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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知)와 사랑80. - Herman Hesse.

Joyfule 2012. 11. 19. 08:32
     
      
    지(知)와 사랑80. - Herman Hesse.   
    
    옮긴이: 최달식
    펴낸곳: 교육문화연구회
    어떤 마을에서는 아무 방해도 받지 않았고 어떤 오솔길도 지날 수가 있었다. 
    텅 비어 있는 집들도 많았고 수많은 시체들이 묻히지도 못한 채 밭이나 방에서 썩고 있었다. 
    외양간에서는 암소가 울부짖고 있었으며 어떤 가축들은 들판을 이리저리 헤매고 있었다. 
    두 사람은 몇 번이나 암소와 염소의 젖을 짜주고 먹이를 주었다. 
    또 숲기슭에서 염소 새끼나 돼지 새끼를 잡아 구워먹고
    주인이 죽은 지하실에서 포도주나 과일주를 꺼내서 마셨다. 
    무척이나 풍족한 생활을 보냈다. 
    어딜 가도 먹을 것은 넘치도록 있었다. 
    하지만 맛은 별로 없었다. 
    로베르트는 자꾸만 페스트를 무서워했다. 
    시체를 보면 그는 구역질을 했다. 
    공포 때문에 실신할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몇 번이나 그는 전염됐다는 생각을 가져 
    머리와 손발을 긴 시간 야영 모닥불 속에 집어 넣기도 했다
    --그것이 그 병에 효과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 뿐만이 아니라 자다가도 
    발이나 팔이나 어깨에 종기나 있지 않은가 하고 온몸을 비벼댔다.
    골드문트는 몇 번이나 로베르트를 나무라고 멸시했다. 
    그렇지만 공포와 구역질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다. 
    골드문트는 광범위한 죽음의 광경에 심하게 압도되고, 
    가슴은 음습한 장송가 소리가 무겁고, 긴장되고 음산한 마음으로 죽음의 나라를 지나쳤다. 
    간혹 영원한 어머니의 형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보는 사람을 돌로 만들어 버리는 요괴 메두사의 눈을 가진, 
    또한 괴로움과 죽음에 가득 찬 무거운 웃음을 머금은 희뿌옇고 크나큰 얼굴이었다.
    어느 날, 두 사람은 조그만 마을에 이르렀다. 
    집 높이만한 성벽이 마을을 빙 둘러싸고 그 위에는 망보는 통로가 나 있었으나 
    위에는 누구 하나 보초를 서는 사람이 없고 
    활짝 열어젖힌 성문에도 사람 그림자 하나 없었다. 
    로베르트는 마을로 들어가기 꺼려 골드문트한테도 들어가지 말라고 애원했다. 
    그때 종 소리가 들렸다. 
    성문에서 신부가 십자가를 손에 들고 나왔다. 
    그의 뒤에서 세 대의 짐마차가 따라 나왔는데, 
    두 대는 말이 끌고 한 대는 황소가 끌고 있었다. 
    마차엔 위에까지 차곡차곡 시체가 쌓여 있었다. 
    몇 사람의 인부가 이상한 망토를 입고 깊숙이 두건을 써 얼굴을 감추고 
    마차 옆에서 말과 소를 몰고 있었다. 
    로베르트는 얼굴빛이 파래져서 곧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골드문트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시체 실은 마차 뒤를 따랐다. 
    이삼백 발짝쯤 걸어갔는데 거기에는 묘지도 없고 
    전혀 아무것도 없는 들판 한가운데에 구덩이가 있었다. 
    골드문트는 그대로 서서, 막대기나 쇠갈퀴를 든 인부들이 시체를 마차에서 끄집어내려 
    그것을 그냥 흙더미째 구덩이에 처넣는 것을 보고 있었다. 
    신부는 그 위에서 몇 마디 중얼중얼하다가 십자가를 흔들며 떠나가 버렸다. 
    인부들은 밋밋한 무덤의 사방에 불을 놓고 아무 말도 없이 시내로 사라져갔다. 
    누구 하나 무덤을 덮어 주려고 하지 않았다. 
    내려다보니 쉰 구 이상의 시체들이 그 안에 처박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알몸뚱이가 많았다. 굳어버린 체 무엇인가 애원하듯이 손이나 발을 허공에 뻗고 있었다.
    그가 성문 앞으로 돌아오니 로베르트는 당황스레 서두르면서 
    먼저 가겠다고 거의 무릎을 꿇다시피 애원하고 있었다. 
    사실 그가 애원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는 골드문트의 방심한 눈초리 속에서 그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바로 그 
    명상에 잠긴 고집과 무서운 것에의 집착, 가공할 만한 호기심을 보았기 때문이다. 
    결국 골드문트는 혼자서 시내로 돌아갔다.
    보초도 서 있지 않은 성문을 지나갔다. 
    그는 돌바닥에 울리는 자신의 발소리를 들으며, 
    이제까지 그가 지나온 수많은 소읍이나 성문들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오는 것을 느꼈다. 
    그곳에서 울부짖던 아이들, 소년들의 장난, 여인들의 싸움, 
    아름다운 음향을 던져 주는 대장간의 모루채 소리, 덜거덩거리는 마차 소리, 
    그 외에도 무수한 소리들과 그를 맞이해 주었던 광경들이 그의 머릿속에 펼쳐진다. 
    부드러운 소리, 딱딱한 소리들이 한데 뒤얽혀 
    인간의 노동이나 환희, 일, 사교 따위를 알려 주었다. 
    하지만 여기 텅 빈 집 문과 사람 하나 없는 거리에는 그 어느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모든 것이 죽음에 침묵 속에 굳게 갇혀 
    펑펑 솟구치는 샘물의 멜로디가 너무도 높고 크게 울려왔다. 
    활짝 열어 놓은 창문 뒤에는 여러 가지 빵이 진열되어 있었고 
    그 한가운데 빵 장수가 있는 것이 보였다. 
    골드문트는 제일 좋은 빵을 가리켰다. 
    빵 장수는 기다란 집게로 조심스레 빵을 내주며 돈을 내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골드문트가 돈도 내지 않고 빵을 베어 물며 그냥 가버리자 
    빵 장수는 창문을 쾅 닫기는 했어도 투덜대지는 않았다. 
    어느 아담한 집의 창문 앞에 점토 화분이 줄을 지어 있었다. 
    보통 때면 거기에는 꽃이 만개해 있을 텐데 
    지금은 시든 잎새들만 텅 빈 화분 위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어느 집에서 어린애들의 흐느낌과 통곡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다음 골목에서 골드문트는 
    예쁘게 생긴 처녀 하나가 선 채로 빗질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여자가 그의 시선을 느끼고 내려다볼 때까지 골드문트는 여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여자에게 미소를 던지자 여자의 빨갛게 상기된 얼굴에서 
    서서히 그리고 희미하게 웃음이 스쳐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