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성경 핵심 공부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109-1과)2 |
선지서 개론 (3) : 선지자의 기능 B |
다. 상징적 행위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함에 있어서 예언자들은 그들이 전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다양한 수단을 사용하였다. 그 중에 하나가 상징적인 행위이다. 그들은 그들이 전하기를 원했던 진리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그들 스스로가 그것을 행하거나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행하도록 했다. 예를 들면, 엘리사는 어느 날 이스라엘의 왕 여호아하스에게 창문 밖으로 화살을 쏘라고 말했다. 왕이 그렇게 하자, 엘리사는 다음과 같은 상징적인 말을 했다. "이는 여호와의 구원의 살, 곧 아람에 대한 구원의 살이니, 왕이 아람 사람을 진멸하도록 아벡에서 치리이다(왕하 13:17)." 엘리사는 계속해서 왕에게 화살을 취하여 땅을 치라고 말했다. 이에 왕은 화살을 취하여 땅을 세 번 쳤다. 그런데 이것이 선지자를 노하게 만들었다. 엘리사는 왕이 땅을 세 번만 쳤기 때문에, 그가 아람을 세 번만 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왕하 13:18-19). 여기에서 화살로 땅을 치는 것은 여호아하스가 그의 원수인 아람을 치는 횟수를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었다. 하나님은 앗수르 군대가 지중해 연안에서 아스돗을 칠 때에 이사야에게 그 몸에서 베를 풀고, 그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행위는 "애굽의 포로와 구스의 사로잡힌 자가 앗수르 왕에게 끌려갈 때에 젊은 자나 늙은 자가 다 벗은 몸, 벗은 발로 볼기까지 드러내어 애굽의 수치를(사 20:4)" 드러낼 것을 상징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사야의 상징적인 행동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애굽과 동맹을 맺는 것을 경고하기 위해 취해진 행동이었다. 어느 날 예레미야는 질그릇을 가지고 힌놈 골짜기로 갔다. 그는 그 곳에서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그들이 저지르고 있는 죄에 대하여 경고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다. 그리고 그는 그들 앞에서 질그릇을 깨뜨렸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사람이 토기장이의 그릇을 한 번 깨뜨리면 다시 완전하게 할 수 없나니, 이와 같이 이 백성과 이 성을 파하리니, 그들을 매장할 자리가 없도록 도벳에 장사하리라(렘 19:11)." 산산조각이 난 질그릇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이스라엘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상징들은 선지자의 메지시를 인상깊게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또 다른 경우에 예레미야는 상징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레갑 족속의 경우를 인용했다. 레갑 족속의 관습 중 하나는 포도주를 멀리하는 것이었다.
예레미야는 레갑 족속을 성전에 데려다가 그들 앞에 포도주 항아리를 놓고 그것을 마시라고 권했다. 그러나 레갑 족속들은 조상의 원칙에 충실했기 때문에, 그 포도주를 마시기를 거부했다. 그러자 예레미야는 그들의 순종을 제시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와 같이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율법을 충실히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여기에서 레갑 족속은 법을 성실하게 지키는 모델로 제시되었다. 에스겔 역시 그의 예언을 강조하기 위해서 상징을 사용하였다. 어느 날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반석 위에 예루살렘이 포위당하는 그림을 그렸는데, 이것은 그 포위가 반드시 일어날 것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었다(겔 4:1-3). 또 다른 경우에 에스겔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머리와 수염을 밀고, 그것들 중에서 약감은 태우고, 약간은 바람에 날려버렸다(겔 5:1-2). 이것이 상징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도 역시 불태움과 탈취와 흩어짐을 당할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상징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호세아가 그의 아내 고맬과 혼인한 것일 것이다.어느 날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이 여인과 혼인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녀가 "음란한 여인"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호 1:2). 호세아는 고멜과 혼인하였고,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과 같이 그녀는 음란한 자녀들을 낳았다. 그런데 그 자녀들의 이름도 역시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첫 번째 아들의 이름은 이스르엘로 지었는데,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고, 이스라엘 족속의 나라를 폐할 것"을 상징하였다(호 1:4). 두 번째 아이의 이름은 로루하마(긍휼을 받지 못한다는 뜻)로서, 이는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사하지 않을 것"을 의미하였다(호 1:6). 세 번째 아이의 이름은 로암미(내 백성이 아니라는 뜻)였는데, 이는 이스라엘이 그 죄로 인해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으로 간주되지 못할 것을 의미하였다(호 1:9). 후에 고멜은 그녀의 음행으로 말미암아 그녀의 아비 집으로 돌아갔다. 얼마 후에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가서 다시 한 번 그녀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호 3:1-3). 이것은 호세아의 경험의 관점에서 보아서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는 순종하였다. 고메리 그에게로 돌아왔을 때에, 그는 그녀가 처음 그에게 왔을 때의 생활 방식을 계속하지 못하도록 강력하게 경고하였다. 호세아가 고멜을 아내로 맞이했으나 그녀는 그에게 불성실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셨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대해 불성실했다. 또하 고멜이 호세아를 떠나서 그녀의 다른 정부에게로 갔던 것과 같이,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의 거짓 신들을 추구했다. 또한 호세아가 그녀의 불성실에도 불구하고 고멜을 다시 그의 아내로 취한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그 백성을 다시 자신에게로 되돌리셨다. 라. 시각적 교훈들 예언자들이 도입한 또 다른 문학적 수단은 시각을 통한 교훈이었는데, 예언자의 눈에 비친 어떤 물질이나 행위는 그의 마음에 한 진리를 설명해 주었다. 그는 진리를 더욱 강조해서 표현하기 위해서 그러한 물질이나 행위를 상징적으로 사용하였다. 아마도 예레미야는 이러한 수단을 가장 많이 사용한 예언자일 것이다. 예를 들면, 어느 날 예레미야는 "살구나무 가지"(렘 1;11)를 보았는데, 하나님께서는 즉시 그에게 "네가 잘 보았도다.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히브리어로 살구 나무, 즉 "샤켇"은 동시에 "주의를 기울여 지킨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에레미야는 이처럼 어린 살구 나무 가지를 보았을 때에,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 대한 경고의 말씀을 지키실 것이라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깨닫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에게 말씀하신 바, 심판의 경고가 그 백성에게 임하도록 반드시 이루실 것이다. 잠시 후에 예레미야는 그 면이 북에서부터 기울어진 끓는 가마를 보았다(렘 1:13-14).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상징을 통해서 다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재앙이 북방에서 일어나 이 땅의 모든 거민에게 임하리라!" 끓는 가마는 환난과 곤고를 의미하였다. 그것이 북에서 기울어진 것은 그 환난이 북으로부터 임할 것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북쪽의 방향을 특별히 지적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기 위해 도구로 사용하실 바벨론이 북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칠 것이다. 물론 바벨론은 팔레스타인의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길은 유프라테스 강과 비옥한 초승달 지역을 따라 가다가 북쪽으로 팔레스타인을 지나 예루살렘에 이른다.
