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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기독교백년사 - 제2편 한국교회의 형성과 부흥 3.

Joyfule 2006. 12. 23. 01:12

한국민족기독교백년사 - 제2편 한국교회의 형성과 부흥 3.

제3장 교회 행정기관 설정


1.한미 장로회공의회의 발족

선교사의 증가와 선교 지구의 확장으로 선교사 공의회는 분화되어 공의회 위원회(Committee of Council)란 것을 설정하였다. 1895년에 서울 위원회와 평안 위원회가 조직되었고 1901년에는 전라 위원회(남장로회 선교회),경상 위원회(호주장로회 선교회) 가 그리고 1902년에는 함경 위원회(카나다장로회 선교회)가 또 조직되었다.

위의 선교사 공의회에는 1901년부터 한국인 대표가 동참하였다. 즉 그 해 9월 20일 서울 새문안교회에서의 제1회 장로회 공의회에 한국인 9명과 선교사 25명이 참석하였다. 장로회 공의회의 발족은 한국인 신자들이 역사상 처음으로 교회 최고 처리기관에 참가한 획기적 사실로서 한국 민족교회 발전 과정에 있어서 하나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한국에는 아직 노회가 없어서 우리는 임시로 장로회 공의회라는 전국적인 회의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이 회의는 앞으로 노회가 될 것임에 틀림이 없다.' 라고 한 것과 같이 장로회 공의회는 분명히 앞으로 한국인 스스로가 움직이는 대한예수교장로회 노회의 전신이었음에 틀림이 없었다.

2. 대한독노회 설치와 해외선교의 착수

1907년 대부흥회의 불길이 전국적으로 퍼진 그 해에 한국교회는 또 다른 큰 수확으로 노회를 갖게 되었다. 1906년 선교사공의회는 다음 해에 7인의 목사 후보생이 안수 받게 될 것을 예견하여 목사 임직을 위한 절차를 결정해 놓았다. 즉 순서위원,신조 작성위원 및 교회정치 기구위원 등을 임명한 것이었다.

1907년 9월 17일 오전 9시,노회 창립의 역사적인 막이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렸다. 여기에는 한국인 장로 36인과 선교사 33인과 찬성회원 9인등 모두 78인의 회원이 참석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 제1회 노회를 성립시켰다. 이 회합이야말로 한국민족 역사 상에 최초의 민주적 대의 회합이었다고 하는데 크나큰 의의가 있다.

이 독노회는 가장 중요한 안건으로서 1901년에 설립된 장로회 평양신학교 졸업생 7인을 안수하여 목사로 세웠으며 그주의 한 사람인 이기풍 목사를 제주도로 파송하여 선교사업에 종사케 하였다.

한국교회는 이렇게 출발하면서부터 '선교하는 교회'로 등장하였다. 블레어(W.N.Blair,)선교사는 "새로운 한국교회의 첫 모임은 사실상 선교사를 보내는 모임이었다"라고까지 언급하였다. 그때에 선교 정신은 온 교회에 넘쳐 있었고 곧 뒤를 이어 1909년에 최관흘 목사를 시베리아로,한석진 목사를 일본 도오꾜에 파송하였으며, 1910년에는 백만구령운동에 호응하여 김영제와 김진근의 두 목사를 만주 간도 지방으로 보냈다. 감리교에서는 1907년에 국내선교회를 조직하였으며 3년 후에는 이를 "내외지 선교회"로 확장하여 손정도 목사를 블라디보스톡에 파송하여 시베리아 선교에 종사케 하였고, 또 장로회에서는 방화중 목사를 멀리 美州로 보내어 캘리포니아와 멕시코에 있는 이민 동포를 위하여 선교케 하였다.

1907년부터 1910년 사이에 한국교회는 일본과 중국,만주와 시베리아 그리고 미국 대륙과 멕시코에 이르기까지 거창하게 선교사업을 일으켜 세계 교회로부터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3. 장로회총회 창설과 조선강리회의 결성

1907년 독노회가 창설된 이레 교세는 승승장구하여 불과 6년밖에 지나지 아니하여 총회의 결성을 보기에 이르렀다. 1911년에 모인 제5회 독노회는 다음 해에 총회를 조직할 것을 구상하여 그 준비 작업에 몰두하였다. 결국, 독노회 산하의 일곱 대리회가 승격되어 노회의 조직을 보았고 목사 52명,장로 125명과 선교사 44명 등 221명의 회원이 모여 총회가 조직되었다.

총회는 그 최초의 안건으로 독노회의 창립이 선교하는 교회를 지향한 것과 마찬가지로 선교 교회로서의 영광을 다시 한번 과시하였으며 그리고 중국 산뚱성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총회를 위하여 만국장로회 연합총회와 미국 남장로회 총회로부터 문안과 축사가 답지하였으며,그리고 창립총회는 미국 남.북장로회와 카나다장로회,호주장로회의 각 총회를 향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성립되었음을 통고하였다. 이는 한국교회가 세계교회와의 유대를 도모한 현명한 처사로서, 총회 출발부터 세계 교회와의 연결을 우의깊게 모색하였는 고로 예의 바른 행동으로 칭찬을 받을만 하였다.

한국에 있어서의 감리교는 미국의 남.북 감리교에서 파송된 별개의 선교사들에 의하여 가각 독자적 노선을 걸었던 것이나 마침내 이 들이 합동하여 하나의 '조선 감리교'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1907년 6월 남.북 감리교는 '조선인 교역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신학당을 설립하기로 가결하므로', 이 결의가 곧 합동의 실마리가 되었고, 학교 이름은 남감리교와 북감리교가 합동하여 설립했다고 하여 협성신학교라 하였다.

1925년 미국 남.북 감리교의 대표들은 모두가 양 교파의 합동을 찬성하였고 수차의 애로를 극복하면서 1930년 기독교 조선 감리회(Korean Methodist Church)를 결성하는데 도달하였다. 이 남.북감리교의 합동은 한국에 있어서 교파 합동의 효시가 되었으며, 미국의 남.북 감리교의 합동보다 앞서 이루어져 세계 기독교 역사상에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니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