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이승만 정권과 기독교 여성
기독교 여성 지도자들도 과거의 잘못에 대한 반성없이 기독교적 정권인 이승만 정권을 절대 지지하기에 이르렀고 이들이 중심이 되어 해방후 결성된 여성단체들은 주로 정권지지의 차원에서 어용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우선 해방 후에 결성된 여성단체로는 건국부녀동맹,한국애국부인회,조선여자자국민당이 있었다.이들 여성단체들이 정식으로 기독교적 이념을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들 회원 대부분은 과거 일제 치하의 내노라 하는 기독교 여성 지도자들이었다. 그 여성단체들의 조직과정과 활동내용을 대강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8.15와 더불어 일본의 항복을 맞이한 여성지도자들은 8월 16일밤 YMCA에 모여서 여성단체 조직을 논의했다. 이때 좌익측은 정칠성 등을 비롯해서 단체명을 건국부녀동맹이라고 하자고 우겼다. 우익측은 이를 반대하였으나 결국 우익의 몇몇 지도자들이 그 당시 정치연합체였던 건국준비위원회가 있으니 여성들의 모임을 상기한 그 이름으로 두어도 무방하지 않겠냐고 찬성하여 그 이름으로 결정되었다. 이것이 후에 조선부녀동맹이 되고 1947년에는 조선부녀총동맹이라고 개칭되었다.
그런데 이 단체가 주로 좌익활동을 하게 되자 여기에서 유각경을 중심으로 탈퇴하여 한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하였다. 이 한국애국부인회는 지능을 계발하여 자아향상을 기함, 민족 공영의 사회건설을 기함, 여권을 확충하여 남녀공립을 기함이라는 강령하에 박마리아,이효독,최이권 등이 부장으로 호라동하였다.
한편 건국부녀동맹이 좌익과 끝까지 투쟁하던 박순천,황기성,황신덕,박승호 등도 결국 탈퇴하여 독립촉성애국부인단을 조직하였다. 즉 1946년 1월 2일 풍문여고에서 미소공동위원회의 신탁통치 반대 여자 국민 총 궐기대회가 있었는데 좌익여성들의 반대가 격렬하자 대회가 끝난 후 풍문여고 교장실에서 단장에 박승호, 부단장에 황기성, 박순천을 뽑아서 조직하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1946년 4월 11일 우익의 한국애국부인회와 독립총성애국부인단이 통합하여 한국독립촉성애국부인회로 칭하게 되었다. 이 단체는 회장 박승호,부회장 황기성,박순천으로 조국의 자주독립과 여성의 지위향상에 기여할 것을 표방하고 나섰으나 좌익과의 투쟁을 주로 하였다.
이 한국독립촉성애국부인회와 당시 시부녀과장이었던 김성실이 이끄는 관계 애국부인회는 그후 통합되어 대한부인회가 되었고 회장에 박순천이 피선되었다. 대한부인회는 우익단체여서 좌익과의 투쟁을 하기도 하였지만 처음부터 이승만 정권과 하나가 되어 일을 하지는 않았다. 즉 1948년 5월 중앙중학 강당에서 전국 대회를 갖고 부인신문을 내기도 한 대한부인회는 거문도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인 조직을 이룩하였고 활발히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6.25 후 부산 피난시 이승만이 국민회 대표와 여성단체의 대표들도 정당에 가입하라고 하자 박순천 씨가 반대성명을 냈고 이것이 이승만의 노여움을 사서 부인회 건물을 몰수당하게 되었다. 건물을 몰수당한 대한부인회는 활동이 침체되고 단체가 발붙일 장소를 잃게 되자 자유당 말기에 이르러 "대한부인회는 자유당의 기간단체이므로 전국의 대한부인회 회원은 자유당을 적극 지지할 것"이라는 성명을 각 지부에 발송하여 자유당의 산하기구가 되면서 정당의 선거활동을 하는 것이 그 주요사업이 되어 버려서 초기에 하던 생활개선,문맹퇴치,여권신장 등의 사업은 거의 하지 못했다.9)
따라서 해방 직후의 여성단체는 사회단체라 하더라도 정치적 중립성을 유지하기 어려웠고 다분히 정치적 역할을 하거나 집권당에 동조하여 정치적으로 이용당하였다.
이렇게 사회 문화 단체들이 자체의 정비, 통합을 진행하는 동안 건국 부녀동맹보다 하루 늦은 1945년 8월 18일에 한국 역사상 최초의 여자 정치 단체인 여자 국민당이 조직되었다.
여자 국민당을 조직하게 된 배경을 임영신은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즉 그녀는 해방 직후(1945.8.16)이른 아침 여운형 씨 댁을 찾아가서 여운형 씨한테 이 박사가 미국에서 돌아오고 임시정부가 미국에서 돌아올 때까지 임시기간을 세워서 혼란해진 정국을 수습하자고 제의했으나 여운형 씨는 대답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임영신은 결사대 회원을 중심으로 여자 국민당을 조직하기로 결심하였다는 것이다.10) 이렇게 여자 국민당은 출발부터 이승만 지지를 목표로 하고 있다.
임영신이 이승만을 알고 그를 신뢰하게 된 동기는 다음과 같다. 그녀는 다섯살 때,금산에 들어온 서양 여자 최부인을 만난 후 기독교를 알게 되었고 신앙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녀가 미국으로 유학을 갔을 때 이승만을 알게 되었고,이 민족과 국가를 위하여 평생을 바친 이 박사의 눈에서 정의의 불꽃과 혁명투사로서의 지혜를 보았다 11)는 것이다. 그 이후 그녀는 이승만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 조선여자국민당은 "우리는 조선 여성의 자질을 향상하며 정치,경제,사회적 지위를 확보하여 우리 민족국가 건설의 기초가 되기를 기함"이라는 목적하에서 "우리는 전국민의 요구에 의하면 실현된 정체를 지지한다.우리는 남녀평등 권리를 주장한다"는 강령을 세웠다. 즉 이승만 정권의 지지는 곧 여성문제 해결이라고 보는 것이다.
총무부,정치부,경제부,교육부,사회부,문화부,농촌부,위생부,선전부 외에 종교부까지 둔 여자국민당은 임영신,김선,이은혜,박현숙,황현숙,이아주,박은혜 등의 기독교 여성지도자들이 참여하였다.12)
'━━ 영성을 위한 ━━ > 기독교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해방과 기독교 여성 - 2. 6.25, 4.19와 기독교 여성 2 (0) | 2007.03.21 |
---|---|
해방과 기독교 여성 - 2. 6.25, 4.19와 기독교 여성 (0) | 2007.03.20 |
해방과 기독교 여성 - 1.이승만 정권과 기독교 여성 2 (0) | 2007.03.18 |
해방과 기독교 여성 - 1.이승만 정권과 기독교 여성 (0) | 2007.03.17 |
기독교 여성지도자들의 행태와 민중의 고난 7. (0) | 2007.03.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