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관 자료 ━━/인터넷성경

제 20 장. 승 리 - 예수께서 친구들과 재회하심

Joyfule 2007. 10. 14. 23:56

제 20 장. 승 리

예수께서 친구들과 재회하심

이제 우리는 부활의 실제성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나타니심에 대한 기록으로 넘어가기로 한다.예수님께서 죽으신 후 그를 처음 본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였다(요20:1.11,마28:19 참조).세상에서 생겼던 가장 중대한 소식,인류의 전생활을 변화시키고 왕좌를 무너뜨리며 나라에 혁명을 일으킬 소식,오늘날에도 여전히 온 세상을 영원한 소망으로 감싸며 부활주일 아침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새로운 감동을 주는 소식을 제일 먼저 한 보잘것없는 비천한 여인에게, 일곱 귀신이 그에게서 나갔던 여인,용서받은 마음 외에는 그녀를 눈에 띄게 할 아무 것도 못했던,그리고 그녀의 사랑 외엔 아무 권리도 갖지 못했던 여인에게 주어졌다.

 

막달라 마리아는 동이 트기 전 예수님의 죽은 시체 곁에 앉아 있기라도 하려고 나왔다. 그녀는 죽은 시체 외에는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다는 말을 속으로 되풀이하고 있었다. 예수님의 음성은 이제 다시는 들리지 않을 것이며 그 눈빛은 더 이상 빛나지 않으리라. 생명을 주던 그 영혼은 영원히 사라져 버렸으며 남은 것은 그의 죽은 시체 뿐, 사랑과 감사 도착했을 때는 그 시체마저 간 곳이 없었다.

이 순간은 그녀의 처절함이 극에 달한 순간이었다.[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눈물에 가리워 그녀의 눈은 곁에 서계신 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녀는 알아 보았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하니라(이는 선생님이라)].그녀가 구함을 받고 용서받은 것이 컸던 만큼 그녀의 사랑도 지극했다. 예수님은 언제나 그를 가장 사랑하는 자에게 나타나신다.

 

누가는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의 그리스도에 관한 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눅 24;13이하).우리 생에서 생길 수 있는 모든 실망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실망만큼 심한 것은 없다.

황혼의 햇살은 맞으며 고향으로 돌아가던 [글로바]와 그 친구의 마음을 무겁게 하고 있던 실망이 바로 이러한 실망이었다. 그들은 상심하여 사라져버린 희망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행복했던 때의 추억이 그들의 마음 속에 밀려들었다. 그렇게 젊고 강하고 확고하며 하나님 같았던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그들은 이 사람이 장차 오실 왕이며 수만 영혼의 지도자라고 확신했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이제 그 기대는 실망과 비탄,그리고 후회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종종 인간들이 그가 영원히 가고 없다고 생각하는 그때 가장 가까운 곳에 계신다. 그들이 도중에서 자기들과 동행하게 된 낯선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동안 그들의 마음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거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은 여행의 목적에 도착하였다.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는 길이 그날밤 처럼 가까왔던 때는 예전엔 없었다.같이 가는 동안 그들의 우울을 그렇게 신비하게 달래주고 즐거움을 싹트게 하였던 그 낯선 사람과 그냥 헤어지기가 어려웠다. 그 어떤 것에 이끌려 그들은 조금 더 함께 있고 싶어서 식사에 초대했다.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그가 떡을 떼실 때의 낯익은 행동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빵을 드실때 못자국이 나 있는 그의 손 때문이었을까?아니면 빵을 드실 때 못자국이 나 있는 그의 손 때문이었을까? 그 무엇 때문이었던 간에 그들 눈앞에 드리워져 있던 휘장이 찢어졌으며 그들은 예수를 알아보고 불렀다.

 

같은 날 밤 예루살렘에서는 지도자 없이 방황하던 제자들이 그들의 선생과 재회하게 되었다.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셨더라](요20:19,비교 눅 24:36)그 중요한 순간에 제자들 중 두사람, 유다와 도마가 빠져 있었다.

사도행전의 신중하고 엄숙한 표현을 빌리면 유다는 [제곳으로]갔다(행1:35).그러나 도마는 어디에 있었는가? 틀림없이 그런 자신의 깊은 슬픔을 생각하면서 동료 제자들과 함께 있는 것까지도 견딜 수 없어진 나머지 어둠 속에서 혼자 배회하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인적 없는 갈보리의 언덕 길을 걷고 있었을런지 모른다.

그 다음날 아침 베드로와 요한이 얼굴에 새로운 빛을 띠고 그를 만나 그 놀라운 소식을 알려 주었을 때 그는 그들을 슬픈 빛으로 바라보며 그들이 잘못 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일주일 후에 그는 그 다락방에 있었다. 그러고 언제나 정직한 의심에 대해서는 오래 참으시는 예수님께서 스스로 자신을 나타내신 것은 특별히 헤매고 있는 그의 제자 한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

도마는 이제 다른 제자들이 보았던 것을 스스로 보았으며 그들이 체험했던 것을 체험하게 되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는 외침과 함께 도마는 한밤중같이 어두웠던 의심을 그의 마음에서 쓸어버렸다.

 

부활하신 주님의 나타나심에 대한 복음서 기자들의 이야기를 읽을 때 우리는 이 남녀들이 목격했던 예수님은 확실히 예전에 그들이 알았던 사랑하던 바로 그 선생님이었으나 그럼에도 어떤 차이가 있다는 주목할만한 사실을 느끼게 된다. 이제 예수님과 그들 사이에는 어떤 격의가 있었다. [나를 만지지 말라고 그는 말씀하시었다(요20:17).

그것은 사이가 멀어진 것이라고 불리울 수는 없었으나 적어도 그들과의 교제에 있어서 한장이 닫히고 새로운 장,더 높은 차원의 교제가 시작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통상적인 시공간의 제한에 그는 더 이상 매이지 않으셨다. 그는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그들에게 오시고 또한 가셨다(눅 24;36,요20:19).동산에서의 막달라 마리아나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이야기에서 이미 살핀대로 그를 알아보는 것이 언제나 즉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그들이 예수를 뵈옵고...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마28:17).[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저희에게 나타나시리니](막16:1-) [저희가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눅24:37).[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요21:4). 그는 동일하셨으나 또한 달라지시기도 하셨다.

그는 여전히 에전에 갈릴리의 밀밭 사이를 그와 함께 걷고 밤이면 함께 노숙하던 자들의 친구이셨으며, 들의 백합화나 공중의 새들로부터,멍에나 쟁기,촛불,그리고 놀면서 외쳐대는 어린 아이들로부터 잊지 못할 교훈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시던 선생이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어떤 변화를 의식했다. 그러나 그들이 그것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 그것은 다만 기대되었던 것에 지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갈보리에서의 죽음이 그를 그들에게서 앝아간 이래 그는 긴 여행중에 계셨기 때문이었다.

그는 누구라도 한번 가면 다시 그 장벽을 넘을 수 없는 미지의 나라에서부터 돌아오셨던 것이다. 그 미지의 나라의 숨결이 그 의 주위에 가득했다. 그는 더 이상 좁고 시공간의 제한을 받는 물질세게에 속하시지 않으셨다. 그는 더 넓고 높은 세계,그 홀로 참되며 영원한 영의 세계에 속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