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과 신앙고백
Ⅲ. 개혁파 교회의 신앙고백
개혁파 교회와 신학은 스위스의 접경인 독일 남부지방의 도시로부터 시작되어 불란서, 베르기(화란), 스코틀랜드, 웨일즈, 영국, 독일의 라인강 하류지방과 불란서와의 접경지역,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등 동∙서 유럽의 여러나라로 퍼지게 되었다. 이 여러나라와 지방의 교회들이 스위스에서 활동한 종교개혁가 쯔빙글리와 칼빈의 영향을 받았고 그들 나름대로의 자기들이 형성한 신앙고백을 가졌다. 시일이 지나면서 이 교회들은 여러 신앙고백서 가운데서 보다 훌륭하게 작성된 신앙고백서를 그들의 신앙고백서로 채택했다. 개혁파 교회는 이와 같은 다양한 신앙고백서를 갖게 되었는데 이러한 다양성 속에서도 그들의 가장 중요한 골격은 성경말씀 이었다. 그래서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슬로건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된 것이었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16세기에 나온 신앙고백서 가운데 중요한 것을 들어 보자면 제일 먼저나온 것은 『쯔빙글리의 67개 조항』을 들 수 있다. 이어서 1528년에는 『베른 신조』가 나왔고 루터교회의 아우그스부르그 신앙고백서가 나온 바로 같은 해에 1530년에는 독일 남주의 도시에서 공동으로 펴낸 『4개 도시 신앙고백』이 나왔다. 1534년에는 바젤에서 『바젤 제1신앙고백』이 나왔고 1536년에는 제2바젤 신앙고백이라고도 하는 『제1 스위스 신앙고백』이 나왔으며 같은 해에 『로잔 신조』와 『제네바 신앙고백』이 나왔다. 1559년에 불란서의 『프랑스 신앙고백』이 1560년에는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이, 1561년에는 『벨직 신앙고백』이 나왔으며 1566년에는 『제2 스위스 신앙고백』이 나왔다. 개혁파 교회에서 널리 신앙 고백서로 채택하고 있는 하이델베르그 요리 문답서는 1563년에 나왔다. 장로교회의 신앙고백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종교개혁 다음 세기인 1647년에 나온 것이었다.
매우 중요한 신앙 문서들은 다음과 같다.
1. 쯔빙글리의 67개 조항(1523년)
쯔빙글리의 67개 조항은 루터가 1517년 비텐베르크 성문 앞에 고시한 95개 조항의 항의문과 그 형식이나 역사적인 의미에 있어서 비슷한 점이 있다. 루터의 95개 조항으로 독일에서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난 것처럼 스위스에서는 쯔빙글리의 67개 조항과 더불어 종교개혁운동이 시작되었다. 1523년 1월 29일 쮸리히와 근교의 시민들과 목사 및 신학자 6백명이 시의회가 개최한 신학 토론회에 참석하였다. 쯔빙글리는 그가 잘성한 67개 조항을 제시하여 자기의 가르침이 성경에 근거한 것임을 역설하고 성경에 근거하여서만 비판을 받을 용의가 있음을 천명하였다.
쯔빙글리는 1523년 7월에 67개 조항의 해설서를 써내었다. 그리고 그 해 10월 말에 열린 제 2차 신학 토론에서는 교회당의 성상이나 그림을 제거하도록 결정하고 예배를 지방어로 드리며 미사도 본래의 의미대로, 말하자면 성찬 예배로 드리도록 결정하였다. 1524년 1월, 제 3차 신학토론회가 열렸는데 여기서 쮸리히의 종교개혁 운동은 공고히 터전을 잡게 되었다.
쯔빙글리의 67개 조항에서 개혁교회의 신학적인 전통을 이룬 몇가지 특징들을 엿 볼 수 있다.
가령 서문과 결론에서 성경 말씀의 중요성을 강조한 점이 그러하다. 이것은 루터교의 신앙고백서와는 다른 전통의 특징이라고 본다.
2. 베른신조(1528년)
베른은 1848년에 스위스 연방국의 수도가 된 도시인데 도시를 중심한 칸톤(州)도 베른이라고 한다.
1527년 11월에 할러와 그의 동역자 프란쯔 콜프(Franz Kolf)는 10개 조항의 신조를 작성하여 그것을 쮸리히로 보내어 쯔빙글리의 동의를 얻는 한편 거기서 인쇄를 하도록 하였다. 이 신조는 1528년 1월 6일 26일까지 열린 신학 토론회에 제출되어 토의되었다.
