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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실재하는 하나님을 만나라.

Joyfule 2020. 4. 10. 08:46


  
    종교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실재하는 하나님을 만나라.


쿵푸라는 무술은 필자가 청소년 시절 엄청나게 인기 있는 영화였다. 초콜릿 복근으로 유명한 배우 이소룡이 기이한 소리를 지르며 거한을 쓰러뜨리는 영화 용쟁호투나 당산대형을 보면서, 아이들은 너도나도 문구점에 몰려가서 쌍절곤을 사서 휘두르곤 하였다. 얼마 전 베이징올림픽 때 쿵푸가 시범종목에 올라서, 사람들은 기대감을 가지고 눈을 반짝이며 지켜보았다. 그러나 쿵푸는 다른 무술종목처럼 선수들이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각종 품새를 보고 점수를 매기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비주얼이 가장 그럴듯하면 금메달을 주는 식이다. 말하자면 실제 싸움실력이 아니라 무술연기를 얼마나 잘 하는 지에 달려있다. 예전에 코리아라는 탁구영화가 있었다. 남북의 탁구선수가 한 팀이 되어, 세계탁구선수권 9연패를 노리던 세계최강 중국을 무너뜨리고 금메달을 딴 줄거리를 영화화 한 것이다. 그 때 현정화 역을 했던 하지원이 열연을 했는데, 탁구 치는 모습을 보면 진짜 선수 못지않았다고 한다. 진지한 폼이나 눈빛 연기가, 너무나 그럴 듯하여 사람들이 탄성을 지르며 영화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이러한 일이 종교계에도 판박이이다.

 

어떤 종교나 자신들이 섬기는 신이 얼마나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광고하고 홍보하는 일에 골몰한다. 그래서 어떤 종교든지 신상은 규모가 웅장하여 사람들이 놀라게 마련이다. 불교의 대웅전에 있는 부처상을 보라. 거대한 크기에 금박으로 입혀서 휘황찬란하다. 절 마당에 있는 탑의 규모를 보라. 불국사에 있는 다보탑과 석가탑이 얼마나 큰지 절마당의 대부분의 차지하고 있었다. 고대시대 티벳이나 태국에 세워졌던 부처상의 규모나 숫자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다. 불교만 그러한가? 힌두교나 이슬람교는 물론 무당들이 굿을 하는 굿당에 가도 최선을 다해 신상을 세우고 제물을 차려놓았다. 필자가 화장품 팔러 다니던 시절, 공주시장 근처에다 주차하였는데, 그 옆에 거대한 불교용품 파는 데가 있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살펴본 적이 있다. 그 곳에는 다양한 부처상과 산신령, 선녀는 물론, 호랑이와 각종 무기를 든 장군상들이 비닐을 뒤집어쓰고 자신들의 사갈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이 불교용품 가게에 있을 때는 단지 상품에 불과하지만, 절간이나 굿당에 설치해 놓으면 사람들이 소원을 빌면서 절을 하면서 시줏돈을 올려놓을 것을 생각하니 웃음이 픽하고 새어나왔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네 교회에도 이런 일이 있으니 아이러니하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20:3~6)

 

여호와 하나님은 십계명 중에 첫 계명으로, 어떤 모양의 신상을 만들지도 말고 절하지도 말하고 명령하셨다. 왜 그랬는지 아는가?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종교적인 신으로 만들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종교종교적인이라는 단어를 찬찬히 살펴보자. 종교는 초자연적인 절대자의 힘에 의존하여 인간생활의 고뇌를 해결하고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문화체계이다. 애니미즘이나 토테미즘과 같은 원시종교를 포함하며,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같은 세계종교에 이르기까지 여러 형태가 있다. 그렇다면 종교적이라는 말은 어떤 뜻일까? 종교적이란 종교의 체계나 교리를 따르는 것, 혹은 종교와 관련된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어떤 종교이든지 절대 권력을 가진 절대자의 힘을 나타내는 거대한 신상을 만들어 절하며, 종교의식을 거행하고 희생적인 신앙행위를 통해 절대자를 믿는 믿음을 보여주어서, 자신의 소원을 이루고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모든 종교는 삶의 실재를 통해 절대자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을 추구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당신은 다른 종교는 죄다 사람들이 만든 우상에 불과하며, 오직 기독교의 하나님만이 세상을 지으시고 우주를 운행하시며 대자연을 섭리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라고 믿고 교회마당을 밟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삶의 현장에서 체험하고 계신가? 말하자면 종교적인 신이 아니라 실재적인 하나님을 만나고 계신가 말이다. 실재라는 말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뜻하는 단어이다. 말하자면 일상의 삶에서 진짜로 하나님을 만나서 전지전능한 놀라운 위력을 경험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러한 질문에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이가 많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실재적인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네 교회처럼 종교적인 행사나 희생적인 신앙행위를 많이 하는 종교집단이 어디 있겠는가? 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일 년에 한두 번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는 이들이 대다수인데, 우리네 교인들은 일주일에도 여러 번 교회에 가서 예배의식을 드리고 각종 종교행사에 참여하고 있다. 분에 넘치는 헌금을 드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삶의 현장에서 실재하는 하나님을 체험하며 사는 이들이 거의 없으니 기가 막힌 일이다. 그래서 실재하는 하나님을 경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찬찬히 곱씹어보고 싶다.

