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 마음 속의 교묘한 죄.
제리 브리지스(Jerry Bridges) 지음 오현미 옮김
교만 - 자기만 높이는 죄
왜 잘난 체하는가? 우리에게는 자랑할 만한 근거가 없다. 자랑을 하는 것은 성공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눈을 돌려 자신의 교만을 보라
성경에 등장하는 혐오스러운 인물 가운데 특히 그 정도가 심한 사람은 "하나님, 저는 다른 사람들, 곧 남의 것을 빼앗는 사람이나 불의한 사람이나 간음하는 사람과 같지 않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했던, 자기 의에 빠진 바리새인일 것이다(눅 18:11). 그러나 그 사람을 정죄하는 우리 역시 그와 똑같이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태도에 빠져들기 쉽다.
지금부터 다루게 될 교만이라는 죄는 일반적인 의미의 교만이 아니라 특별히 크리스천들에게 유혹거리가 되는 그런 교만이다. 구체적으로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교만, 내가 신봉하는 교리만 옳다는 교만, 성공은 내것이라는 교만, 영적 권위에 반항하는 교만에 대해 살펴보게 될 것이다. 이런 교묘한 죄에 대해 설명하면서 나 자신이 무슨 검열관이라도 된 듯한 교만에 빠지지 않기를 기도한다. 그래서 아예 시작부터 고백하는데, 나 또한 교만이라는 죄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특히 남을 가르친다는 구실 뒤에 모습을 감추고 있는 교만 말이다. 교만의 문제점 한 가지는, 다른 사람의 교만은 잘 보면서 자기 자신의 교만은 잘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의 이 말이 아주 마음에 와닿는다. "그렇다면 남을 가르치는 그대가 왜 자신은 가르치지 않습니까?"(롬 2:21) 우리 함께 하나님께 청하자. 하나님 눈에 보이는 우리의 교만을 똑똑히 보여달라고 말이다. 이것이 아주 중요한 문제라는 사실은 야고보와 베드로가 입을 모아 경고하는 말에서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사람을 물리치시고"(약 4:6, 벧전 5:5).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교만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의 교만은 '도덕적 자기 의'라고 이름붙일 수 있다. 이는 자기가 남들에 비해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의식이다. 이런 유형의 교만은 비단 크리스천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정치인들과 문화계 인사들 사이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진보주의자든 보수자의자든 예외는 없다. 예를 들어 정치, 경제, 혹은 환경 정책 같은 분야에서 자기가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도덕적 자기 의에 빠질 위험이 크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보수 복음주의에 속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 도덕적 자기 의는 아주 흔하게 나타난다.
오늘날 크리스천들은 도덕적 우월감과 자기 의라는 죄에 빠지기가 쉽다. 사회가 전반적으로 이혼이나 동성애, 낙태, 술취함, 약물 남용, 탐욕 등 여러 가지 명백하고 추악한 죄를 공공연히 저지르거나 묵과하는 데 비해 크리스천들은 그런 죄를 거의 짓지 않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도덕적으로 우월감을 느끼면서 그런 죄를 짓는 사람들을 어느 정도 경멸과 멸시가 담긴 눈초리로 바라보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죄들이 우리 사회의 도덕 구조를 다 무너뜨릴 만큼 심각한 죄가 아니라는 말은 아니다. 이것은 정말 심각한 죄며, 이런 죄에 대해 예언자적 목소리를 높이는 우리 사회의 기독교 지도자들을 존경한다. 하지만 우리 역시 도덕적 자기 의라는 죄에 빠져들고 있으며, 그 결과 그런 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을 멸시하는 죄까지 짓고 있다. 사실 바리새인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는 "자기가 의롭다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들은 업신여기는 몇몇 사람들"에 관한 비유였다(눅 18:9).
이 책에서 다루게 될 모든 교묘한 죄 가운데 도덕적 우월감이라는 교만은 크리스천들에게서 아주 흔히 볼 수 있는 죄로, 아마 불경건함 다음으로 많이 짓는 죄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죄를 알아차리기가 힘든 것은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이 죄를 어느 정도는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주변 세상이 날이 갈수록 타락하고 있는 것에 대해 갑론을박하면서 그런 논쟁을 은근히 즐기는 것 같다. 그런 대화를 할 때 우리는 도덕적 우월감이라는 교만의 죄를 짓는다.
