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知)와 사랑14. - Herman Hesse.
옮긴이: 최달식
펴낸곳: 교육문화연구회
"그만둬!"
나르치스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을 가로막았다.
"가령 경건하다고 하는 신부들조차도 그런 예행 연습이 필요했다는 걸 너는 모른단 말인가!
성자의 생활에로 이로는 지름길 중 하나가 방탕한 생활이라는 사실은 너는 모른단 말인가!"
"그런 뜻이 아닙니다."
골드문트가 대들 듯이 말했다.
"저의 양심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은 그런 미약한 정도의 규칙을
어겼다는 사실이 아니라는 걸 말씀드리려고 했던 겁니다.
제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그 소녀입니다.
당신에게 설명할 수가 없군요. 이 유혹에 따르기 위해
소녀를 만져 보려고 한 손이라도 뻗치는 날에는 두 번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라,
지옥이 저를 삼켜 버리고 끝끝내 놓아주지 않으리라는 기분이었습니다.
모든 아름다운 꿈이, 모든 성덕이,
하느님과 선에 대한 사랑이 끝나 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나르치스는 깊은 생각에 잠기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하고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반드시 선에 대한 사랑과 일치하지 않는 법이거든.
그 정도로 간단한 것이라면 얼마나 좋겠느냐.
무엇이 선인가를 우리는 알고 있지. 그것은 계율에 쓰여 있거든.
그렇지만 하느님은 계율 속에만 있는 게 아니야.
계율이란 건 하느님이 극히 사소한 한 부분에 지나지 않아.
계율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 하느님에게서 더한층 멀리 떨어져 있을 수도 있어."
"제 기분을 이해해 주실 수 없습니까?"
하고 골드문트는 탄식했다.
"물론 이해해. 너는 네가 생각하는 '세속' 혹은 '죄악'에 대한 모든 것을
여자 속에 성 속에 포함시키고 있어.
넌 그 외의 다른 죄는 범할 수가 없거나 혹 범했다 하더라도
참회를 통해 사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그러나 오직 한 가지의 죄악만은 그렇지가 않아."
"그렇습니다. 저도 확실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 봐. 나는 너를 이해하고 있단 말이야. 너의 생각이 그렇게 틀린 것은 아니야.
이브와 뱀에 대한 이야기는 확실히 부질없는 우화는 아니거든.
하지만 네 생각은 바람직하지 못해.
네가 만일 다니엘 원장님이나 대부라든지 성자 크리소스토무스라든지
주교라든지 사체라든지 그것도 아닌 평범한 수도사이기라도 하다면
너의 생각이 옳을 수도 있지. 그러나 너는 그런 사람이 아니거든. 너는 겨우 학생이란 말이야.
설사 네가 평생 수도원에 있고 싶어하고, 너의 아버지도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 하더라도
너는 아직 맹세를 한 것도 아니고, 성직을 받은 것도 아니야.
그러니 네가 오늘이나 내일 어떤 아름다운 처녀의 유혹에 넘어갔다 할지라도
맹세를 어겼다거나 그 맹세에 상처를 준 것은 아니야."
"물론 글로 써둔 맹세는 없습니다,"
골드문트는 매우 흥분해서 소리질렀다.
"그러나 쓰여지지 않은 맹세,
내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가장 신성한 맹세에 상처를 준 것입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는 통할지도 모르는 것이 나에게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당신 자신도 성직을 얻는 것도 맹세를 한 적도 없지만
당신이라면 여자를 가까이하는 어리석은 짓은 결코 하지 않겠지요?
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나요? 당신은 제가 생각하고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까?
당신은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런 사람이 전혀 아닌가요?
당신을 말로써 윗사람들에게 맹세를 한 것은 아니지만
마음속에서는 벌써 오래 전에 그런 맹세를 하고,
그 맹세에 의해서 영원히 의무를 짊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당신은 저와 같은 인간이 아니십니까?"
"아니야. 골드문트. 내가 너와 같을 수는 없어.
그리고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도 아니야. 물론 나는 어떤 무언의 맹세를 지키고 있어.
그 점에 있어서는 네가 말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너와 같을 수는 없어.
이 말을 언젠가는 너도 꼭 생각해 내게 될 거야.
우리의 우정은 네가 완전히 나를 닮지 않았다는 사실을 네게 보여주는 것 이외에는
특별한 목적도 의미도 가지지 않다는 것을 말이야."
골드문트는 한 대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멍청하게 서 있었다.
나르치스의 시선과 음성에는 거역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담겨져 있었다.
그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나르치스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나르치스의 무언의 맹세와 그 맹세는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나르치스는 그를 진심으로 대해 주는 건가, 아니면 어린아이로 취급하는 건가?
이 기묘한 우정에서 혼란과 슬픔이 새삼스럽게 다시금 시작되었다.
나르치스는 이제 더 이상 골드문트의 비밀이 어떠한 것인가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
그 배후에 있는 것은 인류 최초의 어머니인 이브였다.
그러나 그렇게 아름답고 건강하고 향기 어린 젊음 위에 눈뜨는 성이
왜 그렇게 괴로운 반항으로 다가와야만 한단 말인가?
어떤 악마가, 보이지 않는 반대자가 일을 하고 있음에 틀림없으리라.
그리고 이 훌륭한 인간을 내부에서 분열시켜
그의 근본적인 본능과 싸우게 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래, 그 악마를 발견하여 기도의 힘으로 본체를 드러내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그 악마를 물리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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