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知)와 사랑81. - Herman Hesse.
옮긴이: 최달식
펴낸곳: 교육문화연구회
"빗질은 금세 끝나니?"
골드문트는 위를 쳐다보고 소리쳤다.
여자는 생글거리며 얼굴을 창틈으로 내밀었다.
"병에 아직 안 걸렸었니?"
그가 물었다.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나와 함께 이 죽음의 도시에서 도망치자. 숲속에 들어가서 재미있게 살자구."
여자는 무슨 말을 하려고 했다.
"뭘 망설이는 거지? 나는 진심으로 말하고 있는 거야."
골드문트는 소리쳤다.
"넌 부모님과 같이 있니? 아니면 이 집에 세들고 있니?
남의 집이로군. 그럼 나오렴. 늙은 것들도 죽도록 내버려 두지 그래.
우리는 젊고 몸도 튼튼하잖아. 잠깐 동안이나마 좀 재미있게 지내자꾸나.
이리 와요, 갈색 눈의 아름다운 아가씨! 농담이 아니라구"
처녀는 놀라 망설이면서 그를 뚫어지게 내려다보았다.
그는 슬금슬금 물러나서 인적 없는 골목길을 한 바퀴 돌다가 다시 돌아왔다.
처녀는 여전히 창가에 고개를 내밀고 서 있었다.
그가 돌아온 것이 무척이나 반가운 모양이었다.
그 처녀는 이내 따라와서 성문에까지 가기도 전에
조그만 보퉁이를 손에 들고 빨간 수건을 머리에 친친 감고서 그와 한데 어울렸다.
"이름이 뭐지?"
그가 물었다.
"레네. 당신하고 같이 갈 테야.
이 도시는 아주 지독해. 전부 죽잖아. 어서 가요, 가요!"
성문 근처에서 로베르트가 얼굴을 찌푸리고 땅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는 골드문트가 오자 벌떡 일어나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처녀를 바라보았다.
이번만큼은 그도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불평을 토하다가 급기야 말다툼이 벌어졌다.
저주받은 페스트 소굴에서 사람을 데리고 나와 길동무가 되라고 강요하다니,
이건 정신이 나갔어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시험하는 거다, 나는 싫다, 이제 같이 가지 않겠다,
나의 인내도 이제는 마지막이다, 하는 내용이었다.
골드문트는 그가 이성을 되찾을 때까지 저주를 하건 울부짖건 그냥 내버려 두었다.
"로베르트, 잠꼬대는 실컷 한 것 같으니 이제는 그만 같이 가자.
아름다운 길동무가 생긴 걸 너도 기뻐하게 될 거야. 이름은 레네고 내 곁에 있을 거다.
그렇지만 이제 너도 기쁘게 해주마. 로베르트, 알겠니.
우리는 좀 쉬었다가 건강한 생활을 하자꾸나, 페스트를 피하는 거다.
빈 오두막집이 있는 아담한 장소를 찾든지 우리가 새 집을 세우든지 해서
거기서 난 레네와 같이 부부 생활을 할 거야. 너는 친구로서 같이 사는 거란 말이다.
좀 정답고 즐겁게 지내자꾸나. 알겠어?"
로베르트는 승낙했다.
레네와 악수를 하라거나 그녀의 옷을 만지라고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알았어."
골드문트는 말했다.
"그런 것은 요구하지 않겠어. 아니, 그뿐만이 아냐.
레네한테 손가락을 대는 것까지도 엄금이다. 그런 건 꿈도 꾸지 마라!"
세 사람이 짝이 되어 앞으로 걸어갔다.
처음에는 아무 말도 없었던 처녀가 차차 입을 열기 시작했다.
다시 하늘과 나무와 풀밭을 보게 된 것이 얼마나 기쁜가를,
페스트의 도시, 그곳의 공포를 어떻게 표현해야 좋은가를
그녀는 이야기를 해서라도 그녀가 목격해야만 했던
비참하고 오싹 몸서리치는 광경에서 자신의 마음을 해방시키려고 했다.
그 마을들은 지옥임에 틀림없었다.
의사 둘 중에서 하나는 죽고, 다른 한 사람은 부자집에만 간다는 것,
거의 집집마다 시체가 뒹굴고 있으나 실어내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시체가 썩고 있다는 것,
어느 집에서는 시체를 갖다 묻는 인부들이 도둑질을 하고 음탕하게 간음도 했다는 것,
또 그들이 가끔 아직도 목숨이 남아 있는 병자도
시체와 함께 구덩이 속에다 내동댕이쳤다는 것 등을 이야기했다.
그 외에도 그녀는 여러 가지 끔찍한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누구도 처녀의 이야기를 막지는 않았다.
로베르트는 놀라는 가운데도 흥미있게 듣고 있었으며,
골드문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조용한 표정이었다.
레네는 결국 지치고 말았다.
눈물은 마르고 알고 있는 모든 이야기를 다 해버린 듯했다.
골드문트는 천천히 걸어가면서 몇 절이나 되는 긴 노래를 나직하게 부르기 시작했다.
그는 점점 목청을 돋우어갔다.
레네는 방긋이 웃음을 띠었다.
로베르트는 즐겁고, 또 한편으로는 매우 이상하다는 듯 듣고 있었다.
이제껏 골드문트가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듣지 못했었다.
골드문트는 어찌 된 영문인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이상한 인간이다! 미묘하고 맑은 노랫소리. 하지만 목청.
둘째 절 노래에서는 레네도 가만가만 따라 불렀고 이내 모두들 목청을 돋우어 합창했다.
저녁 무렵 저 멀리 황무지 너머에는 까만 숲이, 그 건너에는 푸르고 낮은 산들이 있었다.
산들은 안쪽에서 더욱 푸르러 가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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