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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知)와 사랑79. - Herman Hesse.

Joyfule 2012. 11. 17. 11:13
 
  
지(知)와 사랑79. - Herman Hesse.   

옮긴이: 최달식
펴낸곳: 교육문화연구회
문 앞에서 울부짖듯 외쳐대는 로베르트의 고함 소리에 결국 방해를 받아 바깥으로 나왔다. 
친구는 벌벌 떨며 그를 쳐다보았다.
  "왜 그래요?"
  공포에 질린 로베르트는 목소리까지 낮추어 물었다.
  "안에 아무도 없어? 당신은 왜 그런 눈을 하고 있지? 이야기 좀 해줘!"
  골드문트는 냉정한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들어가서 네 눈으로 확인해 봐. 이상한 농가야. 
나중에 저기 있는 암소의 젖이나 짜자. 그럼, 들어가 봐!"
로베르트는 한동안 망설이다가 집 안으로 들어가서는 아궁이가 있는 곳까지 더듬어갔다. 
거기서 앉아 있는 노파를 발견했다. 그것이 시체라는 것을 알자 
그는 고함을 질렀다. 그는 눈이 휘둥그래져서 얼른 밖으로 뛰어나왔다.
  "아이구! 죽은 노파가 아궁이 옆에 앉아 있단 말야. 어떻게 된 거야? 
왜 아무도 옆에 없지? 왜 묻어 주지 않아? 아이구 이 냄새!"
골드문트는 빙그레 웃었다.
  "넌 말이야, 로베르트. 대단히 용감해. 하지만 너무 빨리 서둘러 나왔어. 
죽은 할머니도 저렇게 의자에 앉아 있으면 정말 볼 만하거든. 
하지만, 한두 발짝 더 가보면 더 볼 만한 것이 있을 거야. 다섯이야, 
로베르트. 침대에 있는 것 셋이고 문지방 한가운데 어린애가 죽어 있단 말이야. 
모두 죽었어. 가족은 모두 쓰러져 죽었어. 이 집엔 시체밖에 없단 말이야. 
그래서 아무도 저 암소의 젖을 짜지 못한 거야."
 어이가 없다는 듯 그는 골드문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별안간 숨이 막힐 듯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옳아, 이제야 난 어제 농부들이 우릴 마을에 안 들여 놓으려 한 이유를 알았어. 
그래 그래, 이제야 모든 게 확실해졌어. 페스트야! 
목숨을 걸고 말하겠는데 확실히 페스트야. 
골드문트, 당신은 오랫동안 그 안에 있었으니 틀림없이 시체를 만졌겠지. 
비켜, 내게로 다가오지 마! 당신은 틀림없이 균이 묻었어. 
골드문트, 섭섭하지만 난 떠나야겠어. 당신 옆에 더 이상 있을 수 없단 말야."
그는 황급히 달아나려고 했지만 순례복 깃을 단단히 붙들렸다. 
골드문트는 로베르트를 무언의 비난 속에서 준엄하게 쳐다보며 
빠져나가려 발버둥치는 그를 가차없이 단단히 붙들었다.
  "요 꼬마야"
  그는 정겨움과 멸시가 섞인 어조로 말했다.
 "넌 생긴 것보담 똑똑하구나. 
네가 말한 그대로일지도 모르지. 이 다음 집이나 마을에 가면 알게 될 거야. 
아마 페스트가 이 지방에 퍼져 있을지도 몰라. 
우리가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지 어떨지는 곧 알게 될 테지. 
하지만 널 그냥 보낼 수는 없단 말이야, 요 꼬마 로베르트야. 난 널 놓칠 수는 없어.
이봐, 나도 인정이 있는 놈이야. 내 마음은 너무나 약하단 말이야. 
너 역시 저 집안에서 벌써 전염이 됐을지도 몰라. 
만일 여기서 널 놓치고 만다면 너는 어느 이름 모를 들판에 쓰러져서 혼자 죽어갈 거야. 
그렇게 되면 너의 눈을 감겨 주는 사람도, 너의 무덤을 파주는 사람도, 
흙을 덮어 주는 사람도 없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아니, 로베르트, 
이봐 난 불쌍해서 숨이 막힐 지경이야. 그러니 말이지, 
난 두 번 다시는 말하지 않을 테니까 정신을 바짝 차려 
내가 말하는 것을 잘 들어 두란 말이야, 알겠니? 
우리 두 사람은 똑같은 위험 속에 놓여 있어. 
네 가슴에 화살이 꽂힐지 내 가슴에 꽂힐지 그것은 몰라. 그러니 같이 있잔 말이야. 
우리에겐 같이 죽거나 같이 이 저주받은 페스트를 빠져나가든가 하는 두 가지 길밖엔 없어. 
네가 병이 들어 죽게 되면 내가 묻어 줄 거야. 꼭 그렇게 할 거야. 
만일 내가 죽게 된다면 네 마음대로 하려무나. 
나를 묻어 주든 도망쳐 버리든 나에게는 아무 상관없어. 
하지만 그 전에는 놓치지 않는단 말이야. 알아 둬! 우리는 서로 친구가 필요하단 말야. 
자, 그만 지껄이자. 나는 아무 말도 듣기 싫어. 이쯤 해두고 어디 아무데서나, 
외양간에서라도 통을 찾아 우유를 짜지 그래."
로베르트는 그대로 했다. 
이때부터 골드문트는 명령하는 사람이 되고 로베르트는 복종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두 사람 다 불편없이 지냈다. 
이제 로베르트도 도망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변명하듯 말했다.
  "난 그때 당신이 약간 무서웠어. 
당신이 시체 있는 집에서 돌아왔을 때의 얼굴이 보기 싫었어. 
페스트를 묻혀 가지고 왔구나 하고 생각했지. 
하지만 페스트가 아니더라도 당신 얼굴은 변해 있었어. 
그 집에서 본 게 그토록 무시무시했어?"
"무섭긴. 내가 거기서 본 것은 말이야, 나한테도 너한테도, 
아니 어떤 사람한테도 절박한 것이었어. 
우리가 페스트에 걸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유랑을 계속하는 동안 이내 두 사람은 여러 곳에서 
그 지방을 휩쓸고 있는 페스트와 부딪쳤다. 
다른 지방 사람을 들여놓지 않는 마을은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