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성을 위한 ━━/에세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밥상이 덜 쓸쓸한 법이지 - 박완서

Joyfule 2015. 11. 19. 23:23

 

 

>추노< 촬영장에 다녀왔어요

누군가를 기다리는 밥상이 덜 쓸쓸한 법이지 

 

                                       박완서

 

                                                   -문태준 시집『그늘의 발달

 

 좁다란 뒷마당에도 나무가 몇 그루 서 있다. 서향西向 식당 창문을 햇볕과 낮은 담장 바깥 골목길을 지나는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가리기 위해 꼭 거기 있어야 할 나무 같아 이사 올 때도 수종樹種엔 신경 쓰지 않고 그냥 놔둔 나무들이다. 관상용이라기보다는 블라인드 역할을 해주던 나무 중에는 산수유 나무도 있었다. 이른 봄에 제일 먼저 노란 꽃망울을 터뜨렷다. 노랑은 추위에 강한지 노란 복수초가 눈 속에 피고 난 다음이었다. 집집마다 꽃나무가 많은 동네지만 인근에서 산수유는 우리 집에만 있어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쳐다보면서 어머, 봄인가 봐 얼굴이 환해지는 걸 보면 나는 그들에게 행복이라도 베푼 것처럼 으쓱해지곤 했다. 제일 먼저 봄소식을 전해주고 여름에는 무성한 잎으로 창문을 가려주던 나무가 잎을 떨구고 앙상한 가지만 남으면 나는 창문을 블라인드로 가려버린다. 식당이, 내 집 밥상이 거리로 나앉은 것 같은 기분이 싫어서이다. 그러던 어느날 다음과 같은 문태준의 시가 내게로 날아왔다.

 

       새는 날아오네/ 산수유 열매 붉은 둘레에// 새는 오늘도 날아와 앉네/ 덩그러니 / 붉은 밥 한 그릇만 있는

       추운 식탁에// 고두밥을 먹느냐// 목을 자주 뒤쪽으로 젖히는 새는(수록작「새」)

 

 산수유 노란 꽃도 열매를 맺는다는 걸 알았지만 사람이 따 먹을 수 있는 열매가 아니기 때문에 나는 그 나무를 유실수라고 생각한 일이 없으니 얼마나 미안한가. 새가 즐겨 찾는 나무라는 걸 알고부터 나는 창문에 블라인드를 거두고 아침 밥상을 차린다. 집에 데리고 있는 대학생 손녀는 거의 아침밥을 안 먹고 학교에 가기 때문에 혼자 먹는 밥상은 쓸쓸하고 덤덤하다. 그래도 꼬박꼬박 챙겨 먹는 것은 장기간 복용하고 있는 혈압약 봉지에 아침 식후 30분으로 돼 있기 때문이다. 단지 약을 위해 먹는 식사는 처음에는 싫었지만 습관화되니 맛있을 것도, 없을 것도 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다. 문태준의「새」도 그 시집 중의 여러 편 중 아무렇지도 않은 시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은 시가 나의 아무렇지도 않은 시간과 만나서 빛을 발하며 나의 하루를 의미 있게 만든다.

 

 요즘 나의 아침상은 새와의 겸상이다. 산수유 붉은 열매를 찾아 날아오는 새들은 참새과 일듯싶은 작은 새들이다. 떼로 날아오는 새도 있고 혼자 외로이 날아오는 새도 있다. 한 마리도 안 날아오는 날도 많다. 입맛이 없는 날은 새가 날아오길 하염없이 기다릴 적도 있다. 기다릴 사람 없는 밥상보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밥상이 훨씬 덜 쓸쓸하다. 산수유 붉은 열매를 쪼던 새가 목을 뒤쪽으로 젖히는 순간을 포착하면 나는 진밥을 먹다가도 목이 메어 된장국 한 모금을 떠 넣고는 목을 뒤로 젖힌다. 그리고 나를 목메게 하는 건 진밥이 아니라 여태까지 살아온 세월의 더께, 터무니없이 무거운 돌대가리와, 누추하고 육중한 몸으로 감히 창공의 자유를 꿈꾼 헛된 욕망이라는 걸 깨닫는다.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은 시가 와서 나의 아무렇지도 않은 시간과 만나니 나 같은 속물도 철학을 하게 만든다. 시의 힘이여 위대하도다.

 

 - 박완서 산문집『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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