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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知)와 사랑78. - Herman Hesse.

Joyfule 2012. 11. 16. 11:13
 
  
 지(知)와 사랑78. - Herman Hesse.  

옮긴이: 최달식
펴낸곳: 교육문화연구회
 "실례합니다. 아무도 안 계십니까?"
이상하게도 안은 쥐죽은 듯이 고요했다. 
로베르트는 문 앞에 그대로 선 채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골드문트는 호기심에 끌려 안으로 들어갔다. 
오두막집 안에서는 지독한 냄새가 풍겼다. 
이상 야릇하고 가슴이 답답한 냄새였다. 
아궁이에는 재가 잔뜩 쌓여 있었는데 입김으로 호호 불어 보니 
밑바닥에 있는 곳의 뒤쪽 어슴푸레한 곳에 누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누군가 의자에 앉아 자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노파였다. 불러도 아무 기척이 없었다. 
앉아 있는 노파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쳤으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그 여자는 거미줄 한가운데 앉아 있었다. 
몇 오라기의 거미줄이 그 여자의 머리카락과 무릎에 단단히 엉켜 있었다.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속을 스치자 갑자기 무서워졌다. 
그는 확인을 하기 위해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휘저으며 남겨진 기다란 막대기에 불똥을 불어대자 
활활 피어올라 기다란 막대기에 불이 붙었다. 
그것을 가지고 앉아 있는 여인의 얼굴을 비춰 보니 
퍽 나이 들어 보이는 푸르죽죽한 시체의 얼굴이 나타났다. 
희멀겋게 치켜 뜬 한쪽 눈이 보였다. 노파는 의자에 앉은 채 죽은 것이었다.
활활 타는 막대기를 손에 들고 골드문트는 자세히 이곳 저곳을 훑어보았다. 
뒷방으로 통하는 문지방 위에 또 한 구의 시체가 드러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으로, 퉁퉁 부어오르고 
찌푸린 얼굴에 속옷만 입은 채로 문지방 모서리 위에 엎어져 있었다. 
두 손 다 조그만 주먹을 단단히 무섭게 쥐고 있었다.
 '두 사람째다' 하고 골드문트는 생각했다. 
악몽이라도 꾸고 있는 듯했다. 
창문이 열려서 밝은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조심스레 불을 마룻바닥에 문질러 껐다.
뒷방에는 침대가 세 개 놓여 있었다. 
하나는 비어 있고 남루한 회색 이불 밑에 짚이 그냥 드러나 있었다. 
두 번째로 침대에 또 한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텁석부리 사나이로 반듯이 누운 채 뻣뻣하게 죽어 있었다. 
머리를 뒤로 젖히고 턱과 수염을 곧추세우고 있었다. 
이 집 주인임에 틀림없었다. 
움푹 들어간 얼굴은 가까이할 수 없는 죽음의 색채를 띠고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한쪽 팔은 바닥까지 축 늘어져 있었다. 
거기에는 물통이 나동그라져 거기서 쏟아진 물이 
아직 바닥에 완전히 배지 않아서 움푹 들어간 쪽으로 몰려 괴어 있었다. 
또 하나의 침대에는 리넨 홑이불에 묻히듯이 
뚤뚤 감긴 튼튼하고 큰 키의 여자가 드러누워 있었다. 
그 옆에는 그 여자를 부둥켜안고 리넨 이불에 목이 졸린 것처럼 보이는 
아직 채 자라지 않은 소녀가 누워 있었다. 
소녀의 머리카락 역시 금발이었고 얼굴에는 청회색 주름이 있었다.
골드문트의 시선은 시체에서 시체로 옮겨갔다. 
소녀의 얼굴은 벌써 무척이나 변형되어 있었으나 
아직도 얼마간은 비참한 죽음의 공포를 남기고 있었다.
침대 속에 아무렇게나 푹 파묻혀 있는 어머니의 목덜미와 머리에서는 
분노와 불안과 도망치려고 하는 초조를 읽어낼 수가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아무래도 이대로 죽을 수 없다는 듯 빳빳이 곤두서 있었다. 
농부의 얼굴에는 이를 악물고 참아 견딘 반항과 고통이 나타나 있었다. 
그는 죽기는 힘들었으나 사나이답게 죽은 것 같았다. 
털투성이의 그의 얼굴은 전선에서 쓰러진 병사의 그것과 같이 
허공을 찌르듯 뻣뻣이 치켜올려져 있었다. 
가만히 그리고 꿋꿋이 뻗은 채 이를 악물고 있는 그 자세는 아름다웠다. 
이렇게 죽음을 맞이한 사나이는 비겁한 인간은 아니었으리라. 
하지만 문지방에 엎어져 쓰려져 있는 소년의 조그만 주검은 애처로웠다. 
그 얼굴은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았으나 문지방 위에 그 자세는 
단단히 쥐고 있는 조그만 주먹과 함께 어찌할 수 없는 고뇌와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고통에 대한 하염없는 저항 등 많은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는 듯했다. 
그의 머리 바로 옆에는 고양이가 드나드는 구멍이 뚫려 있었다. 
골드문트는 모든 것을 자세하게 관찰했다.
이 오두막집 속에서 전개된 광경은 정말 끔찍스러웠다. 
송장 냄새가 지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골드문트를 잡아당기는 크나큰 힘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것이 위대함과 운명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다지도 진지하고, 거짓 하나 없는 그 속의 무엇인가가 
그의 사랑을 물고 늘어져 그 영혼 속에까지 밀고 들어왔다.
그러는 동안 바깥에서는 로베르트가 겁이 났는지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골드문트는 로베르트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그 순간 불안과 호기심과 
아무것도 아닌 일에 사로잡혀 있는 살아 있는 인간이, 
시체들과 비교해 얼마나 가엾고, 한줌 흙의 가치조차도 없는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예술가만이 가질 수 있는 진정한 공감과 냉정한 관찰이 
묘하게 혼합된 감정으로 시체를 살펴보는 데 정신을 팔고 있었다. 
드러누워 있는 모습, 앉아 있는 모습, 머리며 손, 행위를 하다가 그대로 뻣뻣해진 모습, 
어느 것 하나 자세하게 관찰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무서운 공포가 휩싸인 이 집은 왜 이다지도 조용할까!
 왜 이다지도 이상하고 구역질나는 냄새가 날까! 
아궁이의 불똥이 아직도 희뿌옇게 비치고 있는 이 조그만 인가, 
시체가 널려 있고 죽음이 차 있는 이 집, 왜 이다지도 무섭고 슬퍼질까! 
움직이지 않는 이 사람들의 볼에서 이내 살이 떨어지고 
굶주린 쥐들이 그 손가락을 물고 늘어지리라. 
다른 사람들이 관이나 무덤 속에서 잘 감추고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데서 해치우는 
최후의 가장 비참한 것을, 즉 파멸과 부패를 여기 이 다섯 사람은 
자기 집 방에서, 대낮에 문을 잠그지 않은 채 태연히, 부끄럼도 없이 당해 버린 것이다. 
벌써 골드문트는 몇 차례나 시체들을 보아 왔었지만 
죽음이 이토록 가차없는 역할을 한 광경을 만난 적은 없었다. 
그는 그것을 깊이 마음속에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