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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성경 핵심 공부(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54과) 4

Joyfule 2008. 11. 19. 07:37

인터넷 성경 핵심 공부(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54과) 4 

 룻기(2): 엘리멜렉과 룻(2장)

2. 보아스 스타트(룻 2:8-16(a))

일상의 신앙


룻기에는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말씀하시는 그런 장면이 없다.
다른 성경에는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나님의 사자가 임하여 가라사대"와 같은 방식이 매우 자연스럽게 그 성경의 흐름을 이끌어 나간다.  그런데 룻기에는 꿈이나, 묵시나, 선지자와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내시는 것 같은 그런 의미의 하나님의 직접적 개입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룻기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을 따라 성공적인 삶을 살아간다.  

단 하나의 실패가 있는데, 룻기 1:1-5이다.  잘 보면 거기에는 하나님이 없다.  하나님의 개입은 고사하고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만 등장한다.  그 결과 그들은 철저하게 실패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직접적인 나타나심이 아닌, 그러면서도 묵묵히 당신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 바로 그 하나님의 면전에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유무형의 모든 환경들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것이 룻기가 그려주는 하나님의 일하심과 사람들의 응답이다.  

이것이 일상의 삶으로 열매를 맺어간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잘 생각해 보면 룻기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신앙 방식이나 우리나 그리 차이가 없다.  즉,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너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그런 일이 없어도 우리에게 주어진 일상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살아간다면 -룻기의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우리도 룻기의 사람들처럼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일상의 신앙이다.  

따라서 우리들 역시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허락된 시간 속에서, 그리고 만나는 사건들을 통해, 나의 믿음과 신앙고백을 그 속에 녹여 하나님의 섭리에 응답하며 살아간다면 그것이 룻기처럼 사는 길이고, 그래서 룻기의 사람들처럼 일상의 신앙으로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에 응답하는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것이 룻기가 소개하는 하나님이며, 사람들의 모습이다.   


만남의 기준


이제 무대는 전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하나님은 IS 백성들 가운데 보아스를 주연(主演) 가운데 하나로 택하신다.  보아스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룻과 결혼하라는 그런 말을 듣고 2막에 등장하고 있지 않다.  사실 그런 면에서 볼 때 그가 룻기의 무대에 등장하는 것 자체가 너무나 갑작스러워 보인다.  하나님은 전격적으로 보아스와 룻을 이스라엘 무대 위에 올려 놓으신다.  그런데 이 둘은 서로 너무 이질적이다.  과연 이 두 사람은 감독의 기대에 부응할 것인가.

사실 룻의 케스팅은 역설적으로 IS에게 큰 수치가 아닐 수 없다.  당시 이스라엘은 "이 때에 IS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Jdgs. 21:25)고 평가받았던 어두운 시대였다.  모두가 다 사사기의 어두운 영적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하지만 이방 여인 룻은 신앙의 정도(正道)를 걸어간다.  외로웠을 것이다.  힘에 부쳤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한 분에 대한 확신이 룻에게는 있었다.  하나님은 그 룻을 지금 절망의 세대 이스라엘 앞에 세우시는 것이다.  

8-10절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8절)

룻은 이삭줍기를 해야 할 가난한 이방 사람이다.  그런데 보아스만이 룻이라는 감추어진 보배를 알아본다.  우리가 관심을 갖는 부분은 바로 여기다.  보아스는 달랐다.  그는 전혀 다른 시각에서 인생을 바라본다.  세속적인 기준을 가지고 룻을 살펴보지 않았다.  

세속적인 기준, 혹은 방법들을 어떤 것들인가?  그것은 철저히 자기 중심적이다.  먼저, 상대방을 통해서 무엇인가 이익을 보려고 한다.  준 만큼 받아야 한다(Give & Take)는 식이다.  하나의 거래가 이루어진다.  여기에는 희생도, 헌신도, 수고도 찾아 볼 수 없다.  철저한 실리(實利)의 공식이 있을 뿐이다 : "손해 볼 장사를 왜 해!"

또한, 현재의 모습이 그 기준이 된다.  얼마나 많이 배웠고, 부모 배경이 어떻고, 그러니까 재산-직장-외모-출신(고향) 따위의 외적 요인을 먼저 고려한다.  성품이나 잠재력, 다시 말하면 내적 자질에서 비롯된 미래의 가능성은 일단 우선순위에서 밀려난다.  마치 도박과 같다.  몇 가지 조건들이 서로 맞아 떨어지면 계산기를 두드린다.  막연한 기대와 가능성을 품고 "잘 될거야! 잘 되어야 해!" 정도로 시작한다.  

그러니 잘 될리가 없다.  만약 보아스가 이러한 기준을 가진 현대인이었다면 그는 결코 룻에게 말을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보아스가 왜 이렇게 룻과 대화하고 있는지, 그것이 궁금하다.  그 이유는 다음 11절에서 밝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