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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조선 선교와 이화의 시작

Joyfule 2007. 9. 14. 03:47
 
초기 조선 선교와 이화의 시작       

닫혀진 빗장을 열기위하여 중국의 1840년 아편전쟁의 패배로 
외세에 문을 열었으며, 일본도 1854년 페리 제독의 무력 앞에
 문을 열게 되었지만, 우리 민족의 문은 굳게 닫혀져만 갔다. 
조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러 왔던 토마스(Robert Thomas) 선교사는 
1866년, 평양 대동강에서 목 베임을 당하여 순교하였고, 
같은 해 서울 한강에서는 병인양요 사건으로 수많은 사람이 
잠두봉(절두산)에서 목이 잘라져 한강으로 내던져졌다. 
이러한 쇄국정치는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오는 길목을 막고 있었지만, 
그 닫혀진 문을 열기 위해 중국과 일본에 들어와 있던 
선교사님들은 최선을 다하여 준비하고 있었다. 
멕킨 타이어와 로스 선교사는 중국 선교사였지만 
평양 대동강에서 이십 칠세의 나이로 꿈도 이루지 못하고 
목 베임을 당한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의 피를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우리 민족의 선교사로 일하셨다. 
당시 압록강 넘어 고려 문에 장사하러 오는, 조선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전도하기 시작하였고, 
그들과 함께 성경까지 번역(Ross역 ) 하면서 조선 선교를 준비하셨다. 
일본에서도 신사유람단으로 갔던 이수정이 죠지 낙스(George Knox) 선교사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성경을 번역(이수정 역 - 마가복음)하여 조선 선교를 준비하셨다. 
조선 땅에 문만 열려지면 복음을 들고 들어갈 만반의 준비를 다하고 있었다. 
드디어 1882년 한미 수호조약이 체결된 후, 한영, 한불, 한독, 한러.... 외세에 문호가 열리게 되었고, 
조선을 향한 아름다운 발걸음 
조선 땅에 문호가 열렸다는 정보가 들려지자 세계를 품은 그리스도인들은 반응하기 시작하였다. 
일본 땅에서 사역을 하고 계셨던 멕크레이 선교사는 1884년 6월 직접 조선을 방문하여 
고종황제에게 '의사'와 '언어선생 세 사람'을 보내달라는 두 가지 윤허를 받아내었다. 
이제 조선 땅에 합법적으로 들어올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이 정보가 오하이오주에서 병원 문을 열었던 한 젊은 의사에게 들려지게 되었다. 
예일 대학을 졸업하고 뉴욕 의과대를 나와서 개업을 한, 윌리암 스크렌톤(William Scranton) 이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어머니와 부인 세 사람이 행복하고 안정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는 조선에 의사로 들어갈 수 있다는 정보를 듣고 모든 것을 정리하고 조선 땅에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이화의 어머니, 메리 스크렌톤(Mary Scranton) 선교사 
아들 윌리암 스크렌톤 내외가 조선에 선교사로 가기로 결심하였을 때, 
그들의 첫 번째 장벽은 쉰 살이 넘은 어머니였다. 
선교사로 가기에는 너무 많은 나이였고, 
홀어머니를 본국에 혼자 두고 간다는 것은 더 더욱 어려운 문제였다. 
아들이 자신의 문제로 고심하는 것을 알고는 메리 스크렌톤 여사는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 하나님 나도 조선 땅에 가서 복음을 전하게 해주세요 ” 
메리 스크렌톤 여사는 단지 아들 가족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선교사로 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녀는 직접 여성 선교부를 찾아가서 자기를 조선 선교사로 파송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 요청은 참으로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불가능을 가능하게 한 것은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였다. 
하나님은 윌리암 스크렌톤 부부와 쉰 살이 넘은 
어머니까지 조선 땅에 선교사로 오실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셨던 것이다. 
조선에 도착하다 
그들은 망망한 대해, 태평양을 20일 넘도록 항해하여 
일본에 잠시 머문 후, 다시 배를 타고 부산을 거쳐 인천항에 도착하였다. 
근 한 달간의 긴 항해였다. 
스크렌톤은 1885년 5월 3일에 먼저 들어왔고, 
뒤를 이어 어머니와 부인은 6월 20일에 한국에 도착하였다. 
스크렌톤 선교사 가족은 아펜젤러 가족과 언더우드 선교사 바로 뒤를 이어 
조선 땅을 밟은 선교사가 초기 조선 개척 선교사가 되었다. 
이화의 첫 학생 
당시 조정은 의료와 학교 외에 선교는 절대로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윌리암 스크렌톤 선교사는 9월 10일 정동병원을 개원하여 이름을 시병원이라고 짓고 
조선 선교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메리 스크렌톤 선교사님은 쉰 살이 넘어서 조선 땅을 밟았는데 
근 일년 동안 한국 말을 배우면서 길을 열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다. 
메리 스크렌톤 선교사에게 하나님은 길을 열어주셨다. 
아들 윌리암 스크렌톤이 시작한 병원에 첫 번째로 찾아 온 환자가
병들고 가난한 자기 집에서는 딸아이를 도저히 돌볼 수가 없다는 이야기였다. 
메리 스크렌톤 선교사님은 그 여자 아이를 집에 대려다가 돌보면서 가르치기 시작하였는데(1886년 5월 31일) 
그 여학생이 바로 이화의 첫 학생이 된 것이다. 
메리 스크렌톤 선교사님은 후에 정동에 기와집을 얻어 학교를 시작하게 되었고, 
고종 황제로부터 이화학당이라는 이름을 하사 받았다. (1887년 2월) z 
이화여대 출신 선교사 
메리 스크렌톤 선교사가 작은 기와집에서 시작한 이화는 100년을 훨씬 넘겼다. 
이 역사의 뒤안길을 돌아보면, 이화는 미션스쿨의 정신을 이어받아 수많은 선교사를 배출하였다. 
해방 후에 김활란 총장이 중심이 되어 이화여대에 선교운동이 시작되었고, 
전재옥 선교사를 포함한 세분의 선교사가 선두 주자로 파키스탄에 파송되었고, 
그 바톤을 이어받은 수많은 이화여대 출신 선교사가 세계 곳곳에 파송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