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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융(Carl G. Jung, 1875∼1961) - 분석적 심리치료

Joyfule 2015. 9. 11. 09:04

 

 

칼 융(Carl G. Jung, 1875∼1961) - 분석적 심리치료

 

존재의 개별화를 이룬 사람

융의 건전한 성격론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 보자. 우리는 이미 심리적 건강을 위한 몇몇 필요성에 대해 언급했다. 우리의 임무는 통일된 전체를 형성하기 위해 그런 개념들을 한데 모으는 것인데 본질적으로 그것은 어떻게 개별화 과정이 진행되는가 하는 것이다.

개별화에 첫번째로 요구되는 것은, 인식하지 못하던 자신(self)의 부분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 일은 중년까지는 일어날 수 없다. 융은 개별화 과정을 독특한 개인, 하나의 동일체적 존재(homogeneous being)가 되어가는 것으로 규정지었는데 그것 역시 자기 자신이 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별화를 '자신답게 되는 것(coming to selfhood)' 혹은 '자아인식(自我認識, self-realization)'으로 해석할 수 있다.

개별화는 본능적인 것으로서 노력을 한다 해도 거의 도달할 수 없는 목표이다(융은 완전히 개별화된 성격으로서 예수와 석가를 예로 들었다). 개별화를 위한 노력으로서 우리는 생애 전반기에 지침이 되었던 행동, 가치, 사고 방식을 버리고 무의식부(無意識部)에 도달해야 한다. 우리는 융이 했던 것처럼 보류나 억제 없이 대담하게 마음의 문을 열고 무의식과 대결해야 한다. 무의식의 소리를 인식 속으로 끌어들여 그것이 말하는 것을 듣고 받아들이고 따라야 한다. 촉각을 세워 꿈과 환상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의식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를 무의식부의 자발적인 흐름대로 맡김으로써, 그림, 글짓기 혹은 다른 형태의 표현방식 속에서 융이 말한 "창조적 상(creative imagination)"을 연습해야 한다. 무의식은 진정한 자신을 우리에게 표출해준다.

그러나 이 무의식의 힘이 우리 삶에 유입되도록 하는 것이 그에 의해 지배받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표현을 받아들여 무의식적 과정과 조화를 이루게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의식과 무의식의 힘은 동등한 협력자가 된다.

개별화된 인간에게는 성격의 어느 영역도 의식부나 무의식부에 의해서, 특정한 기능이나 태도에 의해서 혹은 원형(原型)의 어느 것에 의해서도 한 측면만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모두가 조화로운 균형상태로 받아들여진다.

이렇게 성격의 의식적 측면에 대한 강조가 약화되었다는 것이 건강한 사람의 삶은 이성적 요소의 지시를 덜 받는다는 뜻인가? 융에 따르면 그것은 사실인 것 같고 그럴 필요가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성(理性)에 입각한 원칙에 따라서만 생활하는 것은 우리가 완전한 인간성을 획득하는 것을 어렵게 한다. 융은 "인간은 이성만으로 된 창조물이 아니며, 또 될 수도 없기 때문에 우리를 이성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고 있다. 무의식의 비이성적 힘은 계속 무시당하기에는(생의 전반기에 성공하려고 노력할 때 그러하듯), 너무나 중요한 인간 본성의 일부이다.

개별화에 두번째로 요구되는 것으로는, 성인 초기의 물질적 목표와 그것을 가능케 했던 성격 특성들을 포기하는 것이 포함된다. 인생 전반기의 목표가 후반기에는 무의미해지며, 태도와 기능도 마찬가지이다. 성인 초기에는 한가지 태도(외향성 혹은 내향성)와 한가지 기능(감각, 직관, 사유 혹은 감정)이 지배하고 있었고 다른 것들은 부수적이었던 것을 상기해보라. 인생 전반기에는 그렇게 필수 불가결했던 성격의 편중성이 후반기에는 전혀 적절하지 않게 된다. 개별화되면 어느 하나의 기능이나 태도가 우세하지 않다. 모든 것이 표현될 수 있으며 실제로 그래야 한다. 성격의 이러한 측면들이 모여 균형을 이룬다.

예를 들어 이십대에 외향적이었다면 중년기에는 내향적인 특징도 의식하게 된다. 행동이 사유(思惟) 기능에 의해 지배되었었다면 감각, 직관, 감정기능 역시 의식하게 될 것이다. 전에는 상반되게 존재하던 특성이나 특질이 이젠 모두 표현되는 것이다.

