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과 신앙고백
16세기 종교개혁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비리를 지적하고 비판 하는데에만 그치는 소극적인 운동이 아니라 기독교 본질에 대한 성경적인 새로운 이해와 그에 따른 교회의 생활과 신학의 쇄신을 추진한 운동이었다. 종교 개혁자들은 로마 가톨릭교회와 대립하면서 가톨릭교회를 대표하는 신학자들과 교리적인 논쟁을 해야 했으며 때로는 개혁자들간의 의견대립의 조정을 위하여 논쟁을 위한 또는 합의를 위한 글을 써야만 했다. 개혁을 지지하는 교회들은 각처에서 제각지 자기네들의 신앙을 문서로 고백하였다. 가톨릭에 대항하여 자기들의 신앙적 입장을 밝히기 위해서 그리고 청소년들과 평신도들을 그들이 신앙하는 복음의 교리를 가지고 교육하기 위해서였다.
Ⅰ. 루터교회의 신앙고백
1. 아우그스부르그 신앙고백(1530년)
이 신앙고백서는 1530년 1월21일 아우그스부르그 왕국 회의에서 개신교의 신앙적 입장을 밝힌 고백서이다. 황제 카알5새가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의 분규를 조정하려는 의도에서 양편의 견해를 들어보고자 왕국회의를 소집하고 가톨릭과 개신교의 대표를 초청하였다. 이때 루터의 동역자인 필립 멜랑히톤이 작성하였다. 이 신앙고백에 서명한 사람은 멜랑히톤 자신이 아닌 독일의 5개주와 2개 도시의 제후들이었다. 이 신앙고백은 멜랑톤 개인의 신앙고백이 아닌 공적인 신앙고백이었다. 사실 이 신앙고백은 1528년 루터가 쓴「그리스도의 성찬에 관한 신앙고백」을 의식하여 1528년 멜랑히톤의 「학습교인 교과문답서」, 1529년 여름의 슈바브주(州)의 17개 신조와 1529년 10월에 나온 루터의 마르부르크 15개 신조를 수렴한 것이었다. 이 신앙고백의 특징은 루터 교회의 신앙을 잘 대변하고 있다는 데 있다. 또한 이 신앙고백서는 가톨릭과 정면으로 대치한 상태에서 나온 것이어서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에 비하여 휠씬 논쟁적이다.
2. 아우그스부르그 신앙고백 변증서(1531년)
카알5세의 요청으로 1530년 5월 아우그스부르그에서 열린 왕국회의에서 개신교의 신앙을 대변하는 아우그스부르그 신앙고백이 제시되자 가톨릭측은 이를 반박하는 글을 내 놓았다. 요한 에크를 위시한 가톨릭 신학자들이 공동으로 반박문을 작성하여 1530년8월3일 왕국회의에서 낭독하였다. 멜랑히톤은 이에 대항하여 아우그스부르그 신항고백을 부연하는 변증서를써서 동년 9월23일 왕국회의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황제는 가톨릭측이 제출한 반박문을 받아 들였고 개신교에 대하여는 1521년 보름스 회의에서 루터와 그의 추종자를 이단으로 정죄했던 결정을 재확인 하는 것으로 신, 구교간의 문제를 종결지었다. 멜랑히톤은 1530년 10월에 가톨릭의 반박문을 입수하여서는 시간적 여유를 갖고 9월에 제출했던 변증서를 더 손지하여 1531년 5월에 변증서의 라틴어 판을 출판하였다. 독일어 판은 그해 가을에 출판되었다. 이 변증서는 아우그스부르그 신앙고백서에 대한 신학적인 해설서로서 고백서 보다도 내용의 분량이 4-5배나 된다.
3. 루터의 소요리 문답(1529년)
1526년 루터가 개신교를 따르는 삭슨 지방 교회를 순방했었는데 그 때 목사와 평신도들이 기독교 교리에 너무 무지한 것을 알게되어 평신도의 신앙고백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그래서 루터는 1528년 5월과 9월, 11월과 12월에 대•소요리문답에서 취급하는 5개의 제목에 관하여 계속 설교하였으며 1529년 4월에 「대요리문답」(Deutsch Catechismus)을 그리고 그해 5월 「목사와 설교자를 위한 소요리 문답서」를 출판하였다.
이 요리문답서는 가톨릭을 의식하여 개신교의 신앙을 밝히는 고백서와는 달리 개신교의 평신도를 성경적으로 교육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즉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의 진리를 아주 평이하고 소박하게 문답식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문답의 내용은 십계명, 기독교신앙(사도신경), 주기도, 세례, 고해, 성찬, 아침기도와 저녁기도, 식사기도 중 8개의 주제에 관한 것이다.
4. 루터의 슈말갈덴 신조(1537년)
슈말갈덴 신조는 신성 로마황제 카알 5세의 요청으로 교황 바오르3세가 소집하여 1537년 이태리의 만투아에서 열리게 된 교회 공의회에서 개신교의 입장을 밝히기 위해 작성된 신조였다. 이 종교회의을 앞두고 개신교를 지지해 온 삭손의 프리드리히 선제후는 루터에게 교회의 일치를 위하여 개신교 측에서 어떤 점에서 어느정도로 양보할수 있는지를 밝혀주는 글을 쓰도록 요청하였다. 루터는 병석에서 이 신조를 제1장에서제3장 3항까지 친필로 쓰고 나머지 16항까지는 구술로서 필기를 완성시켜 작성하였다.