로마 가톨릭의 신학자들은 별로 참석하지 못했으나 개신교 측에서는 쮸리히, 바젤 및 남부 독일의 여러 지역에서 쯔빙글리를 비롯하여 부쩌, 카피토, 외콜람파디우스 등 당대의 이름 있는 개혁자들이 먼 길을 와서 참석하였다. 10개의 조항을 가지고 20일이나 걸려 읽고 토론하였다.
베른 신조는 참석자의 대다수의 동의를 얻고 시의회에서는 만장일치의 승인을 얻어 2월 7일 종교개혁을 선포하는 칙령과 함께 공포되었다. 따라서 그날로 미사와 교회 안에 있는 제단과 성상(聖像)등을 철폐하고 쮸리히를 본받아 개신교회식 예배를 보도록 하였다.
베른의 신조가 영구보존 할만한 신조는 되지 못했으나 독일어 사용 지역에서 내놓은 고전적인 신앙고백에 속한다.
3. 제 1 스위스 신앙고백(1534년)
1536년의 제 1 스위스 신앙고백을 일컬어 제 2 바아젤 신앙고백이라고도 한다.
제 1 바아젤 신앙고백은 1534년에 나온 것인데 한국장로교회의 12신조 만큼의 분량으로 12조항으로 간단히 쓴 신조이다. 바젤에서 개혁 운동을 한 사람으로는 울프강, 카피토, 카스파르 헤디어(Caspar Hedio), 빌헬름, 루위플린(Roublin), 외콜람파디우스(Oecolampadius)등을 들 수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바아젤의 종교개혁은 1529년 2월 9일 미사를 폐지하고 성상을 제거하며 수녀원을 폐쇄함과 동시에 단행되었다.
4월에는 교회 헌법을 새로 제정하여 교리와 예배모범과 권징조례에 큰 변화를 초래하였다. 1531년 9월 외콜람파디우스가 죽기 두어달 전에 그가 기초한 신앙고백을 그의 후계자 오스왈드 미코니우스가 수정한 본문에 바아젤의 시장이 서언을 붙여 내놓은 것이 제일 바아젤 신앙고백이었다.
바아젤에서 두 번째로 나온 신앙고백서를 제 1 스위스 신앙고백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부를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이 신앙고백이 나오기 이전까지는 쮸리히, 베른, 바아젤 등의 도시가 제가끔 독자적으로 신앙고백을 가졌었다. 그러다가 제 1 스위스 신앙고백을 내놓으면서 스위스의 독일어 사용 지방의 신앙고백을 통일한 것이었다.
쯔빙글리의 후계자 불링거, 그리네우스와 미코니우스 외에 두어명이 신앙 고백서 기초자로 선정되었다. 부쩌와 카피토는 기초 위원은 아니었으나, 신앙고백을 작성하는데, 특히 성만찬에 관한 조항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신앙고백은 먼저 라틴어로 쓰고 이어서 독일어로 번역했는데 둘 다 같은 권위로 받아들였다. 1537년 3월 27일 대표들이 바아젤에 다시금 모여 만장일치로 신앙고백을 채택하였다. 이 신앙고백서는 독일어를 사용하는 스위스 교회들의 일치운동에 공헌했으며 1566년의 스위스 제 2 고백서의 기초가 되었다.
이 신앙고백서는 본래는 28개조로 된 것이었으나 독일어로 쓰면서 27개조로 고쳤다. 성경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개혁주의 신앙의 특징이 잘 나타나 보이고 있다.
4. 제네바 요리 문답(The Geneva Catechism, 1541).
칼빈이 제네바로부터 부름을 받아서 성도들을 교육하기 위해 1537년 작성한 신앙 교육용 요리 문답을 수정․증보한 것으로, 그의 책 「기독교 강요」를 요약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 문서는 1559년 프랑스 신앙 고백서의 기초가 되었으며, 핵심 주제들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특징이다.
5. 프랑스 갈리칸 신앙 고백(Gallican Confession, 1559).
박해받는 프랑스 위그노들이 칼빈의 제네바 신앙 고백을 기초로 하여 약간 수정한 문서이다. 오래 지속된 박해로 인해서 프랑스 위그노들의 힘은 크지 못하였으나, 그러한 악조건 가운데서도 순수하고 깨끗한 신앙의 정신을 따라 가기로 결의한 놀라운 의지가 담겨 있다.
6. 스코틀랜드 신앙고백(The Scots Confession, 1560).
스코틀랜드 최초의 신앙 고백으로, 요한 낙스와 다 섯명의 목사들에 의해서 작성되었다. 낙스가 유럽에서 경험한 것들이 반영되었고, 하나님과 창조, 성육신과 예정과 십자가, 불가시적인 교회관, 참된 교회의 세 가지 표지로서 말씀의 선포, 성례의 시행, 권징의 실시를 규정하고 있다.
