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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과 기독교 여성 - 2. 6.25, 4.19와 기독교 여성 3

Joyfule 2007. 3. 22. 00:59

2. 6.25, 4.19와 기독교 여성

2) 4.19

50년대 경제구조 전체가 이렇게 원조라는 끈 하나에 매달려 지탱되었는데 1957년에 원조가 대폭적으로 삭감되어 버리자 경제구조 전체가 위기에 빠지게 되고 이러한 경제적 위기는 1960년 4.19라는 정치적 격동으로 표출되었다.

4.19의 직접적인 발단은 2.28 대구학생 시위에서부터 비롯되었다. 민주당의 장면 박사가 대구에서 유세하기로 되어 있는 2월 28일,일요일에 학생들에게 등교명령이 떨어지자 대구고등학교와 경북고등학교 학생들이 오히려 학교에 집결하여 스크럼을 짜고 "민주주의를 살리자"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가로 행진해 나갔다.

 

투표일인 3월 15일 마산에서 개표가 진행되는 도중 "부정선거를 즉시 중지하라"는 시위가 있었고 경찰은 결국 발포하여 1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4월 11일 마산 부두에서 눈에 최루탄이 박힌 김주열 군의 시체가 발견되자 "마산직업 소년학교"학생들의 주동으로 시위가 시작되어 13일 밤까지 계속되었다.

그 사이에 대전,충주,수원 등지에서 고등학생들이 주동한 시위가 있었고 4월 18일에는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평화적인 시위를 하던 도중 곤봉,쇠갈고리 등으로 무장한 깡패들에게 테러를 당함으로 시위가 격렬해졌다.

 

마침내 4월19일에는 서울대 문리대생을 필두로 시내 각 대학과 고등학교 학생들이 가두 시위를 시작했다. 결국 106명의 사망자를 내고,43대소의 파출소가 파괴되는 등,전시가지를 피로 물들였던 4월 19일 의거는 계엄군의 진주로 안정되었다.

그러나 25일,전국 27개 대학의 교수 약 4백명이 "4.19의거로 쓰러진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비상계엄하의 서울에서 평화적인 가두시위를 벌임으로써 사태가 크게 돌변했고,이 날의 시위에서 비로소 이승만 대통령 하야를 정면으로 요구하게 되었다.

25일밤 흥분한 군중은 이기붕 씨 집앞에 몰려들었으며,이에 대한 발포로 말미암아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26일 오후 드디어 이승만 댙오령은 하야성명을 발표했고, 이승만 정권은 붕괴되었다. 18) 이승만 정권에 의해서 누적되어 온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걸친 모순은 결국 민중의 저항을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제 이승만 정권과 하나이던 기독교는 "민주주의적 훈련에서나 사회생활의 연대관계,전국적인 조직의 기능과 불타는 신념의 행위 등으로 해서 상당한 정치훈련을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장소였다." 또는 "해방이 되었을 때,적어도 과도기에 상당한 수의 정치가가 교인들 심지어는 목사 중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자화자찬하는 안이한 자세로 살아갈 수는 없게 되었다.19)

 

기독교인들,기도굑 여성들은 이승만 정권이 몰락해가는 최후까지도 그를 지지하였다. [한국기독시보'1960년 3월 1일자에는 "기독여성의 힘으로 교인 대통령 뽑아 경무대에 무당과 기생 드나들 날 방비하자"라는 제목하에 안동교회 유각경,성남교회 김말봉,남대문교회 전순득,정동감리교회 박길래,정동감리교회 심량순,침례교회 이순도,방호선,문인순,감리교회 최회지,성결교회 송기선,통일교회 김순화,남산감리교회 박현숙들이 참석한 좌담회 기사를 싣고 있다. 그 좌담회에서는 "대통령께서 생활을 설명할 때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생활과 화평을 만드는 생활을 하신다고 하는 얘기를 들을 때 언제까지나 궁궐과 같은 경무대를 깨끗한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로 모시도록 우리 백성들이 노력을 해야겠다. 그래야만 우리들은 하나님이 지켜주실 거라고 하는 느낌을 느꼈습니다"라는 주장하에서 이승만의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마치 이승만을 지지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는 식이었다.