그렇다면,자기 의라는 죄를 경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하나님 은혜가 아니었다면 나도 저 사람들과 똑같을 것"이라는 진리에 근거하여 늘 겸손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비록 이 말이 뭔가 좀 진부한 표현이 되어가고 있기는 하지만, 이는 크리스천이라면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사실이다. 우리가 도덕적으로 정직하다면, 특히 도덕적으로 정직한 삶을 살려고 애쓰는 크리스천이라면, 그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효력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날 때부터 도덕적으로 정직한 사람은 없다. 사람은 누구나 다윗처럼 "나는 분명히 죄 가운데 태어났습니다. 내 어머니가 죄 가운데 나를 잉태한 것입니다"라고 말해야 한다(시51:5).우리가 정죄하는 명백한 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에게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기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런 삶에서 벗어난 것에 대해 깊은 감사를 느껴야 한다.
자기 의에 빠지는 교만을 경계하는 또 한 가지 방법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죄악된 세상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바벨론 포로 시대가 끝나고 많은 유대인들이 유다 땅으로 돌아왔을 때, 모세 율법에 정통한 서기관 에스라는 백성들에게 하나님 율법을 다시 가르치기 시작했다. 성경은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고 지키며 이스라엘에게 율례와 규례를 가르치겠다고 마음을 정했다"고 말한다(스7:10). 에스라는 모범적인 생활을 하는 경건한 사람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어느 날 백성들 가운데 심각한 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자기도 그들과 똑같은 죄인으로 여겼다. 그 자신은 아무 죄가 없었는데도 말이다. 에스라서 9장 6절에 기록된 그의 기도를 보라. "하나님이여, 제가 주께, 하나님께 얼굴을 들기가 너무 부끄럽고 망신스럽습니다. 우리가 죄가 우리 머리보다 높고 우리의 죄악이 하늘까지 닿았기 때문입니다."그가 어떤 말로 자기를 죄인의 무리에 포함시켰는지 주목하라.그는'우리의 죄', '우리의 죄악'이라고 말했다.주변 세상의 도덕적 타락이 날로 그 도를 더해가고 있는 것을 지켜보면서 우리도 에스라 같은 태도를 지닐 필요가 있다.그런 태도가 자기 의에 빠지는 교만에서 우리를 지켜줄 것이다.
내 교리만 옳다는 교만
도덕적 교만과 아주 가까운 사이가 바로 교리적 교만이다. 교리적 교만이다. 교리적 교만이란, 나의 교리적 믿음이 어떠하든 내 믿음만 옳고 다른 믿음을 가진 사람은 신학적으로 열등하다는 억측이다. 교리에 유난히 관심이 많은 사람이 이런 교만에 빠지기 쉽다. 자기가 아르미니우스파 신자든지, 칼빈주의자든지, 세대주의 신학을 신봉하든지, 언약 신학을 신봉하는지, 혹은 일종의 절충주의를 포용하든지 상관없이 우리는 자기의 교리적 믿음만이 옳다고 생각하면서 나와 다른 믿음을 가진 사람은 다소 멸시하는 경향이 있다. 또 한편에서는 교리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교리를 중시하는 이들을 경멸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형태의 교만은 우리의 특정 신앙 체계 속에 있는 교만으로서, 그 신앙 체계가 무엇이든지 내 믿음 안에서 나는 다른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 비해 영적으로 우월하다고 여기는 태도다.
고린도전서 8장에서 바울은 우상에게 바쳤던 음식을 먹는 문제와 관련하여 이런 형태의 교만에 대해 이야기한다. 고린도 교회의 일부 크리스천들은 우상에게 바쳤던 음식을 먹는 문제는 크리스천의 자유영역에 속하는 일이라고 결론내렸다. 바울도 그와 같은 결론에 동의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그들의 그런 믿음에서 비롯되는 교리적 교만에 대해서는 엄히 꾸짖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이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모두가 지식이 있는 줄로 압니다. 그러나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모두를 이롭게 합니다." 바울은 그들의 '지식'에는 동의했다. 즉, 우상에게 바쳤던 음식을 먹는 문제에 관한 그들의 교리적 믿음에는 동의했다. 하지만 그들의 교리적 교만에 대해서는 책망했다. '지식'이 그들을 우쭐대게 만들었던 것이다.
