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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시인이며 사상가인 에머슨은

Joyfule 2006. 12. 22. 01:06

미국의 시인이며 사상가인 에머슨은 자연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키웠고, 유럽과 동양의 사상을 두루 섭렵함으로써 그 사상을 살찌웠다. 그리고 미국의 개척 정신을 일깨웠으며, 미국적 철학인 실용주의 사상의 모태가 되었다.


 
에머슨은 1803년 5월 25일 7대에 걸쳐 
성직(聖職)을 이어온 목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보스턴 제1교회 목사였다. 
소년 시절에 에머슨은 엄격한 교육을 받았으며,
 집안은 가난한 편이었다.
1817년 에머슨은 교회와 자애로운 숙모의 
재정적·정신적 후원으로 하버드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는 강의나 독서보다도 자연을 더 사랑했다. 
소년 시절부터 자연미에 예민했던 에머슨은 자신의 일기에서 
“봄날 산과 들의 아름다움에 끌려서 숲속을 배회하고, 
라틴어나 영어를 공부하는 것보다도, 
교실 창 너머로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끌려 골짜기로 내려가 
새소리를 듣는 것이 더 즐거웠다”라고 적고 있다. 
숲은 그의 휴식처이며, 자연은 그에게 말을 걸고 교훈을 주었다. 
대학을 졸업한 에머슨은 얼마 후 형 윌리암이 보스턴에서 경영하는 
여학교에서 잠시 교편을 잡다가, 1825년 목사가 되기 위해 
다시 하버드의 신학대학에 들어갔다. 
그가 세속의 평범한 직업을 택하지 않고 목사직을 갖고자 마음먹기까지에는 
숙모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에머슨에게, 인습과 타협의 길을 걷지 말고 은거와 
지적 독립을 통하여 자연과 영적인 교류를 하며 살아가기를, 
그리고 천상의 뮤즈 신에게서 영적인 지도를 받기를 권유했다고 한다.
■ ‘나를 떠나 살지 않으리라’
1826년 에머슨은 미들섹스 목사협회로부터 설교 허가를 받아 목사 후보자로서 여러 교회에서 설교했다. 
1829년 결혼과 더불어 보스턴 제2교회의 준목사로 출발하여 후에 전임 목사로 정착했다. 
그는 비신학적이지만 윤리적이고 단순한 내용의 설교로 교회의 젊은 신도들을 매료시켰다. 
교회의 딱딱한 교리를 못 견뎌 했던 그는 일기에 
“나는 훌륭한 성직자가 되기 위해 교회를 떠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가끔 생각한다. 
그 직업은 이제 진부해졌다”라고 쓰기도 했다. 
1832년에 그는 빵과 포도주가 없어져야만 성찬식을 거행할 수 있다고 공언했다. 
예수가 그 의식을 정규적으로 준수할 것을 의도하지 않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로 교회와 충돌한 그는 결국 목사직을 사임하고 강연가로서 생계를 유지했지만, 
설교자로 남아 있는 것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목사가 아닌 설교자로서의 그의 의무는, 대중들로 하여금 인간 내부의 광명을 깨우쳐 주는 일이었다. 
이 무렵 그의 심적 성장에 큰 영향을 준 것은 콜리지의 조화의 철학, 
스베덴보리의 종교적 신비철학, 워즈워스의 자연시, 칼라일의 힘찬 자아의 목소리였다. 
아내가 죽고(1832), 직업을 잃고, 동생 에드워드가 병상에 눕는 등으로 인해 심신이 고달팠던
 에머슨의 정신을 떠받쳤던 힘은 대륙의 시인과 철학자들의 용기 있는 자기 신뢰의 목소리였다.
당시 그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나를 떠나 살지 않으리라. 
남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으리라. 나의 선은 선하고, 나의 악 또한 악하다. 
나는 자유로워지고 싶다. 남이 갖고 싶어하는 것을 갖는 동안 나는 자유로울 수 없다. 
나는 감히 자신의 길을 발 아래 깔아 두려고 한다.”
에머슨은 지친 마음과 몸을 추스리기 위해, 그리고 유럽 사상가들의 목소리를 