7. 벨직 신앙 고백서(Belgic Confession, 1561).
홀란드에서 가이드브레(Guido de Bres, 1522-67)가 작성한 것으로, 그 내용은 프랑스에서 나온 갈리칸 신앙 고백과 매우 유사하며, 유럽 북서부의 저지대 국가들에서 박해받던 성도들을 위해서 쓴 변증서이다. 이 문서는 1619년 돌트 총회에서 네덜란드 교회의 신앙 고백으로 받아들이기로 공식적으로 채택되었다.
8.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The Heidelberg Catechism, 1563).
우르시누스(Zacharias Ursinus, 1536-83)와 카스파르 올레비아누스(Caspar Olevianus, 1536-87)에 의해서 작성된 이 문서는, 독일 남부 팔라티네 지방의 군주의 요청에 다른 것이다. 성찬에 관한 교리는 분명히 개혁주의를 따르고 있지만, 몇 가지 교리는 루터파와 개혁주의의 중간 노선을 취하는 것도 있다. 칼빈이 이 문서를 검토한 후 극찬할 만큼, 아주 간단하고 명료하고 경건한 내용이 특징이다. 이 문서는 독일 칼빈주의 신앙 고백에서 가장 탁월한 문서로 손꼽히고 있고, 오늘날에도 개혁주의 교회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9. 제2헬베틱(스위스) 신앙 고백(The Second Helvetic Confession,1566).
1562년 하인리히 불링거는 개인적인 신앙 고백을 작성하였다가 1564년 다시 개정하여 자신의 유언을 덧붙였다. 취리히에 전염병이 휩쓸면서 부인을 잃어버렸고, 자신도 언제 죽을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 살아 남게 되고, 1565년 12월 팔라틴의 선제후 프레데릭 3세의 요청이 오자, 정통 신앙의 기준이 무언인가를 알려 주는 문서로 이를 작성하여 베자의 추인을 받고자 제네바로 우송하였다.
이 고백서는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 다음으로 스위스 개혁파 교외들의 지지를 얻었고, 가장 널리 사용되었다. 제네바에서도 채택되었으나, 바젤에서만 거부당하였다. 심지어 헝가리개혁 교회에서도 채택하였다. 가장 성숙하고 세련된 개혁 교회의 신앙 고백서로 볼 수 있다.
이 고백서의 특징은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있음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제1조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는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강조하여, 개혁 교회가 얼마나 설교를 중시하는가를 표명하였다. 그리고 성만찬 교리에 있어서는, 칼빈과 파렐이 대표가 된 제네바 교회와 불링거가 대표가 된 취리히 교회 사이에 1549년에 맺어진 합의안(Consensus Tigurinus, 1549)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10. 돌트 신경(Canon of Dort, 1618-9).
홀란드 지역에서 발전된 정통 개혁 신앙의 절정기에 작성된 교리의 압권으로, 알미니우스주의의 오류를 지적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신조이다. 예정론을 근간으로 한 칼빈주의 5대 교리라고 알려진 구원론에 관련된 다섯 가지 핵심 사항을 채택한 것이다. 논쟁을 거쳐서 나온 문서인 만큼, 16세기에 나온 신조에 비하면 매우 정교하고 체계적이며 논증적이다. 종교 개혁 시대에는 새롭게 복음을 발견하는 통찰력이 필요하였던 것이 아니라 보다 정확하고 명쾌하게 규정하여 종교 개혁자들의 신앙을 옹호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개신교 정통 신학 또는 개신교 스콜라주의라고도 불리워지고 있다.
11.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1647).
칼빈주의 정통 신학의 최고봉에 위치하는 가장 체계적인 문서이다. 한국 장로 교회는 이 문서를 성경 다음에 표준 신앙 고백서로 채택한 바 있다. 청교도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모여 작성한 이 문서의 특징은, 스코틀랜드 언약 신학이 반영되고 성화와 주일성수에 대한 엄격성이 강조되었다는 것이다. 이중 예정, 자유 의지, 아담의 행위 언약 등도 계속해서 중요한 교리로 인식되고 있다.
12. 웨스트민스터 대 소요리 문답(The Westminster Larger Catechism, 1648).
개혁주의 요리 문답 가운데서 가장 긴 문서로, 어린이들을 위해서는 소요리 문답이 나와 있다. 거의 모든 개혁주의 교리를 다루고 있다. 주기도문과 십계명 해석도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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