자기 신앙이 칼빈주의 신앙이든, 아르미니안 신앙이든, 혹은 세대주의적 신앙이든, 종말에 관해 어떤 견해를 지녔든, 아니면 교리적 믿음을 아예 경멸하는 입장이든 그 신앙 때문에 혹여 나와 다른 입장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 교리적 우월감을 느낀다면, 그것이 바로 교리적 교만의 죄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의 진리를 알려고 애쓰지 말라거나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는지에 대해 교리적 신념을 키워가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내 말은, 신념을 갖되 겸손하게 가져야 하며, 신학적으로 유능하며 경건한 사람들 중에 나와 다른 신념을 가진 사람도 많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언젠가 어떤 책에 대해 논평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적이 있다. 그 책은 내가 강력하게 반대하는 성화 교리를 주제로 쓰인 책이었다. 답변지에 나는 이렇게 썼다. "나는 '내가 동의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할 뿐이지 이 책의 저자가 틀렸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천국에 가면, 틀린 건 바로 나였다는 걸 알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내 신념이 전보다 더 약해졌는가? 전혀 아니다. 그 책을 읽고나서 오히려 내 신념은 더 강해졌다. 하지만 그렇게 쓴 것은 내 신념을 겸손하게 유지하기를 원하며, 성화 교리에 대해 나와 같은 입장에 있는 사람들을 대할 때와 똑같은 존경심으로 그 책의 저자를 대하고 싶다는 의미다(나 자신을 우리가 실천해야 할 겸손의 본보기로 제시하자니 오히려 그것을 자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구나 싶다. 실상 나는 그렇게 겸손하지 않으며,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너그럽게 대하지 못하거나 존중하지 못할 때도 있다).
이 부분에서 중요한 것은 교리적 교만이 얼마나 위험한 죄인지 깨닫고, 무심코 지나치는 죄 가운데 혹시 이 죄가 있지는 않은지 기도하는 마음으로 고민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자신에게 그런 죄가 있다고 생각된다면, 고린도전서 8장 1절에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한다"는 말씀을 외워서 그 말씀을 두고 기도할 것을 권한다. 그런 다음 내가 어떤 부분에서 교리적으로 교만한 경향이 있는지 좀더 정확히 집어내서, 진실로 겸손한 자세로 내 확신을 유지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구하라.
성공은 내것이라는 교만
성경은 공부든, 운동이든, 사업이든, 혹은 직장 일이든 일반적으로 노력과 성공 사이에 인과 관계가 있다고 가르친다. 예를 들어 잠언 13장 4절에서는 "게으름뱅이의 영혼은 아무리 원하는 것이 있어도 얻는 것이 없지만 부지런한 사람의 영혼은 원하는 것을 넉넉하게 얻는다"고 말한다. 바울은 사역에 관해 디모데에게 권고하기를,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이 되기를 힘써라"라고 했으며(딤후 2:15), 바울 자신 역시 전력을 다해 사역했다(고전 9:26-27, 빌 3:12-14).
하지만 또 성경은 어떤 분야에서든 성공은 하나님의 주권적 통제 아래 있다고도 가르친다(삼상 2:7, 시 75:6-7, 학 1:5-6). 사무엘상 본문을 보면 "여호와께서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십니다"라고 가르친다. 똑같은 학문을 전공하는 두 학생이 있는데, 둘 다 열심히 공부하지만 한 학생은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며 최고 점수를 받는 반면, 다른 한 학생은 평균에도 못 미칠 수 있다. 무엇 때문에 이런 차이가 생기는가? 하나님께서 둘 중 한 사람에게 지적 능력을 좀더 많이 주셨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전과 자극을 주는 가정에 태어나게 하셨기 때문일 수도 있다. 원인이 무엇이든, 어떤 분야에서 업적을 이루거나 성공을 할 수 있는 능력은 궁극적으로 다 하나님에게서 온다.
앞서 감사의 문제를 다루면서 신명기 8장 17-18절을 살펴보았다. 우리가 성공에 대해 감사를 드리는 이유는, 성공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세상에 자력으로 성공하는 사람 즉, 혼자 힘으로 입신출세하는 사람은 없다.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그 사람은 순전히 불굴의 의지와 노력으로 성공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성공을 가능하게 했던 그 사업가 기질과 사업 수완은 누가 준 것인가? 바로 하나님이시다.