가까이서 듣기 위해 1832년 크리스마스에 지중해를 향하여 출범했다. 
이탈리아를 경유하여 파리를 방문하고, 스코틀랜드와 영국에서 2개월 동안 머물면서, 
가장 만나고 싶어했던 네 사람의 시인과 사상가들을 만났다. 
랜더, 콜리지, 칼라일, 워즈워스가 그들이다. 
특히 에머슨과 칼라일의 만남은 두 사람의 생애에 큰 영향과 변화를 가져왔다. 
에머슨은 칼라일의 저서를 미국에서 출판했고, 칼라일은 에머슨의 논문을 영국에 소개했다.
에머슨은 유럽 여행의 귀로에 쓴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인간은 그 자신의 내부에 자기를 지배하는 데 필요한 일체의 것을 소장하고 있다.… 
자기 몸에 닥쳐오는 참된 행복, 참된 재난의 일체는 자신에게서 연유한다.… 
인간의 심령과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 사이에는 대응이 있다. 
외적으로 사물을 연구하지 않아도 이러한 사물 일체의 원리는 그의 마음 속에서 꿰뚫어볼 수가 있다.… 
인생의 목적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알게 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최고의 계시는, 신이 인간 각자의 내부에 깃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에머슨이 평생 동안 변함없이 믿고 주장한 신념이며, 
그의 초절주의 사상과 직관 철학의 정수를 암시하고 있다.
1833년 건강을 회복하고 새로운 희망에 부풀어 귀국한 에머슨의 생활은 
다시는 흔들리지 않는 궤도에 올라섰다. 그는 콩코드에 집을 마련하고, 
다음해에 리디아와 재혼하여 보스턴에서 강연자의 생애를 시작했다.
그는‘위인론’‘영국 문학’‘역사 철학’등의 강연으로 청중의 갈채를 받고 명성을 얻었다. 
특히 1837년 여름 하버드 대학의 파이 베타 카파(Phi Beta Kappa) 학회에서 행한 ‘
미국의 학자’라는 연설은 그의 전기를 쓴 홈즈 박사가 주장한 바와 같이 
미국의 ‘지적 독립 선언문’이었다.
이 연설에서 에머슨은, 학자란 세 가지 자료에서 자신의 지식을 얻는다고 했다. 
첫째는 자연이며, 둘째는 행동이고, 셋째는 서적이며,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자연이다. 
자연은 단순히 분리되어 있는 원자적인 힘이 아니다. 
그것은 무정한 경쟁이 일어나는 세계가 아니며, 물리적인 법칙만으로 설명될 수도 없다. 
자연은 도덕적인 목적의 표현이다. 그것의 이면에는 실재의 원리인 신(神)이 존재한다. 
그 안에 분명한 본질이 존재한다. 왜냐 하면 모든 사물은 그것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머슨은 마침내 ‘너 자신을 알라’라는 고대의 격언과 
‘자연을 배우라’라는 근대의 격언을 합쳐서 말했다.
그리고 에머슨은 학자들에게, 행동하는 인간이 될 것을 촉구했다. 
그는 지적으로 세상을 등진 사람이 되는 것을 싫어했다. 
미국의 많은 지식인들이 습관적으로 그랬던 것처럼, 과거의 지식에 매달리는 것은 배신이다. 
왜냐 하면 길거리의 사람들이 그들의 식견을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적에 국한된 학문은 이 세상의 체험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아주 불완전하고 빈약하다.
수십 년 동안 그는 전국을 다니며 도시와 농촌에서, 학자들의 모임에서, 
그리고 시골 사람들과 학생을 상대로 강연을 계속했다. 
그의 명성은 높아졌고, 널리 퍼졌다. 에머슨의 열정적인 연설에 감동한 사람들이, 
영혼의 힘을 믿고 내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 콩코드로 몰려들었다.
에머슨은 어떤 클럽이나 종파에 가담하는 것을 싫어했고, 자신의 사상에 체계를 세우려 하지 않았다. 
그의 추종자들이 조직체를 만들려는 것도 극력 말렸지만, 
그의 사상과 인품에 이끌려 그의 주위에 모여든 사람들의 사적인 모임에서 
이른바 뉴잉글랜드의 ‘초월주의(Transcendentalism)’가 탄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