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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知)와 사랑72. - Herman Hesse.

Joyfule 2012. 11. 10. 12:20
 
  지(知)와 사랑72. - Herman Hesse.   

옮긴이: 최달식
펴낸곳: 교육문화연구회
참된 비밀이나 영혼의 실제 형상은 사소한 이런 물 밑의 비밀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하자면 윤곽도 형태도 없는 요원하고 아름다운 가능성을 잠시 비춰만 줄 뿐 
포장으로 둘러쳐 있고 뜻도 애매했다. 
물 밑바닥의 어둠 속에서 잠시 동안 표현키 어려운 황금색 혹은 
은색을 지닌 그 무엇이 반짝 비쳐 온다.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라 하더라도 거룩한 약속에 충만되어 있다는 것은, 
마치 반쯤 가리워진 어떤 사람의 어렴풋한 실루엣에 때로는 한없이 아름다운 무엇이거나 
듣도 보도 못한 슬픈 무엇을 알려 주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혹은 밤길을 가는 짐 실은 마차 밑에 달린 램프가 
수레바퀴가 회전하는 거대한 그림자를 벽에 그리는 것처럼, 
그 그림자의 움직임이 일순간 버질의 작품 전체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정경이나 사건이나 이야기로 충만될 때도 있었다. 
꿈 같은 비현실적인 마법의 소재로 짜여져 
그것은 무이면서도 동시에 세상의 모든 형상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 모든 인간과 동물과 천사와 마귀의 형태를 지니고 있으며 
항상 깨어 있는 가능성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는 다시 그것에 몰두했다. 
 자신을 잊어버리고 흐르는 강물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형태도 없는 미광이 물 밑바닥에서 떨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왕관이나 발가벗은 여자의 어깨를 연상시켰다. 
언젠가 마리아브론 수도원 시절, 
라틴어나 그리스 어의 문자 속에서 똑같은 형태의 꿈과 변화의 마술을 본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그 이야기를 두고 나르치스하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던가? 
아, 그것은 언제쯤이었을까? 
몇백 년 전의 일이었을 테지? 
아, 나르치스! 
그를 만나 그와 한 시간만이라도 같이 이야기를 하고, 그의 손을 잡고, 
그의 나지막하면서 영리한 목소리를 들을 수만 있다면 
나는 금화 두 개를 기꺼이 던져 버릴 수도 있으리라.
물 밑의 금빛 반짝임이나 그림자, 넘실거리는 빛깔 등, 
비현실적이며 요정의 환상과도 같은 모든 것이 어쩌면 이다지도 아름다울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런 모든 것들은 예술가들이 심혈을 쏟아 만들어 낸 모든 아름다운 것들과는 
정반대의 의미가 있는데도 대관절 어쩌면 그렇게도 아름답고 또한 영롱한 것일까? 
그 이름도 지을 수 없는 아름다움에 모두 형태라는 것이 없고 
완전히 신비에서만 성립되었는데 예술품의 경우는 
그와 정반대로 완전하고 뚜렷한 언어를 발산하고 있었다. 
스케치되었거나 통나무에 새겨졌거나 한 것 중 머리나 입의 선보다 더 명확한 것은 없었다. 
정확하게 또한 극도로 정밀하게 그는 니콜라우스의 작품, 
마리아 상의 아랫입술이나 눈꺼풀을 묘사할 수가 있었으리라. 
거기에는 분명치 않은 것, 혼동 된 것, 흐리멍텅한 것은 한 군데도 없었다.
골드문트의 머리는 오직 한 가지 일로 꽉 차 있었다. 
가장 명확하고 형태가 뚜렷한 것이 가장 파악하기 힘들고 
형체도 없는 것과 아주 동일하다는 것이 어쩐지 그에게는 분명치가 않았다. 
그런데도 그런 생각에 자꾸 골몰해 있을 동안 한 가지가 명백해졌다. 
즉, 어디 하나 흠잡을 만한 여지가 없이 잘 만들어진 예술 작품의 대부분이 
전혀 그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지 못하고, 일종의 아름다움이 있는데도 지루하며 
거의 보기 싫게 생각되는 이유를 알게 되는 것이다. 
일터나 성당이나 궁전은 불쾌하기 그지없는 예술품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자신도 그중 몇 개를 만드는 데 협력했다. 
그런 작품은 최고의 것으로 욕망을 돋우면서도 그것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또한 그런 작품에는 신비라는 주제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심한 환멸감을 갖게 했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꿈과 최대의 예술 작품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신비스러움 외에 그 무엇도 없었다.
골드문트는 계속 생각을 이어 나갔다. 
내가 사랑하고 추구하는 것은 신비라는 것이다. 
나는 때때로 신비가 번뜩이는 것을 보았다. 
언제든 그것이 가능한 날이 있게 된다면 나는 그 신비를 예술로 표현하고 이야기시키고 싶다. 
그것은 위대한 산모 이브의 형상이다. 
그 신비의 본질은 다른 형상과는 달라서 이런저런 개개의 점, 
특별히 풍만하거나 수척하거나 선머슴 같거나 뛰어났거나 힘차거나 우아하거나 한 
그런 점에 있는 것이 아닌, 아무래도 융합하기 어려운 세계 최대의 대립, 
즉 출생과 사망, 호의와 잔인, 생명과 파괴 등이 이 형체 속에서 
서로 관계를 맺어 공존하고 있다는 점에 있는 것이다. 
내가 이런 형체를 생각해 낸 것이거나 또 그것이 단지 나의 사고의 유희이거나 
야심에 차 있는 예술가의 소망에 불과한 것이라면, 
그다지 서운해하지도 않고 그 결점을 깨달아 그 형상 자체도 잊을 수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생각해 낸 것이 아니라 보았기 때문에 이브는 이미 관념이 아니다. 
그것은 내 자신 속에 살아 있다. 
나는 그것을 몇 번이나 만나보았다. 
내가 처음으로 이브를 어렴풋이 감지한 것은 겨울 밤, 
해산을 하는 어느 아낙네의 침대 옆에 등잔을 들고 있을 때 였다. 
그때 이브의 형상이 나의 마음속에서 호흡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따금 한동안 멀리 가버려 눈에 보이지 않게 되지만 
어느 틈에 또다시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타났다. 
오늘도 그렇다. 
한때는 내가 가장 사랑하던 어머니의 형상이 
이 새로운 형상으로 송두리째 변해 버려 그 속에 들어가 있다. 
그는 이렇게 생각을 더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