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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성경 핵심 공부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76과)6

Joyfule 2009. 6. 10. 20:04

인터넷 성경 핵심 공부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76과)6

에스라-느헤미야(3): 느헤미야 (1-13장)

 

11. 정경적 의미

 11-1. 하나님의 집

 

  에스라-느헤미야서의 하나님의 집의 개념은 신약 시대의 "하나님 나라와 성전"의 이해로 나아가는 중간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신약 학자들은 예수의 선포에 있어서 하나님 나라는 하나의 "집"으로 그려져 있다고 주장한다. 김세윤 박사는 예수의 가르침에서 하나님은 보통 "아버지"로 지칭되고, 하나님 나라를 "대문"(마 7:13, 눅 13:24), "문"(눅 13:24 이하), "열쇠"(마 16:19, 23:13, 눅 11:52) 등이 사용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함께 쓰이는 동사는 "들어가다"이며, "잔치"(식탁의 교제)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김세윤 박사는 이러한 점에 근거하여 예수에게 있어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집에서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잔치를 배설하고, 그이 백성은 자녀가 되어 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서 잔치 상에 둘러 앉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김세윤 박사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하나니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왕좌가 놓인 하나님의 집으로 들어가서 하나님과 잔치의 교제를 나눈 성전" 연결시켰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예수님으 하나님 나라를 성전으로 인식하고, 그 성전을 구체적으로 자신이 세울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로 보았다. 이러한 사실은 "성전과 백성과 예루살렘 성벽"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집의 재건을 하나님 나라의 회복으로 본 에스라-느헤미야서의 메시지의 연속선상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1-2. "이미"와 "아직 아니"의 종말론

 

  포로기는 황폐한 시대였던 동시에 회복의 시대였다. 이미(already) 포로기는 회복의 영에 의해 영적인 변형이 일어난 시기였다. 따라서 반 게메렌은 "분명히 새 언약의 시대는 이미 포로 후기에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을 고토로 돌리셨으며, 스룹바벨을 통해 성전을 복구하고, 여호수아가 제사장이 되어 성전에서 제사를 드렸으며, 율법을 포로 후 공동체의 삶의 규례로 재확립하고, 성벽을 재건하신 일을 통해서  확실히 알 수 있다.

 

물론 이것들은 회복의 표징들로서는 작을지 몰라도 무시될 수 없는 것들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종말(에스카톤)의 현재적 표징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포로 후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신이 이미 그들 안에 역사를 시작하셨다고 강하게 선언한 것도 이에 근거한 것이었다.

 

  학개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신이 오히려 너희 중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학 2:5)." 학개는 과거 출애굽 때에 나타난 하나님의 임재와 권능을 한 마디로 "나의 신"이란 말로 요약하고 있다. 이 신이 포로 후 공동체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더 이상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포로 전 선지자들이 여호와의 신의 역사를 미래로 돌린 것과 비교해보면 특기할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 건축을 감당한 것은 여호와의 신의 강한 감동때문이었다.

이는 다음 구절이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여호와께서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의 마음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마음과 남은 바 모든 백성의 마음을 흥분시키시매 그들이 와서 만군의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의 전 역사를 하였으니(학 1:14)...." 지도자들과 일반 백성의 마음은 이들의 영적인 변화와 성령의 역사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을 바벨론 포로라는 형벌로 다스리고 정결케 한 후에, 다시 회복시키시며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게 하는 일은 결코 인간의 힘으로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는 나의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죄느니라(슥 4:6)." 스가랴는 회복의 사건이 인간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신으로만 가능하다고 선포했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실현된 종말론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남은 자들은 새 시대의 입구에 서서 회복을 미리 맛보면서 하나님의 약속이 보다 크게 성취될 때를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포로 후 시기가 회복의 시기요 새 언약의 시대의 시작인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은 완전한 성취의 시기가 이르지는 않았다(not yet). 유다인들은 일부 약속들의 실현을 체험하기는 했지만, 그 약속이 온전한 성취는 여전히 미래의 일이었다. 포로 후 공동체는 여전히 이방 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는 것이 이를 말해준다. 느헤미야의 기도에는 "땅 안에서의 자유라는 하나님의 약속과 이방 왕에게 복종해야 하는 현재의 상황 사이에 참을 수 없는 모순"이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느 9:34-37).

 

그러나 포로 후 공동체는 아직 이방 왕에게 복종해야 하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미래의 소망을 가지고 현재의 상황을 신실하게 수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것이 바로 참된 신앙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느헤미야는 단번의 회개와 개혁으로 모든 것이 갑자기 변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우리가 이 모든 일을 인하여 이제 견고한 언약을 세워 기록하고 우리의 방백들과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이 다 인을 치나이다 하였느니라(느 9:38)." 미래의 소망을 가지고 현재의 삶을 신실하게 수용하는 모습을 이보다 더 분명히 보여주는 구절은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구약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과거의 구원 행위와 하나님의 미래의 구원 행위 사이에서, 즉 현재와 미래 실제가 주는 긴장 가운데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예수의 재림 시기, 성취의 시대를 고대하였던 신약 시대 신자들(살전 1:10)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점에서 구약은 율법 시대, 신약은 은혜 시대라고 구분하는 것이 반드시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포로 후기 공동체는 하나님의 임재가 주는 축복을 어느 정도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임재의 최종적인 완성을 앞당길 책임을 지고 있었다. 온전한 의미에서 회복의 새 공동체는 아직 임하지 않았다. 따라서 신약의 신자들 역시 포로 후기 공동체의 이스라엘인들과 유사하게, 성취와 약속의 긴장 가운데서 최종적인 구원의 완성을 기다리면서 믿음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

 

구약은 예언이고 신약은 성취라는 도식 하에서 구약의 하나님 나라 도래의 약속은 오직 신약 성경에서만 성취되었다고 보는 것은 큰 오류이다. 왜냐하면 구약과 신약이 모두 다 하나님 나라의 침투와, 하나님의 현재적-미래적 사역을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와 미래가 중첩되어 미래가 현재 위에 그림자를 던져주는 이중 구조는 구약과 신약에 모두 적용된다. 물론 구약과 신약은 항상 연속성만 있는 것은 아니다. 구약과 신약 사이에는 근원적인 불연속적인 요소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불연속성은 연속성의 흐름 안에서, 하나님의 점진적인 계획이 실행되는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약속은 구속사의 진전에 따라 점점 더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며,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것을 더 충분히 향유하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포로 후 공동체가 향유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는 포로 전기 백성들보다 더 많았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현재의 약속 성취는 포로후 공동체 시대보다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자기 백성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고, 하나님 아버지의 부요함을 상속받게 하고, 자기 몸으로 새로운 성전을 삼으신 것은 에스라-느헤미야서에서는 상상 할 수 없는 큰 은혜라고 할 수 있다.

                                - 에스라-느헤미야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