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성경 핵심 공부(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54과) 5 룻기(2): 엘리멜렉과 룻(2장)
보아스 스타트
하나님의 작품이 무르익어 간다.
보아스는 마치 신약의 탕자의 아버지처럼 룻을 맞이한다. 룻은 '이삭줍기'로 연명해야 할 하루살이 인생이었다 :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 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Lev. 19:9-10, 23:22, cf, Deut. 24:19-22).
그런데 이미 소천한 시아버지의 친척인 보아스라는 사람의 밭에서 이삭을 줍게 된다. 하나님은 룻의 발걸음 보다 한 걸음 더 앞서셨다. 하나님의 섭리는 이미 시작되었다. 바로 이 부분에서 룻기의 역사는 이미 서서히 반전(反轉)되기 시작했다.
11-13절
보아스란 이름은 '민첩', '재빠름'이라는 뜻이다.
보아스는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괄시하지 않았다. 그는 가난한 자를 사랑으로 배려하는 일에 재빨랐다. 그의 이웃 사랑은 10년이 지나도록 한결같았던 모양이다(2:20). 그것은 부자들에게서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그의 부(富)는 단순히 물질의 많음에 있지 않았다. 그는 주신 부를 적절하게 쓸 줄 알았던 영육(靈肉)이 모두 부요한 사람이다. 보아스는 이처럼 축복하신 하나님의 은총을 가난한 이웃 사람들에게 보답하는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선다.
참 아름다운 사람이다. 이와같은 신앙이 보아스에게 가능했던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보아스는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죄 많은 우리 인생들을 십자가로 품으신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의 은총을 보는 높이까지 성장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축복을 통해 하나님을 보았고, 동시에 이웃을 보았다.
보아스는 룻을 매우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 그럼 보아스는 어떤 사람이길래 이처럼 사람을 볼 수 있는가? 그가 11-12처럼 이야기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네 일이 내게 분명히 들렀느니라."(11절)
사실 보아스는 아버지 살몬과 그의 어머니 -우리는 그녀의 이름을 너무나 잘 안다- 기생 라합(Rahab)의 사이에서 태어났다(Matt. 1:5). 창녀인 라합은 IS 백성들이 정복해야 할 땅인 여리고 성에 거주했으며, 여호수아의 두 정탐꾼을 숨겨 준 댓가로 IS의 보호를 받았다(Josh. 2:1- ). 그녀 또한 그리스도의 족보에 오르는 영광을 맛본다. 보아스는 이미 어머니에게서 탁월한 신앙교육을 받으며 자랐을 것이다. 목숨을 걸고 여리고 전투에서 살아 남은 라합의 신앙은 아들 보아스에게 그대로 이어졌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어머니 모니카의 신앙이 성자 어거스틴을 만들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보아스는 룻이 모압이라는 이방의 여인이라는 것보다, 목숨 걸고 IS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던 룻의 신앙에서 자기 어머니 라합의 신앙을 보았을 것이다. 룻에게서 어머니를 보았고, 더 나아가 자신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았다.
자기 어머니가 IS과 아버지 살몬의 보호와 사랑을 받아서, 그리하여 자신이 오늘 존재하게 된 것처럼 자신의 가까운 친척 나오미의 뒤를 따라 아무 것도 보장이 없는 베들레헴으로 찾아온 룻 또한 자기 어머니 라합처럼 보호 받아야 한다는 은혜를 보답할 줄 아는 넓은 마음을 가졌다. 보아스는 자신의 아버지 살몬이 라합을 받아들였던 것처럼, 자신 또한 이방인 룻을 받아들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려는 차원 높은 신앙의 소유자였다. 보아스에게는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Gal. 3:28)라고 하는 복음이 있었다. 이처럼 복음은 모든 장벽을 뛰어 넘는 능력이다.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12절)
이처럼 철저히 은총 밖에 있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을 때, 아니 일원이 되려고 처벅처벅 빈 손 들고 회개하며 십자가 앞에 설 때 우리는 어떻게 그들을 맞이해야 할 것인가? 다시 말하면 마치 룻기 1장의 룻처럼 교회(그리스도) 밖에 있던 어떤 사람이 룻기 2장의 룻처럼 교회의 일원이 되었을 때 과연 어떻게 그를 맞이해야 할까요? 오늘 무대는 이러한 통찰을 우리에게 갖도록 한다.
우리는 흔히 세상에 대해서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사랑해야 할 대상으로 삼는다. 여기까지는 좋다. 그런데 정작 교회의 도움이 필요해서 곡식 베는 밭에 찾아 온 이삭줍는 사람들에 -신앙공동체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 대해서는 안색하거나 단호하기 그지 없는 모습을 본다.
보아스를 보라. 그는 룻을 멸시하지 않았다. 보아스는 룻을 지역감정으로 대하지도 않았다. 하나님의 시각에서 이해하고 용납하고 있다.
축복의 통로
나는 강도 만난 이웃을 지나친 레위인인가?
아니면 사마리아인인가? 그런데 현대인의 문제는 그들 스스로 아무도 사마리아인이 되려고는 하지 않고, 사마리아인을 만나기만을 소원한다는데 있다.
14-16절
"식사할 때에."(14절)
그러나 보아스를 보라. 섬세하고 자상한 아버지와 같은 모습이다. 보아스의 모습은 단순한 동정 그 이상이었다. 왜냐?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며"(14절)에서처럼 룻이 이방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식사의 교제 안으로 과감하게 초청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볼 때 이 점은 더욱 확실하다. 그렇다. 이것이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의 모습인 것이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Matt. 25:40)
한편 이방인에 대한 주님의 표현을 살펴보면 우리는 보아스의 룻에 대한 태도가 얼마나 높고, 깊은 차원인가를 발견하게 된다. 예수님은 언젠가 이방 수로보니게 여인과의 대화(Matt. 15:21-28)에서 그녀를 향하여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26절)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가나안 여인 = 개'라는 식으로 말씀한 완벽한 경멸의 언어였다. 어떻든 이방인은 상종하는 것 자체가 금기(禁忌)시 된 것이 당시의 풍습이었다. 그런데도 보아스는 이방 여인 룻을 '식탁공동체' 안으로 부르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아스는 OT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그림자라고 감히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왜냐?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였기 때문이다.
부스러기 묵상
아름다운 만남을 원하는가?
보아스만 만나려 하지 말고 룻처럼 준비하라! 룻만 만나려 하지 말고 보아스처럼 준비하라! 그러나 사랑하는 것만큼 그 댓가를 지불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많은 경우에 "어떤 배우자를 원하십니까?" 물으면 이렇게 대답한다 : "다른 것 다 보지 않고 믿음만 있으면 되요!" 그런데 정말 그런가? 솔직히 자수하여 광명 찾자. 아니죠? 믿음은 기본이고, 다른 여러 가지 조건들을 추가시키죠? 아닌가요? 사실 처음에는 그런 줄 알고 많이 소개했는데 아니더라구요. 그래 이제는 속지 않아요. 우리의 관심은 보아스를 찾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보아스로 세워가는 것이다. 그러지 않으니까 룻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보아스를 보라. 그리고 룻을 보라. 이들은 겉 포장지를 보지 않았다. 이들은 속사람을 보았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큼 상대방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서로 나누는 대화를 들으면서 우리 안에도 이런 사랑이 주님과 새롭게 시작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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