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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 박연구

Joyfule 2015. 11. 22. 20:45

 

 

[인원모집]7/25일 팝아트초상화그리는법 - 미술원데이 클래스-드로잉앤시티

 

 

초상화 - 박연구 

 

 

 어느 날 아내와 같이 육교 위를 지나다가 아버지에게 드릴 선물을 하나 샀다. 아내가 옆구리를 툭 건드리면서 저거 하나 사자고 해서 돌아봤더니 손톱깎이·주머니칼·구두주걱 등을 길바닥에 놓고 파는 가운데 대나무로 만든 등긁이(노인들이 등을 긁는 데 쓰이는 기구)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그런 것들을 예사로 봐왔던 것이다. 확실히 여자들의 눈은 자상한 데가 있었다.

 

 아내는 시장에 다녀오면서도 으레 아버지 드릴 과일 같은 걸 사왔다. 언젠가는 아버지 방에 들어서니까 향그러운 냄새가 확 풍기었다. 눈여겨보니 책상 위에 어린아이 머리통만큼 큰 유자가 한 개 놓여 있었다.

 “어멈이 사다 놓더라.”

이런 아버지의 말씀에서 나 자신이 효도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실 나로서는 직접적으로 아버지한테 어떤 효성을 표시할 수가 없었다. 설령 내가 생각해낸 일일지라도 아내를 통해서 표현해왔던 거다.

 

 어려운 시집살이 얘기 중 이런 것이 생각난다. “나막신을 신고 외벽을 탈 테냐, 홀시아버지를 모실 테냐”를 물으면 대부분의 여자들은 전자를 택하겠다고 답한다는 것이다. 홀시아버지를 모신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는 설명이 필요치 않다.

 

 나의 어머니는 10년 전(1964년)에 신장염으로 돌아가셨다. 그 후로 나는 아내로 하여금 딸도 없는 우리 아버지를 친아버지처럼 모시도록 당부를 하였지만 마음은 항상 송구스럽기만 했다. 면환免鰥을 해드렸어야 자식된 도리라는 것쯤은 모르지 않았지만, 건강이 나쁘신 분에게는 그 길만이 효성이 아닌 줄로 알아 오늘에 이르고 말았다. 칠순이 다 되신 아버지는 이제 가실 날만 예비하시는 모습으로 일요일이면 교회에 다녀오시는 것이 유일한 낙이 된 것처럼 보였다.

 

 나는 아이들에게 할머니의 모습을 사진으로라도 인식시켜주려 했지만 헛수고에 그칠밖에 없었다. 생전에 사진이라고는 도무지 찍으려 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독사진 하나가 없고, 다만 여러 사람과 함께 찍힌 카메라 사진은 몇 장 있었지만 녹두알 크기의 어머니 모습을 도저히 아이들에게 인식시킬 재간이 없었다.

 

 어머니의 유품에서 겨우 도민증 사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금의 주민등록증처럼 비닐 케이스에 들어있지 않았던 것이라 모습을 선명하게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구겨진 것이지만 소중하게 여겨졌다.

 

 나는 S지의 원고료를 받아 넣고 나오는 길에 광화문에 있는 어느 초상화집에 들러 어머니의 초상화를 부탁했다. 내가 굳이 원고료를 가지고 어머니의 초상화를 맡긴 데는 이유가 있다.

 

 군에서 제대하고 나와 취직도 못하고 밤늦도록 원고를 쓰고 있자니까, 옆에 계신 어머니가 그걸 써내면 돈이 되어 나오느냐고 물으셨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서 그렇다고 대답해드렸던 것인데, 그 글이 발표되기도 전에 53세밖에 아니 된 연세로 이승을 떠나버리신 일이 뼈에 사무치게 한恨이 되었다. 글이라고는 ‘개조심 猛犬注意’ 정도밖에 해득을 못하시는 어머니가 아들들의 학비를 보태신다고 남의 문전을 기웃거리는 행상의 고달픈 하루하루를 보내시다가 그리 되신 것이다. 더욱이나 문학이 무엇인지는 전혀 짐작도 못하시면서 그저 대단한 것으로 여기시고 거기에다 돈(원고료)이 나온다는 사실에 그토록 대견스럽게 아셨던 어머니에겐 언젠가는 한 권의 책으로 내어 그분의 영전에 바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초상화를 찾아다가 아이들에게 보이면서 할머니라고 일렀더니 여섯 살 막내가 할머니 아니라고 했다. 도민증을 발급받기 위해 찍은 사진이라 45세 되시던 때의 모습인 만큼 아이들 눈에는 할머니라는 아미지가 부각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어머니의 초상화를 아버지 방에 걸어드렸다. 보고 또 보더니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틀리다!” 하셨다. 이처럼 자식으로서 듣기 거북한 말씀이 어디 있으랴. 돌아가신 어머니를 어떻게 아버지 앞에 부활하도록 해드린단 말인가.

 

 구겨진 도민증 사진을 그렸는데 도저히 똑같게는 재생시킬 수가 없음은 너무도 당연하다. 사실 선명하게 찍힌 사진이 있어서 그와 똑같은 초상화를 그렸다고 해도 아버지는 “틀리다!”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다시 살아오는 기적이 이뤄지지 않는 한 아버지는 여전히 “틀리다!”고 하시리라.

 

 많지 않은 돈을 주고 산 등긁이였지만 이번에도 아내를 시켜 아버지한테 드리도록 했다. 저녁에 자리끼를 들고 아버지 방에 건너갔다가 돌아온 아내가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잖아도 하나 있었으면 해서 찾아보았지만 구할 수가 없었는데 네 눈에는 그것이 보이더냐고 무척 좋아하시더라고 전했다.

 

 “틀리다!”고 섭섭해 하시기도 했건만 어머니 초상화가 들어 있는 사진틀에는 먼지 하나 없이 말끔하게 닦여져 있었던 것이다. 유복녀로 자라 어린나이에 시집오셔서 가난한 집 살림살이를 꾸려 가시기에 너무 고생만 하다가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문득문득 날 때마다 아버지는 사진틀을 내려서 없는 먼지를 닦고닦고 하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