 

또한 부통령을 이기붕으로 당선시키기 위한 이승만 정권의 시도에 야합하여 장면은 가톨릭인이라고 비난한다. 즉 "가톨릭의 전체주의적 역사와 박해라든지를 얘기한 것은 교회사를 보면 나오는 것입니다... 근본철학이 우리가 민주주의 국가를 조성하는데 '가톨릭'의 전체주의 밑에서는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지만'..."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즉 가톨릭주의는 정치적인 전체주의와 같은 것이고 따라서 이번 선거는 전체주의와 민주주의의 대결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 일고 있던 고 조병옥 박사 추모투표에 대해서 "조박사가 돌아가신 데 대해 동정을 해가지고 이번에도 다시 이분에게 추모투표를 하면 이것은 제사들이는 것이니까 절대로 추모투표라는 못합니다. 이는 유령에게 선거하는 것이 됩니다. 귀신에게 정치를 해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계몽시켜야 될 일입니다."라고 하여 국민의 의사표시를 신앙과 결부시켰다.20)

 

따라서 4.19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심판인 동시에 또한 한국 기독교에 대한 심판이라고도 볼 수 있다. 기독교는 4.19에 참여하지 않았다. 4.19 학생데모때에도 미션계 학교인 이화여자대학교만이 참여하지 않았다. 그래서 빗발치는 비난을 받았고 이를 부끄럽게 여긴 학생들 중에는 뺏지를 달고 다닐 수 조차 없었다고 한다. 전남 광주에서 외과병원을 경영하는 이모씨는 신문지상을 통해 이화에 다니는 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발표하기도 했다.

 

"....나는 신문이란 신문은 모조리 뒤지면서 데모대열 중에 행여 내 딸의 학교 이름도 나오지 않나 하고 얼마나 찾았는지 모른다... 끝내 나는 네 학교의 이름을 어디서도 발견하지 못했다. 신문을 보면서도 사뭇 북받쳐 견딜 수가 없는 이 벅찬 역사적 마당에서 그 젊은 대열 가운데 하필이면 내딸이 다니는 학교만 빠졌다는 것은 이 무슨 해괴한 일인가... 서울의 거리가 온통 너와 같은 젊은 세대의 불길로 거세게 타오를 때,인옥아 너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 피의 폭풍이 강산을 휩쓸고 마침내 낡고 썩은 것들이 너희들 젊은 앞에 굴복을 하고 만 그 시각에 나의 피를 받은 너는 대체 어디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더냐... 총탄에 넘어진 아들 딸을 가진 부모들의 비통함보다 옷자락 하나 찢기지 않은 너를 딸로 가진 이 애비의 괴로움이 더 깊고 크구나..."21)

 

이러한 해방 후의 기독교에 대해서 노명식 씨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해방 후 한국교회는 일제의 억압에서 풀려난 감격과 감사에 일시 열띠고 있었으나 숨쉴새 없이 연달아 밀어 닥치는 새로운 도전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잘 알 수 없었다. 말을 바꾸면 새 도전의 성격과 의의가 무엇이냐에 정답을 얻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그 이유의 하나는 역사의식의 모호성이었다. 해방후 역사의식이 가장 강렬하고 가장 명확하였던 것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었다. 그 유물사관은 해방된 한국에서 누구도 당할 수 없는 그 나름대로의 과학성을 가지고 있었다. 기독교는 그 본질상 공산주의에 정면 대립하게 마련인데 그 기본적 이유가 공산주의의 유물사관이었다.

 

그런데 그 공한주의가 뜻밖에도 국토의 북쪽 반을 지배하는 현실적 정치적 세력으로 출현하였을 뿐만 아니라 남쪽 반까지도 지배하려는 전쟁을 일으키게 되었을 때 한국 기독교는 마르크스주의적 일체의 사상과 세력에 대항하여 혈투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이 혈투는 불가피한 것이었고 또 정당한 것이었으나 그 결과는 일제의 반공세력과의 일체화속에 자아를 묻어버리는 자아상실을 초래하게 되었다. 그런데 만일 일제의 반공세력이 반드시 다 해방전의 항일민족세력이거나 3.1정신에 입각한 민족주의와 민주주의 세력이 아니라면 그리고 6.25의 국난을 겨우 극복한 우리 정부가 반공을 그 정권연장의 도구로 이용하게 되었으면 기독교의 자아상실적 반공 투쟁의 공로가 어떻게 변질ㄷ하게 될 것이라는 것은 쉽게 추론할 수 있다. 불행히도 이 가정은 역사적 사실로서 그대로 나타났다. 그러므로 1950년대의 한국 기독교는 일부 의식적인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자유당 정권과의 일체감속에서 현실 감각으로 역사의식 없이 엄벙덩범 자기만족에 도취되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