예베미야는 또 베띠를 사용하는 시작적 교훈을 사용하였다(렘 13:1-11).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베띠를 사서 그것을 잠시 동안 허리에 띠었다가, 씻지 말고 유프라테스 강에 가서 그것을 바위 틈에 감추라고 말씀하셨다(렘 13:4). 예레미야가 그렇게 하자, 하나님께서 다시 그에게 유프라테스 강에 가서 그 띠를 다시 찾아서 팔레스타인 땅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셨다. 예레미야가 다시 그 띠를 찾았을 때에 그것은 이미 썩어 있었다. 그때에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큰 교만을 이같이 썩게 하리라!"(렘 13:9) 이것이 상징하는 것은 유다가 바벨론 땅으로 포로로 잡혀갈 것을 의미한다. 예레미야가 며칠 동안 띠를 허리에 띠었다가 땅에 묻은 것은 유다 백성이 잠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가, 죄와 함께 땅에 묻힐 것을 의미한다. 예레미야가 띠를 유프라테스 강에 가지고 간 것은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을 유프라테스 강이 있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가게 하실 것을 상징했다. 그러나 예레미야가 다시 유프라테스 강에 가서 그 띠를 가져온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얼마 후에 바벨론에 있는 자기 백성에게로 가셔서 그들을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이다. 어떤 주석가들은 유프라테스 강이 예레미야가 단순히 띠를 묻고 다시 그것을 가지러 가기 위해서 두 번이나 가기에는 너무 멀기 때문에, 이 사실을 부인한다. 물론 그 거리가 먼 것은 사실이지만-그 강에 이르기 위해서는 최소한 250마일을 가야한다-그 곳에 두 번씩이나 갔다는 사실은 그것이 상징하는 것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유다 백성들은 그들의 묻혀진 죄에 대한 심판 때문에 바로 이만큼 떨어진 곳으로 사로 잡혀가게 될 것이다.
예레미야는 토기장이의 집을 방문했을 때에 또 다른 시각적 교훈을 발견했다(렘 18:1-10). 그는 토기장이가 녹로로 그릇을 만드는 것을 보았다. 그 후에 그는 다시 토기장이가 그릇을 깨뜨려서 더 좋은 그릇을 만드는 것을 보았다. 이러한 상징을 통해서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하신 교훈은 무엇인가? 그것은 토기장이가 깨진 그릇을 가지고 더 좋은 그릇을 만드는 것처럼 하나님도 파멸된 이스라엘을 가지고 더 좋은 백성으로 만드실 권한이 잇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또한 이러한 상징은 포로가 된 이스라엘이 장차 다시 돌아오게 된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은 당시에 하나님의 눈에 깨진 그릇과 같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장차 그들을 유배 생활을 통해서 그들의 교만을 깨뜨리신 후에 다시 더 좋은 그릇으로 만드실 것이다. 마지막으로 살펴보아야 할 경우는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전 앞에서 두 광주리의 무화과를 본 것이었다(렘 24:1-10). 그런데 한 광주리에는 처음 익은듯한 좋은 무화과가 있었고, 다른 광주리에는 악하여 먹을 수 없는 극히 악한 무화과가" 있었다(렘 24:2). 좋은 무화과는 "처음 익은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것은 첫 번째 추수(6월 말경)에서 얻어진 것으로 가장 귀한 열매였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보여준 상징은 유배에 관한 것이었다. 이번에는 약간 다른 의미에서 그 상징이 제시되고 있다. 그 차이점은 바로 예레미야가 무화과를 본 정확한 때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은 여호야긴이 포로로 잡혀간 직후의 일이었다(주전 597년). 그 당시에는 시드기야가 유다의 왕 위에 앉아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좋은 무화과는 이제 막 사로 잡혀간 자들을 의미한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로 잡혀간 자들을 좋은 열매로 여기셨기 때문에, 때가 이르면 그들을 다시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세우고 허물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을 심고 뽑지 아니할 것이다(렘 24:6). 그 결과로 그들은 하나님을 알게 되는 새로운 마음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나쁜 무화과는 이스기야의 지도 라애 유대에 남아 있는 백성들을 의미한다고 말씀하셨다. 잡혀간 자들과는 대조적으로 그들은 그 곳에 남아서 어려움을 겪을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흩으실 모든 곳에서 치욕을 당하고 말거리가 되며, 조롱과 저주를 받게 될 것이다(렘 24:9). 다시 말해서 포로로 잡혀간 자들에게는 그 땅에 남아 있는 자들보다 더 큰 축복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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