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知)와 사랑83. - Herman Hesse.
옮긴이: 최달식
펴낸곳: 교육문화연구회
어느 날. 같이 우유를 마시며 가족적인 분위기에 잠겨 있을 때
레네가 별안간 꿈꾸는 듯한 소리로 말했다.
"이러다가 겨울이 오면 어떠하지?"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로베르트는 깔깔대고 웃고 있었으며
골드문트는 아무 말 없이 앞만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도 겨울 걱정을 하지 않는다.
아무도 긴 시간 여기 그냥 주저앉아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다.
고향이라고 하지만 참다운 고향이 아니라는 것,
단순히 유랑의 길동무가 되어 있다는 것을 레네는 차차 깨달았다.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골드문트는 어린아이를 상대로 말하는 것처럼
농담과 격려의 말을 섞어 가며 이렇게 말했다.
"넌, 농부의 딸이라서 그런지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구나.
레네, 걱정할 것 없어. 페스트의 만연기가 끝나면 꼭 집에 갈 수 있을 거야.
페스트도 언제까지 퍼져 있진 않아.
그게 끝나거든 부모님께 가든지 딴 친척한테 가든지 해.
안 그러면 마을로 다시 돌아가서 식모살이를 하든 돈을 벌든 하면 돼.
하지만 지금은 여름이야. 어디에도 죽음만이 널 기다리고 있어.
하지만 여긴 깨끗하고, 우리하고 편하게 지내잖아.
그러니 그냥 여기 있어. 마음이 내킬 때까지 여기 있으란 말이야."
"그리고 그 다음은요?"
레네가 소리쳤다.
"그 다음은 만사가 다 끝이에요? 당신은 가버리나요? 그러고 나면 난?"
골드문트는 그녀의 긴 머리를 가만히 잡아당겼다.
"바보 같은 꼬마야, 넌 벌써 시체 치우는 인부도,
집안 사람이 다 죽어 없어진 집도,
불이 활활 타고 있는 교외의 크나큰 구덩이도 다 잊어버렸니?
그 구덩이에 엎어져 속옷이 비에 젖는 것을 면한 은혜에 감사드려야 할 판이야.
너도 도망쳐서 손발이 포동포동해지고
웃으며 노래부를 수 있는 자신을 고맙게 생각해야 된다구."
그래도 여자는 좀처럼 만족해하지 않았다.
"하지만 난 전혀 이곳에서 떠나고 싶지 않은 걸."
레네는 힘없이 내뱉었다.
"당신은 놓치기도 싫어. 싫어요.
금방 모든 것이 끝나버린다는 것을 생각하면 하나도 즐겁지가 않아요!"
골드문트는 정답지만 위협하듯 나지막하게 다시 한 번 대답했다.
"레네, 그것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모든 성현들이 다 생각을 거듭했어.
오래 지속되는 행복 같은 건 있지도 않아.
만약, 우리들이 갖고 있는 것이 네 마음에 들지 않거나
기쁨을 가져다주지 않는 거라면 나는 서둘러 이 오두막에다 불을 놓겠어.
그리고 우리 다같이 각기 좋아하는 곳으로 가자꾸나. 이제 그만두자,
레네, 이야기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해."
그녀는 고분고분 말을 듣고 있었으나
그녀의 행복 위에 검은 그림자가 하나 드리워진 셈이었다.
14
여름이 아직 완전히 다 가기도 전에 오두막집 생활은
그들이 생각지도 않았던 형태로 종말을 고했다.
어느 날 골드문트는 새를 잡는 돌화살을 가지고
소쩍새나 그 밖의 다른 짐승을 잡으려고 그 근방을 어슬렁거렸다.
먹을 것이 별로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레네는 가까이에서 딸기를 따고 있었다.
때때로 그는 레네 곁을 지나치며 레네 속옷 밑으로 드러나 보이는 목덜미 위로
레네의 빨개진 얼굴을 보기도 하며 그녀의 노랫소리를 들었다.
때로는 레네가 갖고 있는 딸기를 조금씩 훔쳐먹으며,
그녀를 쳐다보지 않고 그냥 앞으로 가기도 했다.
그는 그리움과 권태의 감정을 번갈아 느끼며 레네를 생각하고 있었다.
레네가 장래 이야기를 끄집어낸 것이었다.
임신한 것 같다고도 했고 그를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고도 했다.
이제 모든 것은 끝났어. 그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때는 로베르트도 남겨두고 혼자 떠나겠어.
겨울쯤에는 니콜라우스 스승한테 가기로 하고 겨울을 거기서 보내자.
이듬해 봄에는 좋은 신발이나 사서 뛰쳐나와 고생을 하더라도
마리아브론 수도원으로 가서 나르치스한테 인사라도 하자.
아마 그를 보지 못한 것이 10년쯤 되었을까?
하루만이라도 좋아. 그를 만나야겠다.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그를 명상에서 깨어나게 해주었다.
별안간 그는 온갖 생각과 희망을 가지고 멀리 떠나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귀를 곤두세우고 그 소리를 들었다.
불안에 가득 찬 소리가 되풀이되었다.
분명 레네의 목소리였다.
레네는 크나큰 곤경에 빠져 있는 것처럼 그의 이름을 불렀던 것이다.
그는 여전히 얼마간 짜증을 내며 발걸음을 다급히 옮겼다.
레네의 울부짖는 소리가 반복되자 그의 마음속에서 동정과 연민이 우러나왔다.
겨우 레네를 발견했을 때 그녀는 갈기갈기 찢어진 속옷 바람으로
그녀를 정복하려는 사나이와 격투를 하고 있었다.
골드문트는 단숨에 달려갔다.
그의 마음속에 있는 화와 불안, 슬픔이
알지 못하는 이 폭한에 대한 미칠 듯한 분노로써 폭발하고 말았다.
사나이가 레네를 완전히 땅바닥에 눌러 덮치려는 순간
골드문트는 놈을 불시에 습격했다.
드러난 레네의 젖가슴에선 피가 흐르고 있었다.
무뢰한 강한 욕정을 참을 길 없어 레네를 끌어안았던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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