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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기독교백년사 - 제3편 한국교회의 발전과 확대 1.

Joyfule 2006. 12. 24. 00:41


한국민족기독교백년사 - 제3편 한국교회의 발전과 확대 1.   
제1장 3.1운동과 교회의 주동역할
1.십자가를 진 기독교인들
한국의 민족 운동이나 독립운동은 교회의 움직임과 불가분리의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발전하였다. 그것은 기독교의 교리는 인간의 존엄과 자유 평등 사상을 기본으로 한 것이므로 기독교인드른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 다른 민족의 부당한 구속과 압박에 그냥 머물러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를 통하여 민족 자주정신이 크게 일어났으며 그것이 다시 독립 운동에로 약진되었다. 
1910년 8월 22일,일본은 아주 비열한 방법으로 한국을 병참하였다. 나라 잃은 설음과 통분을 가장 뼈저리게 느끼고 깊이 체험하기는 그 누구보다 기독교인이었음은 두말할 것 없다. 기독교인들은 일본 관헌이 잡아다가 취조하면서 주모자가 누구냐고 물으면 한결같이 하나님이 시켜서 독립운동 하였다고 대답하였다.이는 민족의 독립과 자유의 향유를 위해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따라 행동했다는 말이 되며, 이리하여 교회야말로 일본의 침략 정치에 항거하는 강력한 단체가 되어진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알아채린 일제 침략자들은 민족 활동의 정신적 원천이 되어있는 기독교 신앙을 없이하려고 온갖 흉게를 꾸미면서 한 걸음 두 걸음 목조르듯 박해의 손길을 뻗쳐 들였다. 
일제의 흉계가 대규모적으로 조작된 것으로서 소위 '105인 사건'이란 것이 있다. 일본인 조선총독 대라우찌가 1910년 12월 27일 압록강 철교 개통식에 참석하기 위해 가는 도중에 선천역에 정거하였을 때 한국 기독교인들이 그를 암살하려고 음모를 꾸몄다는 내용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원래 날조된 사건이었기 때문에 모순 당착이 너무나 많이 노출되어 완전히 허위가 드러났다. 
결국,이 조작된 사건은 형식적으로나 윤치호등 6명에게 유죄 판결을 내려 사태를 미봉하였다. 형고를 받은 인사들은 그동안 여러 차례에 걸친 감형으로 1915년까지는 모두 석방되기는 하였으나 그들은 기력을 회복하지 못하였다. 어느 한 날,감옥에서 석방된 이들이 평양역에 도착하였을 때 역 앞에 운집한 8천명 군중들은 민족을 위해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고난과 수욕을 겪은 교회 지도자들을 바라보면서 열렬한 환영을 퍼부었으나 그들의 모습은 슬픔과 울분이 뒤섞여 너무나 처절하였다. 
2. 3.1운동을 통한 교회의 애국활동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렸을 때 미국의 윌슨(Thomas W.Wilson)대통령은 민족 자결론(Self Determination of Nations)을 내세워 이때야말로 한국 기독교인들은 민족의 살길이 트였다고 생각하고 일제의 기반을 벗어나 조국의 독립을 이룩할 수 있는 호기회가 온 것으로 자각하였다. 
근 10년이나 일제의 압박을 받아 온 우리 민족은 이에 자극되어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을 일으키고야 말았다. 이 날을 기점으로 하여 온 겨레는 민족자결의 횃불을 높이 치켜들고,자주 독립을 선언하면서 독립 만세를 힘차게 부르고 또 불렀다. 3.1운동에서 기독교인들은 단연히 앞장섰다.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33인 가운데 16인이 기독교인임을 보아 벌써 이러한 애국심을 뚜렷히 알 수 있다. 운동의 진행은 시종일관하여 비폭력 무저항주의로 행동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헌병과 경찰은 교인을 보는대로 짓밟았고 감옥에 가두고 매질했으며 교회당을 때려 부수고 불질렀다. 
3.1운동이 한창 막바지에 이르렀던 4월 15일 낮 12시경,수원 부근의 제암리로 일본 헌병의 일대가 달려들었다. 그들은 총을 휘두르며 약 30명의 기독교인을 모두 교회당 안으로 모아 들였다. 교인들이 다 들어간 다음,헌병들은 문을 잠그고 교회당에 불을 질렀다. 견디다 못하여 창문을 부수고 나오는 교인들에게 총을 겨누어 쏘아 죽였다. 이러한 학살과 만행은 다른 여러 고장에서도 감행되었다. 강서 사천교회,정주교회,강계교회,위원교회의 학살 사건 그리고 서울의 시자가 사형 사건,북간도 노루바위교회의 학살 사건 등이 그것이며,이러한 모습은 한국 독립운동사상 너무나 참혹하고 잔인하여 감히 눈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광경이었다. 
일본 경찰이 그렇게도 심하게 경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대규모의 전국적 운동이 사전에 발각되지 않았다는 점,그리고 기독교인의 주장에 의하여 비폭력 무저항주의로 독립운동을 이끌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사항이다. 그토록 우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교인들은 땅에 엎어지고 교회당은 불타 버렷으나 살아남은 교인들은 한 마음 한 뜻으로 굳데 뭉치어 뒤로 물러서지 아니하였다. 3.1운동을 통하여 기독교인의 애국적인 참 모습을 본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하였다. 이리하여 한국교회는 3.1운동을 계기로 하여 민족 교회로서의 걸음을 또 한번 힘차게 내딛었다. 
