 위한 ━━/에세이

행복한 노인 이발사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Joyfule 2023. 4. 18. 11:45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행복한 노인 이발사



갑자기 오래전 내 머리를 깍아 주던 노인 이발사가 기억 저쪽에서 떠올랐다. 그때 나이가 칠십이라고 했으니까 지금은 팔십대 중반의 노인일 것이다. 아직 그가 살아있을까? 그 노인 혼자 의자 하나 있는 비좁은 공간에서 손님들의 머리를 깍아 주고 있었다. 그 이발소의 거울 앞 선반 구석에는 오래된 낡은 앨범이 꽂혀 있었다. 오십년대 가난했던 시절 시멘트 봉투를 잘라 만든 투박한 앨범이었다. 이발사 노인은 내게 그 앨범을 보여주었다. 초라한 앨범 안에서 찰톤헤스톤, 율브린너, 존 웨인등 헐리우드 스타들이 미소짓고 있었다. 미녀 오드리 헵번이 만지면 부서질 듯한 낡은 종이 위에서 활짝 웃고 있었다. 이발사 노인이 젊은 시절 영화 포스터나 일본잡지에서 오려 붙인 것이라고 했다. 내 머리를 깍으면서 이발사 노인이 말했다.

“어려서 이발소에 급사로 취직해서 석탄 때고 물 길어 오는 일부터 시작했어요. 기술자들이 절대로 자기 가위나 면도칼을 만지지 못하게 했어요. 그랬다가는 맞아 죽는 겁니다. 이발기술을 남에게 알려주지 않는 거죠. 어려서 저는 영화배우가 되고 싶었어요. 그 시절에도 학원에 가서 열심히 연기 연습을 했어요. 먹는 걸 아끼고 저축한 돈으로 학원비를 냈죠. 그런데 육십년대는 미남이 아니면 연기만으로는 배우가 되기 힘들더라구요.”

거대한 절벽 앞에 선 그의 절망을 알 것 같았다. 상어가 되고 싶은 피라미의 심정이 그렇지 않을까. 그 말을 하면서 머리를 깍는 그의 이발기술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는 현미경을 들여다보듯 나의 머리털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깍고 있었다. 사각거리는 경쾌한 가위소리는 그가 어떤 경지에 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노인 이발사가 말을 계속했다.

“저는 그 다음에 춤을 배웠어요. 탱고, 왈츠, 지루박 전부 배웠죠. 춤 경연대회에 가서 일등도 했어요. 춤이라는 게 정말 좋은 것이더라구요. 그렇지만 그게 밥이 되는 건 아니었어요. 그냥 좋아서 배운 거죠. 가난해서 우연히 이발소 급사로 들어섰지만 머리깍는 기술 하나로 승부를 봐야 한다고 마음을 고쳐 잡았어요. 그때부터 저는 다른 꿈은 절대 꾸지 않고 최고의 이발사가 되겠다는 꿈만 꿨어요. 내 나이 지금 칠십인데 아마 나만큼 머리를 많이 깍아본 사람도 없을 겁니다. 어쨌든 나는 대통령이발사까지 된 사람이니까요.”

“대통령 이발사라니요?”

“노무현 대통령이 대통령이 되시기 전까지는 꼭 나한테 와서 머리를 깍으셨으니까요. 노무현대통령은 머리발이 세고 엉망이었어요. 그걸 내가 단정하고 깔끔하게 다듬어 드렸죠. 대통령이 되신 후 나보고 청와대로 들어오라고 하더라구요. 안 갔어요. 내가 왜 갑니까? 이렇게 내 가게를 하면서 자유롭게 죽을 때까지 이 일을 하는 거죠.”

어느새 그가 자르는 나의 머리가 잘 다듬어진 일본 정원같이 정리됐다. 이어서 노인 이발사는 화가들이 그림을 그릴 때 사용하는 길다란 붓을 손에 들고 있었다. 그가 붓을 하얀거품이 담긴 컵 속에 담갔다 꺼내더니 화가들이 이젤위에 있는 자기 작품을 응시하듯 나의 뒷통수를 보고 있었다. 그가 이윽고 손에 든 붓으로 뒷목과 귀 밑에 선을 그리듯 거품을 발랐다. 그가 이어서 거울 앞 선반 위에 놓여있는 묵직한 중량감이 느껴지는 면도칼을 잡았다. 그리고는 옆에 걸려있는 가죽띠에 슥슥 날을 갈았다. 어린 시절 동네이발소의 모습이 그랬었다. 나는 노인 이발사의 다음 얘기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몇 년 전 마누라가 죽고 혼자 살고 있어요. 얼마 전까지 일이 끝나면 콜라텍을 다녔어요. 거기서 술 안먹고 즐겁게 춤추고 놀 수 있으니까요.”

짧은 순간의 대화였지만 그 속에서 노인 이발사의 자유로운 삶이 보였다. 그게 보통 사람들이 걸어야 할 행복한 인생길은 아닐까. 젊은 시절 품었던 꿈이 장애물 앞에 섰을 때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실패를 했을 때 나는 그걸 어떻게 받아들였던가? 누구나 다 일등을 하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싶다. 모두 다 성공하고 싶다. 그렇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 게 세상이었다. 한명이 합격할 때 천명이 떨어져야 하고 한 명이 성공할 때 뒤에는 만명의 실패자가 존재하는게 세상이다. 목표를 바꾸는 건 어떨까. 누구나 다 공부에 일등을 할 수는 없어도 방향만 바꾸면 자기분야에서는 일등이 가능하다. 노인이발사도 그런 경우 아닐까.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거기에 승부를 걸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내 경우는 뒤늦게야 실패는 방향을 바꾸라는 그분의 메시지라는 걸 깨달았다. 세속적으로 말하는 성공과 실패 그게 다일까? 스테이크에 향기롭고 맛있는 소스가 필요하듯이 인생에도 향료가 필요하지 않을까. 내게 즐거움을 주는 오락이 그것 같다. 노인이발사에게 즐거움을 주는 춤은 인생을 부드럽게 하는 윤활유 같아 보였다. 노인 이발사는 스스로 성공과 즐거움을 만끽하는 행복한 노인 같았다. 이발소 문이 닫혔던데 아직 살아있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