교만한 고린도 교인들에게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누가 당신을 구별합니까? 당신이 가진 것 가운데 받지 않은 것이 무엇입니까? 당신이 받은 것이라면 왜 그렇지 않은 것처럼 자랑합니까?"(고전 4:7)내가 가진 것 가운데 하나님께 받지 않은 게 무엇인가?아무것도 없다.지적 능력과 타고난 솜씨와 재능,건강과 성공의 기회 등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다.성공을 이룰 수 있게 하는 것 중 하나님께 받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왜 잘난 체하는가? 누구라도 알 수 있을 만큼 교만한 태도로 자랑하든 자랑하고는 싶지만 자랑하는 것으로 보이기 싫어 교묘히 자랑하든 자랑하고는 싶지만 자랑하는 것으로 보이기 싫어 교묘히 자랑하든 우리에게는 자랑할 만한 근거가 없다. 어떤 식으로 자랑하든 자랑을 한다는 것은 성공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열심히 노력한 것도 성공의 원인에 포함될 수 있다. 하지만 성공할 수 있는 능력과 성공하고자 하는 욕구는 누가 주었는가? 그 노력에 축복한 분이 누구인가?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내가 보기에 유난히 더 비위에 거슬리는 사람은, 사업이 됐든 뭐가 됐든 엄청난 노력이 자기의 성공 비결이라고 사방팔방에 떠들어대며 허세부리는 사람이다. 불신자들만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아니다. 크리스천들 중에도 그런 이들이 있다. 그런 경우에는 정말로 불쾌하다. 비교적 점잖게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만약 자기의 성공이나 자녀의 성공에 대해 하나님께서 축복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역시 하나님께 무례를 범하는 것이다.
매년 성탄절 무렵이면 우리 부부는 오랜 세우러 동안 알고 지내온 친구와 지인들로부터 많은 편지를 받는데, 거기에는 가끔 이런 내용의 편지도 있다. "저희 아들 존이 하버드 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습니다." 가족과 친구들에게 이런 좋은 소식을 알리는 건 잘못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우리 아들 정말 똑똑하지 않아요?"라는 의미가 담겨 있을 뿐, 아들의 지적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인정하는 말은 단 한 마디도 없다.
자녀들이 이룬 일에 대해 우쭐해하는 교묘한 죄를 피하려면 이렇게 말해야 한다. "저희 아들 존이 하버드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습니다. 저희는 하나님께서 존에게 그런 지적 능력을 주신 것을 인정하고 깊이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능력을 모든 아이들에게 다 주시지는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존에게도 이런 감사의 태도를 심어주려 애썼고, 네가 가진 이 능력은 다른 사람을 섬기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쓰라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청지기 직분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누구든 친구에게서 이런 편지를 받으면 하나님께 복을 받은 그 친구와 더불어 기뻐할 것이다. 원칙을 설명하기 위해 공부를 잘하는 것을 예로 들었지만, 존이 축구 명문대학의 주전 공격수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혹은 학교를 졸업하고 사업체로 뛰어들어 잘 나가는 기업체의 부사장으로 승진했다고 해도 다르지 않다.
우리 자신의 성공이든 자녀의 성공이든, 그리고 분야가 무엇이든, 성공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면 그 업적에 대해 교만한 마음이 생겨나며 이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다. 이런 형태의 교만은 죄다. 교묘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죄인 것은 분명하다.
자기 자신이나 자녀의 성취에 대한 교만은 또 지나칠 정도로 남에게 인정받기를 바라는 마음으로도 표현된다. 어떤 일을 잘 해냈을 때, 혹은 직장이나 교회에서 오랜 세월 동안 성실하게 일한 것에 대해 칭찬을 받으면 누구나 다 감사해한다. 하지만 어떤 특정한 일을 잘 해냈는데 누구에게도 인정을 받지 못하면, 그때 우리의 태도는 어떠한가? 아무도 몰라줘도 모든 일을 주께 하듯 그저 묵묵히 수고하려고 하는가, 아니면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만을 품는가?
인정받고 싶은 죄된 욕구를 경계하는 데는 성경에서 얻을 수 있는 두 가지 원칙이 도움이 될 것이다. 첫째, 누가복음 17장 10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대로 다 마치고 나서 '우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어떤 일을 잘 해냈거나 혹은 직장이나 교회를 많은 세월 동안 성실히 섬겼을 때, 우리는 "저는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둘째, 인정은 그것을 직접 표현한 사람이 누구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받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은 높이고 어떤 사람은 낮추기도 하는 분이시다(시 75:6-7). 이 두 가지 원칙을 종합하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모든 것이 다 은혜다."나는 아무 자격도 없고,사람들의 인정을 비롯해 내가 받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다.그러므로 설령 인정을 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초조해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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