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성을 위한 ━━/김요한목사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는다

Joyfule 2024. 4. 2. 23:39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는다(롬10:9-13)



 예수가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믿는 믿음과 아담 안에 죽었던

내 속에 부활과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살아계신다는 믿음은 큰 구렁이 있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며 주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아본 베드로라 할지라도

그 예수를 주로 모시고 믿기는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아무도 성령이 아니고는 그리스도를 임마누엘의 주로 믿고 부를 수가 없습니다(고전12:3)

이는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대로 고난 받으실 주님과 고난 받으실 후의 영광을(벧전1:11)

계시로 그 비밀을 알아야만 새 언약이 우리에게 이루어진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진리의 영이신 그리스도께서 내주 역사하시는 새 언약을 모르므로 종말론과

구원론 기독교 교회론이 다 헝클어지므로 이단이나 하나님의 나라를 강조하면서도

그 방법과 절차와 과정을 설명해 주지 못하는 알맹이가 없는 말풍선이 난무합니다.

 

Q. 예수를 주로 믿는다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10:9-13)

 

A. 우리의 입으로 예수를 스스럼없이 주로 시인하는 겁니다.

입 안에서 그냥 자연스럽게 나오는 현상입니다. 한국 사람이 한국말 하듯...

그래서 주여 한 번 불러보게 해서 그 사람의 믿음을 체크해 보기도 합니다.

그 당시로서는 예수를 주라고 시인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아마 지금도 2,000년 전의 예수를 주로 부르고 있는 사람들 오랫동안

가스라이팅을 당한 후에야 세뇌가 되어 습관적으로 주여 하기도 할 겁니다.

그럼에도 주님이 어디 계셔 하고 물으면 하늘을 가리키는 얼간이들이 많지요.

예수를 바로 주라고 부르라면 다른 사람을 보고 아버지 하고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시면 예수그리스도를 저절로 주로 시인하게 됩니다(고전12:3)

 

이 사실을 우리 마음에 믿으면 구원입니다. 이게 아주 신기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다 보면 어느 순간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십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믿어지는 믿음의 말씀입니다.

문제는 물세례만 아는 아볼로급의 목사는 바울과 같이 성령세례를 베풀 수가 없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며 그리스도는 진리의 영으로 임마누엘 하심은 계시로 압니다.

따라서 설교자가 성령세례로 말미암아 계시의 영을 가지고 말씀을 전파해야만

듣는 이들도 그 계시의 영에 의해 그리스도의 내주 역사하심이 믿어집니다.

그리고 믿음의 내용이 뭔가 하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믿는 겁니다.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지 못하면 신학교 입학 자격도 없을 겁니다.

그런데 계시의 영으로 아담 안에 죽었던 내 속에서 주께서 살아계심이 믿어지는 겁니다.

그러므로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심과 죽음(dead)에서 내가 다시 살아난 것을 구분하세요.

주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과 생명이심(요11:25)으로 그 부활로 우리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시고 그 생명으로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는 영생을 주시는 구주가 되십니다. 

 

Q. 의에 이르는 방법이 무엇인가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10)

 

A. 그리스도께서 임마누엘 하심이 마음으로 믿어지면 의에 이릅니다.

그 의의 증거는 바로 믿음입니다. 믿어지는 믿음인데 바깥 상황과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입으로 시인하게 되면 구원에 이르게 되는데 그 구원의 증거는 시인입니다.

성령이 내 속에서 시인하시고 나는 입으로 시인하는 2부합창이 바로 시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주라고 부를 때에 자신이 종이 된 사실이 확인되고 나서

주라고 불러야 합니다. 주의 종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사실은 그리스도가 구원의

주시면 자신은 그 구원을 따르는 구원의 종이 되므로 다 구원을 받는 주의 종들입니다.

 

로마의 군인들은 방패와 창을 들고 명령대로 로봇처럼 걸어가서 화살을

맞고 죽는다고 하는데 평소에는 농사를 짓다가 전쟁이 나면 군인이 됩니다.

이렇게 명령에 의해 살고 죽는 사람들이 바로 노예이며 종입니다.

정작 그리스도 안에 부름을 받아 주와 종의 관계가 설정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오랫동안 주여 주여 하다가 그대로 굳어져 허공에 대로 주의 이름을 부르기도 합니다.

 

Q. 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가요?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롬10:11-12)

 

A.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부요함을 얻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에 유명한 목사가 부요하신 그리스도께서 가난하게

되심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려 함이라고(고후8:9) 오랫동안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나사렛의 가난하신 예수가 우리를 부요하게 한다면서 물질의 복을

엄청 강조했습니다. 그러다가 자신도 부하고자 하다가 끝내 법의 제재를 받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목사들의 설교 가운데 이 부요함을 물질이나 삶의 질을 말하여 헷갈리게 합니다.

축복이란 말 속에 번영이라는 화면이 시야에 가득하게 비치는 설교가 대부분입니다.

아뇨 이 부요함을 존재적인 요소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가치입니다.

따라서 믿으려면 말씀(레에마)이 들려야 합니다. 종이에 쓰인 말씀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에 의해 살아 있는 말씀이어야 합니다.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대언의 영으로 말씀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기록한 성령의 영감과 읽을 때에 깨닫는 영감과 행하는 영감이

있듯 반드시 성령의 감동에 의해 그리스도의 말씀을 증거하면 귀가 열려 믿어집니다.