융은 한가지 태도나 기능이 우세한 것을 심리형(心理型, psychological type)이라고 칭하였다. 이 심리형이 한 사람을 타인들로부터 구별하는 주된 기준이 된다. 그런데 개별화되면 이율 배반적으로 그 사람은 소위 사유형(思惟型)이나, 외향성 또는 내향성 감정형으로 분류될 수 없게 되어 개인을 구별하는 이런 범주는 사라지게 된다. 그러므로 개별화된 사람들에게는 매우 유사한 점들이 있다.

중년기 성격의 또다른 변화는 원형(原型) 본질의 변화이다. 개별화 기간 동안 퍼소나(persona), 그림자(shadow), 그리고 아니마나 아니머스(anima/animus)에 변화가 생긴다. 사실상 개별화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이러한 변화가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우선적인 변화는 퍼소나를 분해하거나 몰아내는 것이다. 우리가 쓰고 있는 가면들, 우리가 하고 있는 사회적 역할들은 중년기에도 계속된다. 즉 다른 많은 사람들과 아직 접촉을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대중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진정한 본성을 표출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퍼소나의 하부까지 도달해서 퍼소나가 덮고 있는 순수한 자신(self)을 파악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나서 개별화된 인간으로서 우리는 파괴적이기도 하고 건설적이기도 한 그림자의 전체를 깨달아야 한다. 파괴성, 야기심 같은 동물적이고 원초적인 충동들, 즉 우리 본성의 어두운 측면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은 그것에 흡수되어 그의 지배를 받는다는 뜻이 아니고 단순히 그 존재성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인생의 전반기에 우리는 퍼소나의 도움으로 우리들의 어두운 측면을 덮어 둘 수가 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의 좋은 면만을 알려 주고 싶어했다. 그림자는 다른 이들에게 매우 효율적으로 숨겨졌기 때문에 자기에게까지도 그 존재는 숨어버린다. 개별화가 성공적으로 일어나기 위해 이러한 것은 변화되어야 한다. 이것이 지기(知己, self-knowledge) 과정의 일부이며 이것 없이 자아인식(self-realization)은 불가능하다. 우리의 삶에 열정과 자발성과 활력을 주는 것이 그림자의 동물적인 경향이므로 그림자에 대해 좀 더 많이 깨닫는 것은 우리 성격에 보다 깊은 차원을 형성할 수 있다.

우리는 성격의 한 부분을 다른 것들과의 보다 큰 조화를 이루도록 이끌어간다. 본성의 좋은 면만을 인식하는 것은 성격 발달의 편중성을 초래한다. 성격의 여러 상반된 성분처럼, 이런 차원의 양쪽 측면이 개별화가 이루어질 수 있기 전에 표현되도록 해야 한다.

개별화 과정의 다음 단계에선 심리적 양성화(psychological bisexuality)라는 말이 필요하다. 남자는 아니마(여성적) 기질을, 여자는 아니머스(남성적) 기질을 표출하게 되어야 한다. 개별화 과정의 모든 단계가 모두 어려운 것이지만 자기의 양성적 특질과 특성을 인식하는 것은 분명히 가장 어려운 것이다. 그것은 이전의 자아상(自我像, self-image)으로부터의 커다란 변화, 가장 급속한 이탈을 의미한다.

우리 본성의 양면성이 표현되어, 독점적이고 지배적인 어느 한 부분을 대치하여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우리가 양성적(兩性的, bisexual) 본성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누구나 의심할 여지가 없는(혹은 인정하는) 창의력의 새로운 원천을 열게 되고 또한 아동기에 받았던 영향으로부터 궁극적으로 해방되는데 기여하게 된다. 융은 아니마와 아니머스가 자유롭게 표현될 때에야 비로소 남성은 어머니로부터 여성은 아버지로부터 마침내 자유로와진다고 저술했다.


융은 다른 이론가들처럼 건전한 성격의 특성을 나열하여 제시하지 않았다. 그러한 사람의 상세한 초상화를 만들지는 않은 것이다. 그러나 단편적으로 그의 글들을 모아 제작해보면 하나의 사진은 아닐지라도 개별화된 인간의 인상적 그림이 될 수 있는 충분한 영상이 떠오른다. 내가 융의 이론 체계 속에서 특징들을 추출하여 정리해 본 것 뿐이며 그가 명백하게 진술한 것은 아님을 기억하기 바란다.

개별화된 사람들은 중년기 이후를 맞아 그 시기에 겪게 되는 성격 본성의 변화로부터 생기는 최대의 고비를 뚫고 나간 이들이다. 그들은 자신(self), 야망, 삶, 소망, 그리고 목표에 대해 명상하며 여러 해를 보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무의식부가 표출되도록 허용했기 때문에 이전엔 억압되었던 본성의 일면을 깨닫게 된다. 그 결과 개별화된 인간은 최고 수준의 지기(知己)를 성취하게 되는데, 즉 그것은 의식부와 무의식부 양쪽 수준에서 모두 자기를 인지하는 것이다.