그해 2월8일 슈말칼덴에 속한 개신교 지도자들은 슈말갈덴에 모여 5월에 있을 종교 회의에 대비하여 의견을 모으고 숙지하면서 루터가 쓴 이 신조를 그들의 신학적 입장을 대변하는 문서로 받아들였다. 이 회의에서는 교황에 대한 개신교의 견해를 좀더 자상히 밝히는 것이 좋겠다고하여 멜랑히톤에게 교황에 대한 글을 쓰도록 위임한 것도 기억할 만한 사실이다. 이 슈말갈덴 신조는 간결하게 개신교의 입장을 밝히고 로마 가톨릭 교회가 지난 잘못을 좀더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 큰 특징이다. 특히 제2장에서부터는 로마 가톨릭과의 차이점을 지적하고 교황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아우구스부르그 신앙고백에서는 올바른 의미에서의 미사는 허용할 만한 것이고 개신교(루터교)에서 미사를 폐지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나 여기 슈말갈덴 신조에서는 미사를 아주 부정적으로 말하고 있다. 즉 “미사는 교황제도 가운데서 가장 가증스러운 것이며 그것이 이 중요한 조항에 아주 배치되는 것이니 교황주의의 모든 우상숭배 가운데 가장 높이 평가하고 미화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제2장 4항에서는 교황권을 비판한다. 거룩한 교회는 교황 없이도 5백년 이상 존재한 것이 분명하며 또 오늘에 이르기까지 희랍교회와 다른 말을 쓰는 많은 교회는 교황의 지배하에 있지 않고 지금도 있지 않다는 것이다. 교회는 교황 없이도 존속할 수 있다. 루터는 이와같이 교황제도를 신랄하게 파헤치고 비판하는 신조를 내놓으므로 사실상 루터교가 가돌릭교회와 일치를 모색하는 시대는 이미 끝난 것이었다.
5. 일치신조(1557년)와 일치신조 서(書)(1580년)
일치신조는 종교개혁 제2세대의 신학자들이 작성한 것으로 그 이전에 나온 루터교회 신앙고백서들과는 차이점이 있다. 로마 가톨릭에 대항하면서 개신 교회로 존립하느냐 하는 긴박성은 이미 사라져서 신교의 교리를 변호하기보다는 루터 교회 내의 신학적으로 서로 다른 견해를 조정하는데 역점을 두고 있으며 더 사변적인 이론 전개를 하고 있다. 루터가 죽고 난후 루터교회 내에서는 여러차례 신학적인 분열로 말미암아 루터교회의 통일성을 상실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 특히 루터의 신실한 동역자였던 필립 멜랑히톤은 루터가 생전에 가졌던 신학과는 다소 견해를 달리하는 견해를 보였다(예를 들면 신인협동설, 성찬론 등). 또한 멜랑히톤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그들은 멜랑히톤의 이름을 따라 ‘필립주의자“라고 불렸다. 이러한 루터교회내의 불일치를 극복하려는 일치운동이 일어났으니 야곱 안드레아(1528-1590)를 대표로 하는 여러 신학자들이 몇몇 관심있는 제후들, 이를테면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뷰텔의 루트비히, 삭슨의 선제후, 팔쯔의 루트비히 등의 후원을 받아 일치 인동을 전개하였다. 일치신조는 바야흐로 정통주의 시대로 접어드는 시대적인 특징을 말하고 있는데 이 신조가 나오므로 여러 지역의 제후들과 목사와 신학자들의 지지를 받아 루터교회의 통일이 상당한 정도로 달한 것은 사실이었다. 1580년 6월25일 일치 신조의 책이 발간되었을 때 거기에는 3명의 선 제후를 비롯하여 20명의 제후, 24명의 백작, 4명의 성주, 38개의 왕국 도시와 8천 여명의 목사와 신학자들이 서명했었다.
일치신조의 서(書)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에는 종전까지 나온 루터교의 신앙고백들, 즉 아우그스부르그 신앙고백서와 그 변증서, 슈말갈덴 신조 및 루터의 대•소요리 문답이 실려 있고 제2부에는 1577년 완성된 일치 신조가 수록되고 있다. 이 일치신조는 40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책으로 이것 역시 루터의 대•소요리문답처럼 두부분으로 나누어 첫 번째 부분에는 간단한 개요만을 서술하고 두 번째 부분에서는 같은 제목을 더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런데 이 일치 신조로 말미암아 특히 루터의 성만찬론을 지지하며 재확인하는 개요⑦고백 때문에 개혁주의 교회와의 교류는 단절을 하게 되었고 그밖에 멜랑히톤의 가르침을 따르거나 개혁주의 영향을 많이 받은 헷센, 팔츠의 일부 지역과 슈례스비히 홀슈타인, 덴마르크와 기타 여러 왕국 도시의 루터 교회들은 일치 신조를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서 교회적인 분열을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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