말씀이 다가와야만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 방법은 너무 쉽습니다.

아담 안에 죽은 자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먹고 살면 됩니다(요5:25)

숨을 쉬는데 무슨 논리가 방법이 있고 공식이 있겠습니까?

그냥 들이마시면 됩니다. 다만 지식에 지식을 더하고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모은 말의 꽃다발로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실존의 설교가 문제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영과 생명이시기에(요6:63) 들으면 믿어집니다. 이게 바로 믿음이죠.

숨을 안 쉬려면 코를 막아야 하죠. 그래서 숨을 안 쉬는 것 보다 쉬는 것이 쉽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모신 사람이 안 믿어지면 그게 오히려 기적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죽은 자 가운데 그리스도가 살아계신다는 사실이 전파되었음에도

왜 믿지 못할 것으로 여기느냐 하면서 속이 엄청 상해 탄식을 합니다(고전15:12)

문제는 예수만 믿으라고 하고 그리스도께서 내주하시는 임마누엘의 복음 곧

레에마의 말씀을 아무나 전할 수 없는데 있습니다. 이 믿음에 의해 거듭났다

의롭게 되었다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 다 되는데 말입니다.

 

바울은 왜냐하면(가르)하면서 부끄러워하지 않을 이유를 설명합니다. 믿음의 의는

결코 비굴해 질 수 없습니다. 어느 코미디언처럼 비실비실 다리가 꼬이지 않습니다.

헬라인은 기고만장한 우월감을 갖고 있었고 유대인은 정복을 당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의는 차별이 없습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에 믿음의 의는 차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의는 무한대의 부요함에 닿을 수 있는 자격지심입니다.

무한대에 100억을 얹는 거나 무한대 그대로나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옛날에는 우리 한국도 미국 사람들한테 많이 당했습니다.

신학에 있어서도 미국에 비하면 한국이 초라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미국 목사의 책 내용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목사들이 많긴 하지만...)

만일 길선주목사님이 미국선교사로부터 바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지금의

한국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셨다면 평양 부흥운동을 일으키지 못하셨을 겁니다.

그러나 복음 곧 그리스도의 말씀인 생명의 말씀은 민족감정을 없애 버립니다.

저는 솔직히 말해 미국인에게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말씀을 전합니다.

그들의 신학강의를 들었고 유튜브를 자세히 보면서 그들의 수준을 잘 알거든요.

자신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글로벌화 우주화 시켜야만 복음의 세계화가 됩니다.

 

12절에 또 가르(왜냐하면)가 나오는데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셨답니다.

하나님은 민족감정이나 지역감정이 없는 분이십니다. 우리만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저도 지금 교파나 이런 저런 운동이나 심지어 이단 소리를 듣는 사람들에게도

전혀 갭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다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데

까지는 동일하나 부르심 그 이후에 어떤 사람은 진리의 영을 받아 주의 이름을

불러 존재의 부요함으로 온 세계를 향해 기도를 하고 비전을 펼치는 반면에 부르신

체험만 부둥켜안고 평생 우려먹다가 죽을 때에 밀린 숙제 하느라 골병드는 차입니다.

 

Q. 어떻게 하면 부요함을 얻는가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10;13)

 

A. 주의 이름을 탄원하고 호소하듯 부르는 겁니다.

사실 주님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으면 그 사람의 구원의 척도를 알 수가 있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함을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가르(왜냐하면) 주의 이름으로 탄원하고 호소하는 자는 현재구원을 얻기 때문입니다.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의 차이는 남 유다는 성전을 가지고 있으므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나 북 이스라엘은 성전이 없어 본성적인 종교관이 되고 맙니다.

그게 바로 벧엘 산당이었습니다. 결국 망했습니다. 둘 다 망했지만 먼저 망했습니다.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속국이 되었고 사마리아로 멸시 받는 땅이 되었습니다.

이 사람들의 핸디캡은 예루살렘의 성전이었습니다. 성전 말만 나오면 기가 죽습니다.

나중에 회당(쉬나고게)을 많이 만들었는데 이것이 교회제도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그의 영과 생명으로 유기적인 관계가

이루어져야지 그냥 사람들만 모이는 회당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잘 못하면 조직이나 제도로 교회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사람을 끌어 모을 수가 있습니다.

교회는 주의 이름을 간절히 호소하여 구원을 맛보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성령이 오신

목적이 바로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주의 이름을 불러 구원을 받도록 하기 위함입니다(행2:21)

지금 아무리 상황이 아무리 어려워도 주의 이름을 받은 자로 그 이름으로 주께

간절히 탄원하고 호소할 수만 있으면 구원의 하나님이 반드시 그를 건져내십니다.

믿음의 의는 우리 존재를 구원하시고, 끝내 환경과 사정에서도 구원하십니다.

만약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으로 죄에 대해 죽고 그 의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 있는 자로서 주의 이름을 부르므로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구원을

받는 일이 서먹서먹하다면 어찌 영원토록 그 나라에서 그의 입의 기운으로 살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