지기(知己)와 함께 자신의 수용(acceptance of self)이 가능해진다. 개별화된 사람은 자기 탐구(self-exploration) 시기에 자기에게 드러나는 것을 수용한다. 그들은 자기의 본성-장점과 약점, 성스러운 면과 악마적인 면을 받아들인다. 각각 다른 상황에서 다른 퍼소나를 쓰지만 오로지 사회적 편의를 위해서만이다. 개별화된 사람은 연기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역할과 진정한 자신(self)을 혼동하지 않는다.

개별화된 사람의 세번째 특징은 자아의 통합(integration of self)이다. 성격의 일부분이 전체와 통합되고 조화를 이루어 모든 것, 즉 이성적(異性的) 특성과 아울러 이전에는 지배적이지 못하던 태도와 기능 등 무의식부의 총체가 표출될 수 있다. 생애 처음으로 어떤 국면도, 태도도, 기능도 어느 한가지가 지배를 하던 것에서 벗어나게 된다.

성격의 모든 부분들의 통합과 표현은 심리적 건강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므로 자기표현(self-expression?!)을 개별화된 사람의 네번째 특성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런 사람은 대체로 인간 본성의 수용과 관대함(acceptance and tolerance of human nature)이라는 특징이 있다. 그들은 집단무의식(인류가 경험한 모든 것의 저장소)에 대해 대단히 개방적이어서 개별화된 사람들은 인간 상황을 보다 잘 자각하여 관대함을 지닌다. 그들은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끼치는 인류적 유산으로부터 전해지는 힘을 인식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보다 깊게 통찰할 수 있는 듯하다.

건강한 사람은, 융 자신의 일생이 그러했던 것처럼, 미지(未知)와 불가사의의 수용(acceptance of the unknown and mysterious)이 특징이다. 그들은 더 이상 이성(理性)만으로 된 존재가 아니므로 무의식적 비이성적 요소들을 의식 속에 받아들일 수 있다. 그들은 꿈과 환상에 주의하여 관찰하며 한편으로는 이성이나 논리를 사용하면서 무의식부의 힘으로 그러한 의식의 과정을 조정한다. 이러한 미지와 불가사의의 수용은 투시력에서부터 신앙에 이르기까지 초자연적이며 영적(靈的)인 현상도 포함한다.

건강한 사람은 보편적 성격(universal personality)을 가졌다고 융은 말했다. 더 이상은 성격(태도, 기능, 원형의 모든 측면에서)의 어느 한 면이 지배적이 아니므로 개개인의 독특함은 사라진다. 그러한 사람은 더 이상 어느 특정한 심리형(心理型)에 속하는 사람으로 설명할 수가 없다. 25세에는 지극히 남성적이고 외향적이며 감정형(感情型)이었던 사람도 일단 개별화가 진행되기 시작하면 그런 독특한 성질을 잃는다. 그런 성질들이 이후로는 지배성을 잃으므로 어떤 특정한 심리형으로 그를 분류하기는 불가능하다.

[개인적 논평]

융의 이론은 다른 어느 건강한 성격이론과도 다르다. 이성(理性)과 논리의 의식적 요소를 강조하는 20세기의 이론과는 동떨어져 있는 듯하다. 논란의 여지도 많고 초월주의, 초자연주의와 종교의 혼란스러운 혼합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는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대체로 융의 업적은 심리학이나 정신병리학에서보다 종교, 역사, 예술, 문학 분야에서 더 많은 인정을 받아왔다.

융은 살아가는 의미의 부재(不在), 과거나 자연과 일맥 상통하는 뿌리나 연결의 부족 등 20세기 후반기의 존재적 특성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인간의 상태에 대해 저술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성과 과학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보다 넓고 영혼적이며 철학적인 가치에 대한 안목을 잃었다.

이런 면에서 융의 위치는 극단적이 아니고 온건하다. 그는 이성을 단념하거나 무의식의 통제에 굴복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이성을 발휘하되 무의식의 힘을 좀 더 잘 인식함으로써 조절하여야 한다. 이런 상반된 부분들 간의 균형과 통합에 그 관건이 있다.

이제부터는 특정한 문제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융의 외향성, 내향성이라는 개념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지나치게 광범위하고 단순한 의식부 안의 분류라는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 이미 아는 바와 같이 실제로 이것은 융도 인식하고 있던 것이어서 세계를 지각하고 반응하는 것을 보다 완전하게 설명하기 위해 사유, 감정, 감각, 직관이라는 기능군을 도입했다.