기독교인들이 앞장서 기치를 높이 든 3.1독립운동은 한국 민족의 기개를 널리 만방에 떨쳤을 뿐 아니라 한국 민족이 독립된 민족임을 뚜렷히 세게에 알려 주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어떤 사람은 독립 운동이 실패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때에 한국 민족의 독립성을 세계에 알려주지 아니하였더라면 1945년 8월 15일의 연합군에 의한 무조건 해방이 그렇게 쉽게 오지 아니했을 것만은 틀림이 없다. 
3. 3.1운동에서의 기독교정신의 결정
지금까지 3.1운동의 원인 및 동기,그 경과 그리고 그 결과등에 관하여 보았다. 다음은 3.1운동의 성격이라 할까, 3.1정신에 관하여 살피므로 귀중한 교훈을 얻고자 한다. 
첫째로, 3.1정신에 있어서는 신앙심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일본의 철통같은 구속과 탄압 속에서 결코 굴하지 아니하였다. 반드시 한국 민족이 독립할 것과 국권을 회복하고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게 될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틀림없이 이를 신앙하였다.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신석구목사는 일제의 법정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였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불의 불신한 일본 사람게 우리 민족을 오래 맡기시지 아니할 것으로 굳게 빋는다."
이러한 강한 신앙이 있었기에 전국 방방곡곡에서 교인들은 일제히 일어나 붉은 피를 아낌없이 쏟으면서 이 강토는 내 것이라고 소리치며 행동할 수 있었다. 
둘째로는 협동과 단결심이 강하게 있었다. 3.1운동은 종파와 계급,남녀,노소의 장벽을 뚫고 온 교회와 겨레가 일치 단합한 거룩한 운동이었다. 이는 한국 민족사에서 일찌기 찾아보기 어려운 행동이었다. 실은 독립선언서가 2월 28일에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었다. 그들은 경찰력을 총동원하여 살폈으나 3월 1일에 거사가 있을줄은 전혀 탐지하지 못하였다. 한국인 밀정도 이 사실만은 일경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이는 민족이 하나로 뭉쳐 입을 꽉 다물었기 때문이다. 
셋째는, 정의와 진실이 그 가운데 있었다. 독립은 한국 민족의 정의에 입각한 참된 소원이었고 3.1운동은 독립을 위한 진실한 행동이었다. 이 거룩한 운동에 누구도 명예나 욕심을 탐하지 아니하였다. 그토록 강포한 일본 침략자들은 이 정의와 진실의 발로를 그 무엇으로 당해내지 못하였던 것이다. 
민족 대표 33인이 2월 28일 저녁에 손병희 댁에 최후로 모여서 거사를 의론하면서 "체포된 후의 모든 진술은 각자가 사실대로 말하기로 하자"고 최종적으로 합의하였다. 이 한가지만 보더라도 3.1운동이 진실과 정의로 일관하였음을 잘 알 수 있다. 
넷째로는 평화와 무저항으로 일관하였다. 어떤 분은 말하기를 3.1운동이 실패했다고 말하면서 그 중요한 원인은 비폭력화 평화운동이었기 때문이라고 비판한다. 천도교 측에서는 필요시에는 무력 행사도 불사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기독교측은 완강히 이를 거부하면서 끝가지 비폭력과 무저항으로 운동을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만약 이때에 자칫 잘못하였더라면 제2의 동학란같은 것이 발생하여 죽도 밥도 안되었을런지 모른다. 3.1운동의 특출한 정신은 맨주먹으로 또 붉은 피로 물들이면서도 끝까지 평화의 정신으로 밀고 나간데 있다. 한 자루의 총검도 없이 재정의 후원도 없이 원조하는 우방도 없이 세계 최강국과 항쟁한 그 저력은 끝까지 평화의 정신으로 밀고 나갔다는 데 있었다. 그런고로 세계는 이 불상한 민족을 동정하였고 이 평화 운동을 지지했던 것이다. 
다섯째로는 3.1정신 속에는 끊임없는 전진이 있었다. 손에 태극기 하나만을 들고 일제의 총칼 앞에서 제1진이 쓰러지면서 제2진이 뒤를 따랐다. 제2진이 쓰러지면 그 시체를 밟고 또 다시 제3진이 전진하여 끄칠 줄을 몰랐다. 이러한 불퇴전의 전진은 민족 자격 아니면 민족자멸의 양단간의 결단을 앞에 놓고 전국의 골짜기마다 어디에서나 일어나 계속된 것이었다. 일본, 만주, 시베리아,상하이,하와이,미국 등지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지면서 전개되고 그리고 또 계속 되었다. 
3.1운동의 진전으로 말미암아 기독교인들의 민족 정신과 독립 정신은 더욱 더 확고히 다듬어졌다. 한국교회는 3.1운동이래 한국 민족이 신뢰할만한 봉사자로 보다 더 뚜렷이 부각되었다. 이는 한국교회가 민족 교회로서 성장하는 속도에 가일층 박차를 가하였으므로 크나 큰 수확이 되었음을 인식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