  

1. 믿음의 본질을 깨달으라.

 

믿음이라고 쓰고 순종이라고 읽는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21:22)

 

당신이 교회에서 배우는 믿음의 정의가 무엇이든 간에, 예수님은 믿음으로 구하는 것은 다 받을 것이라고 선포하셨다. 그래서 당신은 그동안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실 것은 굳게 믿고 희생적인 기도를 마다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둘 중의 하나이다. 예수님의 말씀이 거짓이거나, 당신의 믿음을 하나님이 인정해주시지 않거나 말이다. 그렇다면 당신의 믿음을 하나님이 인정해주시지 않는다는 게 정답일 수밖에 없다. 그러면 교회에서 가르치는 믿음의 잣대로 천국에 들어간다고 철썩 같이 믿고 있는, 당신의 믿음도 결과는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수많은 이들이 필자의 주장에 머리가 터져나갈 것 같으니까, 칼럼을 덮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는 이유이다. 필자의 주장을 인정하면 그동안의 신앙생활이 무너져버릴 거라는 두려움이 엄습해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필자의 칼럼을 진지하게 읽는 이들도 있다. 그 사람이 누구냐고? 인생절벽을 경험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칼럼을 읽으면서,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기적이 일어나는 믿음을 얻게 되는지 궁금해 하실 것이다.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17:5~10)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5:5)

 

위의 두 사건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바로 기적이 내려오는 믿음의 비결을 말해주고 있다. 기적이 내려오는 믿음은 절대순종의 행위로 믿음을 증명해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무엇으로 증명하고 있는가? 영접기도행위와 예배의식에 참석, 그리고 각종 희생적인 신앙행위인가? 솔직히 말해서 우리네 교회에서 요구하는 신앙의 행위들은 성경에 없는 것들이다. 교회의 관행으로 내려오고 있는 것들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그게 비성경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신앙행위를 열정적으로 하는 것과 기도응답으로 삶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별개의 것이다. 그래서 그동안 당신이 교회에서 시키는 대로 신앙행위를 열정적으로 해왔는데도 기도응답이 없는 이유이다.

 

2. 종교적인 신앙생활을 버리라.

 

종교적인 신앙생활이란, 실재적인 믿음이 없이 오직 종교적인 예배의식에 참석하고 각종 희생적인 신앙행위를 하는 것을 말한다. 그동안 우리네 교회에서는 영접기도행위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예배의식에 참석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으로 대치하셨다. 또한 각종 희생적인 신앙행위를 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기뻐하는 믿음을 대신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른 종교의 신처럼, 교회에 와서 예배의식에 참석하거나 각종 희생적인 신앙행위를 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를 살피신다. 즉 속내와 동기, 목적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다면, 수많은 희생적인 신앙행위들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기만족이나 자기 의에 불과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네 교회에 기적과 이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지 않는 이유이다.

 

교인들은 성경이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있지만,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쓰지 않는다. 단지 교회에서 명령하는 예배의식에 참석여부나 십일조나 각종 헌금을 내는 행위, 교회조직을 지탱하는 각종 자원봉사에 순종하는 여부, 사람들의 손을 잡아끌어 교회 의자에 앉히는 행위 등의 종교적인 활동에 얼마나 충성하고 순종하는 것으로 자신의 믿음을 평가하고 있다. 물론 그러한 예배의식에 참석하거나 신앙행위를 하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최우선수위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명령이 새벽기도에 참석하는 것으로 변질되었고, 일상의 삶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라는 명령이 교회의 관행으로 만든 예배의식에 참석하는 것으로 변질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보다 담임목사의 권면이 우선되고 있으며, 인본적이고 세속적인 기복신앙과 목회자의 목회성공이 교묘하게 하나님의 뜻으로 변질되어져 가르치고 배우고 있으니 기가 막힌 일이다. 어쨌든 지금까지 종교적인 신앙생활로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면, 이제부터는 쓰레기통에 죄가 버리고 마음과 목적이 하나님에 뜻에 합당하게 삶에 적용해야 할 것이다.

