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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과 기독교 여성 - 2. 6.25, 4.19와 기독교 여성

Joyfule 2007. 3. 20. 01:26

2. 6.25, 4.19와 기독교 여성

1) 6.25

그러나 해방 후 5년만에 그리고 남북한에 각각 분단 국가가 건립된지 2년도 채 안되어서 이 민족은 민족이 서로 싸우고 죽이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북한측의 무력통일 정책에 의하여 발발한 6.25는 그 근본적인 요인이 미국이 국방선을 일본에까지만 포함시키고 남한을 제외한 국방계획서를 발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남한측의 이승만 정권의 불안정도 그 주요한 요인 중의 하나로 들 수 있다.

 

이승만 정권이 안고 있던 불안 요인은 첫째, 미군정이 이어받았던 조선총독부의 친일적 관료를 그대로 물려받음으로써 식민지에서 해방된 민족국가로서의 명분이 제대로 서지 않았고, 두번째 요인으로는 군부의 계속된 반란을 들 수 있다.

즉 미군정 시대에 이미 남조선 국방 경비대가 창설되었고(1946.1.14) 그것이 정부수립과 함께 국군으로 넘겨졌지만 군인 속에는 좌익세력이 상당수 있어서 제주도에서의 5.10선거 반대 폭동(1948.4.3)에 주둔군의 일부가 가담했는가 하면 정부수립 후 2개월 만에 일어난 여수, 순천 반란사건(1948.10.20)때에는 지리산을 중심으로 하는 일대가 한때 반란군의 세력에 들어가기도 했으며 경상북도 대구에서도 1차에서 (1948.11.2)3차에 (1949.1.30)걸친 제6연대 군인의 반란이 일어나 이승만 정권을 위협했다.

 

또한 세번째 요인으로는 이승만 정권이 당면한 정치,경제적 불안을 들 수 있다. 이승만 정권 성립 2년째인 1949년의 경우 정부세출의 605가 적자 세출이었고 통화량이 미군정 말기보다 2배나 팽창함으로써 물가도 2배나 뛰었으며 공업생산 실적은 일제 말기(1944)의 18.6%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제헌국회의 임기가 끝날 즈음 다음 선거에 승산이 없던 이승만은 선거연기를 원했으나 미국측의 압력으로 실패했고 5.30선거(1950)의 결과 이승만 지지세력은 전체의석수 210석 중 30여석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 대신 무소속이 126명이나 당선되었다. 이들 중에는 남북관계에 있어서 정치적 중간파들이 많아서 이승만 체제의 앞날을 불안하게 했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국내정치의 실재를 호도하기 위해 북진 통일론을 내세우고 "점심을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를 호언하고 있었지만 군사력의 열세는 현격했으며 정치,경제적 불안도 가중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1950년 6월25일 새벽에 발발하여 3년 1개월간 계속된 6.25전쟁은 쌍방에서 약 150만 명의 사망자와 360만 명의 부상자를 내었다. 그리고 안으로는 민족분단을 더욱 공고히 하고 남북의 두 정권이 독재체제로 나아가게 하는 큰 계기가 되었으며 밖으로는 동서의 냉전을 격화시키는 하나의 고비가 되었다.13)

 

기독교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좌.우익의 혼란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어디에 정립시키느냐 하는 점이었다. 그런데 기독교는 자신을 결정적으로 우익편에 세웠다. 기독교인인 이승만,그의 지지 및 기반세력인 한민당,기독교 여성지도자들 모두가 하나가 되어 이해관계를 같이 해 나갔던 것이다.

 

따라서 좌.우익의 대립과 갈등의 심화된 표현인 6.25속에서 교회는 좌익을 적대시하였고 좌익으로부터는 가장 적대시되는 대상이 되었다. 좌익의 기독교에 대한 적대시는 이미 사회주의 사조가 한국에 밀려 들어오기 시작한 1920년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920년대부터 기독교와 좌익은 이념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공존할 수 있는 기반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더구나 해방 이후의 기독교는 완전히 친미적 보수 집단으로서 여겨졌고 기독교와 좌익은 완전히 적대적인 두 세력이 된것이었다.

 

그 당시 좌익은 우선 기독교를 자본주의에 대한 옹호기관이요,지배계급의 앞잡이며 비민주주의를 선포하고 착취를 합법화하기를 일삼는 부르조아들의 산실이라고 비난했다. 그리하여 북한에서는 1946년 토지 혁명 이후부터 모든 교회가 가진 사유지와 건물을 몰수하기 시작하고, 6.25를 1년 앞둔 1949년까지는 중요 토지건물은 모두 정부가 장악하였다.

 

또한 교회는 미제국주의자들의 앞잡이라고 비난했다. 공산당은 미국을 해방 직후부터 통일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미국을 철천지한의 원수로 여겼는데 기독교회가 미국에 대해서 절대적 호감을 가지고 있으니 공산당의 눈에는 교회는 미제의 앞잡이고 기독교인들은 천미주의자들로 보일 수 밖에 없었다.

 

세번째 비난으로는 교회의 이승만 지지와 남한에 대한 선호성이었다. 북한교회의 남한 선호도와 이승만에 대한 지지도는 절대적이었다. 1950년 6.25 사변까지 남한 전역에서는 이데올로기의 분열로 이승만을 지지하는 자도 있었지만 역시 반대하는 자도 많았다. 하지만 북한교회는 김일성이 공산무신론자라는 점과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반대하면서 이승만을 지지했던 것이다. 따라서 공산정부는 기독교회를 과거의 질서의 해석자로,교회가 선교하는 복음을 이데올로기적으로 규탄함으로써 강력한 반대투쟁을 벌이게 된 것이다.14)

 

물론 좌익의 비난을 옳은 것으로 다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러나 기독교가 자본주의의 비기독교적 요소를 비판하거나, 이승만 정권의 비민주적,비기독교적 요소를 비판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무조건, 맹목적으로 이승만 정권과 기독교를 동일시하는 과오는 지탄을 받아 마땅하다.

 

즉 한 정권이 이해관계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의를 세우기를 포기한 기독교는 4.19사건 이후 혹독한 비판을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 6.25때는 수많은 교역자들이 그들 개개인의 죄 때문이 아니라 기독교 전체에 대한 좌익의 편견 때문에 미국 제국주의자들이 스파이라는 누명을 쓰고 학살을 당하는 비극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기독교는이 쓰라린 고통만을 강조하여 북한을 적대시하는 태도를 고수해서는 안된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자기를 잡아 죽이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였듯이, 그를 따르는 기독교인들도 그들 사회에서 하나님의 의가 실현되도록 기도하고 노력해야 한다.그래야만 한 민족이 원수되는 담을 헐고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역할을 기독교가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역할을 포기할 때 기독교는 이 땅의 평화의 일꾼임을 포기하는 것이다.

기독교가 이승만 정권의 지지기반이 됨으로써 온전히 한편에 기울어져 화해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은 분단을 조장하고 굳히는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민족이 하나가 되는 화해의 길을 주선하기는 고사하고 방해하는 요인으로 등장한 것이다."15)라는 혹독한 비판을 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