나에게는 여덟 가지 심리형으로 태도와 기능을 조합시킨 것이 다양한 인간의 행동을 총괄하기에 충분한지는 의문이다. 융의 심리형은 일반적인 의미로만 적용이 가능한 것 같다(그리고 이런 것은 아마 어떤 이론이든지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연구가 가능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융의 집단 무의식에 대한 이론은 대부분 받아들이기 어렵다. 우리가 개인 무의식에 축적된 개인적 경험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은 분명한 것처럼 내게도 여겨진다. 결국 과거에 직면해서 맞섰던 경험과 자극을 받아 생기는 변화 외에 무엇이 학습되는가? 그 경험들은 의식적으로 모두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그 존재나 행동의 영향력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정신분석이나 인간 성격 연구를 한, 다른 사람들도 언젠가 한 번은 의식에 있었으나 더 이상은 의식 속에 존재하지 않는 경험들에 의해 본성이 영향받을 수 있다는 증거를 제출한 바 있다. 그러나 집단 무의식이라는 사실은 내게 뚜렷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원시 조상들의 기억에서 우리 인간들이 항상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활동할 소인(素因)을 물려받았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그런 견해는 지적(知的)으로나 정서적으로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것이기는 하나-그것은 나의 흥미를 자극시켰다-나는 그에 대해 상당히 회의적이다. 인류의 진화는 어떤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경험이 특징이라는 것은 알 수 있다. 어느 시대에든 인간은 탄생과 죽음, 어머니상(像), 혹은 일종의 신 같은 것이 있다. 그러나 이 경험들이 융이 제시한대로 새로운 각 세대로 끊임없이 전하여지는 것인가?

융은 자기와 환자들의 환상과 꿈 속에 공통된 주제와 상징이 있는 것을 알았다. 그는 그것이 서로 다른 문화와 시대에서도 공통됨을 발견하였다. 이런 사실들은 경험의 보편성을 증명하는 증거가 되긴 하지만 어떤 형식으로 유전된다는 결정적 증거는 되지 못한다. 인간은 여러가지 이유에 의해 매 시대마다 유사한 경험을 겪고 유사하게 반응한다는 것만을 지적할 뿐이다.

내가 의견을 같이 하고 있는 융의 이론 중 한 가지는 중년기에 일어나는 성격의 변화를 의식한 점이다. 중년기의 남녀와 상담(counseling)할 때 나도 융이 설명한 것과 같은 스트레스와 긴장감을 본다. 그 사람들은 삶이 진부하고 무의미하다고 불평하며 젊은 시절에 느꼈던 활력과 열정과 흥분을 갈망한다.

중년기의 추이에 대한 발달심리학 저서들을 살펴보면 그 시기가 보편적이며 불가피한 성격 변화기라는 융의 견해를 뒷받침하고 있다. 인간이 자기의 주관적 본질적 내부를 향하게 되고 이제는 부적절해진 가치와 의미를 대신할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찾는 시기이다.

융의 건전한 성격의 본질에 관한 논의는 다른 이론가들만큼 분명하지는 않다. 따라서 융이 보는 건강한 사람은 어떠한지 정확하게 그려보기가 더욱 어렵다. 나는 그러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성격 특징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 그들이 자기 자신을 알고 받아들인다는 것, 타인 또한 받아들이고 그들에게 관대하다는 것, 자신과 성격 전체를 통합해왔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런 일방적이고 다소 모호한 특성들 이상으로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것이 많다. 다른 이론가들은 이보다 자세하게 건강한 성격을 묘사하여 제시했다.

융의 심리적 건강이라는 개념은 선택된 몇몇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분명하다. 자아의 인식이란 성공적으로 무의식과 충분히 대결할 여지가 있는 영리하고 충분히 교육받은 사람을 위해 마련된 것이다(융의 환자들은 모두 이 범주의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대부분의 대중들은 발달의 최상 상태를 놓칠 운명에 있다.

융의 이론의 궁극적 성격이 무엇이고 평가가 어떠하든간에 가장 선동적이고 도전적이었던 이론 중의 하나였음은 명백하다. 그의 저서들은 읽기가 어려운 반면, 넘치는 역사 의식과 인간 성격의 감추어진 측면에 깊은 경의를 가진 그가 놀라운 천재임을 보여준다. 융의 통찰이 인간의 일반적 본질을 보여주는지 자기의 본질만을 보여주는지 앞으로 두고 볼 문제이다. 당분간 그는 인간 성격이라는 수수께끼를 풀 수 있도록 하나의 흥미로운 형태와 모양들을 우리에게 남겨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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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상담심리자료창고 원문보기▶ 글쓴이 : 고바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