 

3.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을 섬기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6:53~57)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

 

예수님은 성경말씀이 육신으로 이 세상에 오신 분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곧 성경말씀이시며 우리의 영혼의 양식이 되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당신의 영혼이 살고 영생을 얻으려면 말씀을 매일 배부르게 먹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사람들은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는 목적은 성경지식을 머리에 쌓아두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이유는 내 영혼의 양식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거주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8:32)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15:6)

 

성경은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에 거주하는 것과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이나 동일한 뜻이라고 선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섬기는 것은 말씀이 우리 안에 거주할 수 있도록 습관을 들여 말씀을 읽고 깨달아서 삶에 적용하도록 애써야 한다. 그러나 성경지식은 해박하지만 성경대로 살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이 안에 계시지 않는 증거일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희생적인 신앙행위가 아니라 말씀을 읽고 가슴에 새겨서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또 다른 방식은 기도이다. 그러나 우리네 교회에서 행해왔던 기도는 성경의 방식이 아니라 종교적인 방식에 불과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며 주인이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종의 신분이다. 그러므로 주인이신 하나님은 종인 우리가 하나님을 쉬지 않고 찾아와서 교제하는 것을 원하신다. 즉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며, 쉬지 않고 하나님을 부르며 찾아오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네 교회는 종교적인 행위로서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수단으로 기도를 가르쳐왔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응답을 얻지도 못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섬기는 행위는 하나님과 깊고 친밀하게 교제하는 기도이다.

   

그러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그를 찾으면 만나리라(4:29)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29:13)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11:6)

 

성경 곳곳에서 수도 없이, 하나님을 전심을 찾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을 보이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당신이 하나님을 섬기려면 하루종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전심으로 그분을 만나려고 애써야 할 것이다. 그러한 기도가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이미 죄로 변질되어서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한다. 그래서 교회에 와서조차 하나님을 만나는 교제의 기도를 할 생각조차 없다. 그러면서 각종 예배의식 에 참석하고 교회봉사를 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여기고 있으니 기가 막힌 일이다.

 

4. 죄를 깨끗하게 씻으라.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 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22:8~14)

 

깨끗한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예복을 입고 예수님께 나아오는 사람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탐욕과 방탕과 온갖 더러운 죄로 얼룩진 옷을 그대로 입고 예수님을 찾기 때문에 만날 수 없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깨끗하다는 말은 거룩하다는 말이며, 하나님은 자신이 거룩하므로 자녀들에게도 거룩할 것을 명령하셨다. 그래서 예수 피에 자신의 죄를 깨끗하게 씻는 자들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날마다 자신의 죄를 철저하게 회개하며 죄를 깨끗하게 씻고 계신가? 당신이 생각하고 있으며, 우리네 교회에서 가르치는 죄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죄에다가, 목회자들이 교회에 관행이거나 자의적으로 지어낸 희생적인 종교행위에 순종하지 않는 명령위반도 죄의 목록에 집어넣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죄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죄이고,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지 않는 죄가 가장 큰 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나아오는 자들은 철저하게 자신의 죄를 자복하며 회개하여야하겠고, 날마다 자신도 인지하지 못한 채 육체의 소욕을 쫓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좇는 죄와 피터지게 싸우며 이겨야 할 것이다. 성경은 만물보다 더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며, 예수님은 자신을 사랑하는 자아를 버리지 않는다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그래서 이런 죄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사람들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예수피의 공로에 의지하여 회개하고 있다고 해서, 자신의 죄가 용서함을 받아 깨끗하게 씻겨 진 것이 아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이 입으로 회개 기도한 것만으로 죄의 용서함을 받았다고 여기며, 이것을 믿는 게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잘라 말하고 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무엇인가? 예수 피의 공로로 죄가 용서함을 받아서, 죄의 대가를 더 이상 지불하며 살지 않아야 할 것이다. 죄의 대가란 죄로 인해 생기는 온갖 불행과 고통스런 삶의 문제들이다. 각종 고질병과 정신질환을 비롯해서 극심한 가난, 그리고 삶의 문제들이 죄의 결과물이다. 그러므로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면 고질병이 치유 받고 삶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그래서 평안하고 형통한 삶으로 회복되어야 한다. 어디 이뿐인가? 회개의 열매는 죄와 피터지게 싸우는 영적 능력이다. 전심으로 회개한다고 하더라도 죄를 반복적으로 짓고 있다면, 개가 토한 것을 도로 먹고 돼지가 씻은 몸으로 진흙탕에 뒹구는 것이 아닌가? 물론 피터지게 싸우다가 부족함과 연약함으로 어쩔 수 없이 죄를 짓는 것과, 죄를 지으면 다시 회개하면 되지 하는 것과는 온도차가 크다. 하나님은 죄를 싫어하며 죄인을 가까이 하실 수 없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죄를 미워하며 피터지게 싸우는 지를 불꽃같은 눈으로 지켜보시고 계시다. 어쨌든 회개의 열매란 날마다 죄에서 멀어져서 깨끗하게 사는 모습을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셔야 할 것이다.

 

위 네 가지 비결이 실재적인 하나님을 만나는 비결이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종교적인 세상의 신이 아니라, 기적과 이적으로 전지전능하신 존재감을 드러내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삶의 현장에서 기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천국도 언감생심일 것이다. 우리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라. 하나님은 그런 사람의 하나님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