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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知)와 사랑16. - Herman Hesse.

Joyfule 2012. 9. 10. 10:43
 
   
지(知)와 사랑16. - Herman Hesse.   

옮긴이: 최달식
펴낸곳: 교육문화연구회
나르치스는 골드문트의 아버지를 그리 높이 평가하지는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마음에 들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가 진짜 골드문트의 친아버지인가 하는 의심도 가끔씩 해보았다. 
그러나 대체 그 힘을 어디에서 얻었을까? 
그는 어떻게 골드문트의 영혼에 그 영혼의 핵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꿈을 불어넣을 수 있었을까?
골드문트는 많은 생각을 해보았다. 
친구의 마음속에 있는 진실된 사랑을 의심하지는 않았지만 전과 다름없이 
친구에게서는 하나도 진지한 대우를 받아보지 못하고 
언제나 어린아이 취급을 받고 있다는 불쾌한 감정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나르치스가 자기는 그와 같은 인간이 아니라는 걸 
이해시키려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도일까?
하지만 골드문트가 이런 생각으로만 시간을 보낸 것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명상에 잠겨 있다는 것은 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루종일 그는 여러 가지 할 일이 있었다. 
그는 이상하게도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 문지기 수사를 자주 찾아갔다. 
그는 문지기에게 부탁을 해 한 두 시간씩 블레스를 탈 기회를 얻기도 했고, 
때로는 수도원에 딸린 주민들 집에 들러 시간을 보내기도 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물방앗간집 주인과 무척 친하게 지냈다. 
골드문트는 가끔 그 집 하인과 같이 물개를 데리고 놀기도 하고 
골드문트가 눈을 감은 채 냄새만으로 여러 가지 종류의 밀가루 가운데서 
알아맞춘 상등품의 프랠라트 밀가루로 과자를 굽기도 했다. 
나르치스와 함께 있을 때도 많았지만 그에게는 즐거움이었다. 
그는 학생들과 함께 합창단에 들어가 함께 노래 부르는 것도 좋아했고 
제단 앞에서 묵주를 헤며 기도를 드리는 것도 좋아했으며, 
미사에서 사용하는 아름답고 엄숙한 라틴 어를 듣는 것도 좋아했다. 
그리고 성향이 피어 오르는 가운데서 성당의 온갖 성물들이 
황금빛으로 빛나는 것을 보는 것도 즐겼다. 
가끔씩 기둥에 동물들을 데리고 있는 복음서의 저자들이나 모자를 쓰고 
순례자의 주머니를 찬 야고보 등의 조용하고 거룩한 성자들의 상을 바라보기도 했다.
그는 성상을 보면서 황홀해했고 돌이나 나무의 모습들이 
자신과 신비적인 연관성을 갖고 있는 듯한 감정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말하자면 그에게 있어 그 성상들은 저지 전능한 불멸의 대부이며 보호자요, 
자기 생의 이정표를 제시해 주는 선지자였다. 
동시에 기둥이나 창문이나 출입문, 제단의 장식, 
아름답게 측면을 보이고 있는 여러 가지 모양의 부연 장식이나 
기둥의 돌 속에서 퉁겨져 엉겨붙은 잎새 모양의 장식에서도 
자연을 모방해 돌이나 나무로 만든 제2의 동물이나 식물이 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귀중하고 거룩한 비밀로 다가왔다. 
그는 종종 동물의 머리와 잎새의 다발을 묘사하면서 자유롭게 시간을 그려보기도 했다.
그는 찬송가 중에서도 마리아의 노래를 특히 좋아했다. 
그는 그런 노래들이 주는 빈틈없고 엄격한 구절, 자꾸 반복되는 애원과 찬송을 좋아했다. 
기도 드리면서 그 거룩한 의미를 쫓아거가나 아니면 그 의미는 잊은 채 
그 시구에서 느낄 수 있는 장엄한 운율이나 그 반복을 좋아했다. 
학문이나 문법이나 논리학은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관심의 대상은 오히려 그림이나 음의 세계였다.
골드문트는 점점 동급생들로부터 소외감을 느꼈다. 
그리고 오랜 시간에 걸쳐서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배척당하고 냉대를 받고 있다는 것은 불쾌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지루하기도 했다. 
그는 이따금씩 옆자리에 앉아 있는 잔소리깨나 늘어놓을 듯한 동급생을 웃기기도 하고 
옆 침대에 자고 있는 말없는 동급생에게 잡담을 늘어놓기도 했다. 
그리하여 한 시간 가량이나 애를 써서 몇 번의 관심과 시선을 끌기도 했지만 
그런 식으로 가까워진 우정은 '마을에 가자'는 권유를 
두 번이나 받는 것으로 그 보상이 돌아왔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마을에 가지 않았으면 긴 머리카락의 앳된 소녀도 기억에서 멀어져 
더 이상 그녀를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4
나르치스는 오랫동안 골드문트를 방치해 두었다. 
그의 비밀을 캐내려고 벼르고 있었지만 허사로 돌아간 것 같았다.
골드문트가 그의 내력이나 고향에 관해 그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도무지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그림자 같이 형태가 없는 아버지 이야기와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에 대한 전살 같은 이야기뿐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에 뛰어났던 나르치스는 점점 그의 친구가 
생활의 한 부분을 잃어버린 사람, 다른 어떤 괴로움이나 마력의 압박 밑에서 
과거의 일부를 잊어버리기로 작정한 사람 중의 하나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런 그에게 무엇을 묻거나 깨우친다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또 자신이 이성의 힘을 과시한 나머지 잔소리만 늘어놓게 되리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를 친구로 결합시킨 사랑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때때로 같이 있는 습관도.... 두 사람의 본성이 서로 상충되는 점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로가 상대방으로부터 많은 것들을 배웠다. 
그리하여 그들 사이에 이성의 언어와 더불어 영혼과 상징의 언어가 생겨나기에 이르렀다. 
마치 두 개의 주택 사이에 마차나 말탄 사람이 달릴 수 있는 한길이 있을지라도 
그 옆에 놀기 위한 조그만 길이나 골목이나 사잇길이 수없이 생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린이들을 위한 조그만 길이나 애인들을 위한 오솔길, 
거의 눈에도 띄지 않는 개나 고양이의 길이 생기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