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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知)와 사랑73. - Herman Hesse.

Joyfule 2012. 11. 11. 09:01
 
  
 지(知)와 사랑73. - Herman Hesse. 

옮긴이: 최달식
펴낸곳: 교육문화연구회
그는 지금 분명히 그의 현재 위치를 결정하는 데 불안을 느꼈다. 
그는 지금 나르치스와 수도원에서 이별하던 그때에 못지 않은 중대한 행로에 서 있는 것이다. 
아마 언젠가는 어머니가 모든 사람의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그의 두 손에 의해 작품으로 탄생될 테지. 
거기에 그의 목표가 있고 생활의 의미 또한 거기에 숨어 있으리라. 
그것은 그도 알 수 없었으나 단 한 가지만은 알고 있었다. 
즉, 어머니를 따르고, 어머니를 향해서 나아가고, 
어머니한테 끌려가고, 어머니에게 불려간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생명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는 어머니의 형상을 만들지 못할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언제라도 항상 꿈과 예감과 유혹으로만, 
그리고 거룩한 비밀이 황금빛 반짝임으로만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쨌든 이제는 어머니를 따라야 했으며, 
그의 운명을 어머니에게 맡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머니는 그의 별이기도 했으니까.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모든 것을 결정할 때다. 
모든 것은 명백해졌다. 
예술은 아름다운 것이었지만 여신도 아니요, 목표도 아니었다. 
적어도 그에게는 그랬다. 
그가 따라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예술이 아니라 어머니의 부름이었다. 
손가락을 익숙하게 움직이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나?
그것의 결과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니콜라우스 선생의 예로 보아서도 알 수가 있었다. 
명예와 명성, 돈과 안정된 생활에 이르는 것이 다른 한편으로는 
그 신비를 터놓는 유일한 방법인 내적 감각을 고갈시키고 위축시키는 길이기도 하다. 
값비싸고 예쁘장한 장난감을, 각종 사치스런 제단이나 설교단이나 
성세바스찬이나 예쁘장한 고수머리 천사의 머리를 만들 뿐이다. 
정말로 잉어 눈알 속에 황금빛이나 
나비의 날개 가에 있는 부드럽고 엷은 은색이 잔털 같은 것은, 
예술 작품으로 가득 찬 화려한 응접실보다도 한없이 아름답고 훌륭했다.
어떤 소년 하나가 노래를 부르면서 둑길을 따라 내려오고 있었다. 
간간이 노래가 멎었다. 
소년은 손에 들고 있던 커다란 흰 빵을 물어뜯었다. 
골드문트는 소년을 보자 빵 한 조각을 달라고 청한 후 
두 손가락으로 부드러운 쪽을 좀 뜯어가지고는 그것을 조그맣고 동그랗게 만들었다. 
그러고는 둑에 나서서 빵을 하나씩 천천히 물 속으로 집어던졌다. 
어두컴컴한 물 속에서 하얀 공 모양의 빵이 가라앉으면서
재빨리 몰려드는 고기들에 둘러싸이는 것을 보았다. 
그러더니 결국 어느 한 마리의 입으로 삼켜지고 말았다. 
그는 동그란 빵이 차례차례로 가라앉아 사라지는 것을 흐뭇한 만족감으로 바라보았다. 
그런 다음 그는 배고픔을 느껴 그의 애인 한 사람을 찾아갔다. 
푸줏간의 하녀로 있는 여자인데 그는 그 여자를 '소시지와 햄의 여왕'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평소처럼 휘파람을 불어 그 여자를 부엌 창문으로 불러내어서 
먹을 것을 얻어 강 저쪽의 포도밭에 올라가서 먹을 작정이었다. 
포도밭의 기름지고 빨간 흙은 싱싱한 포도나무 잎새 밑에서 힘차게 빛나고 있었다. 
봄이 되면 거기에는 포도 냄새를 은근히 풍겨주는 파랗고 조그만 히아신스가 핀다.
하지만 오늘은 결의와 각성의 날인 것 같았다. 
카트리네가 창가에 나타나 야무지고 약간은 선머슴 같은 얼굴로 이쪽을 향해서 방긋이 웃었다. 
그래서 평상시처럼 신호를 보낼 필요가 없었다. 
그는 전에 바로 이곳에 서서 그 여자를 기다렸던 때를 잠시 떠올렸다. 
그리고 동시에 지루할 만큼 확실하게, 잠시 후에 일어날 모든 광경이 눈앞에 그려졌다. 
그 여자는 그의 신호를 알아차리면 쏙 들어가서 
얼른 불에 구운 어떤 것을 손에 들고 집 뒷문으로 나타날 테지. 
그러면 그는 그것을 받아들고 동시에 그녀의 손을 어루만져 주며 
그녀가 원하는 대로 지그시 안아 준다. 
그러나 그런 것이 별안간 너무나 어리석고 추잡한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는 갑자기 그녀의 선량하고 선머슴 같은 얼굴에서 
넋빠진 표정을 너무 자주 보아온 어떤 기계적인 것을, 
신비가 깃들지 않은, 그에게 적합하지 않은 것을 본 것 같았다. 
그는 끝까지 평상시의 암호를 손으로 그릴 수가 없었다.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얼어붙어 버렸다. 
아직도 그 여자를 사랑하고 있단 말인가? 
아직도 정색한 태도로 그녀를 탐내고 있단 말인가? 
아니, 그는 너무 자주 이곳을 찾아들었고 너무 자주 똑같은 웃음을 보아 왔고, 
마음속에서의 소망도 없이 거기에 응해 준 것이다. 
어제까지도 주저하지 않고 할 수 있었던 것들이 오늘은 갑자기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녀는 아직도 창가에 서 있었으나 그는 벌써 돌아서서 
이제 두 번 다시는 그곳에 가지 않을 결심을 하고 골목길 안으로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