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성을 위한 ━━/에세이 2063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받아들임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받아들임 법무장교생활을 같이 한 친구가 있었다. 일주일에 영어소설 한 권씩을 읽는 노력파였다. 그가 낸 번역서도 여러 권 있었다. 그가 삼십대 중반쯤이었다. 사무실에 앉아 있던 그는 갑자기 머리가 깨지는 듯 아팠다.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보았다. 미세한 기생충알이 뇌수가 흘러내리는 관을 막아 뇌압이 올라갔다는 것이다. 그는 뇌수술을 받았다. 뇌수술 후 이상한 증세가 나타났다. 앞이 보이지를 않았다. 나는 친구인 그를 데리고 서울대 안과로 갔었다. 안과의사는 실명을 선언했다. 나는 그래도 입원을 시켜서 수술을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의사에게 부탁했다. 담당의사는 그를 입원시키면 회복이 가능한 두명의 환자를 치료할 수 없다면서 거절했다. 섭섭했지만 의사의 입장도 이해할 수 있었다. 실..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글 빵을 처음 산 손님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글 빵을 처음 산 손님 삼십대 중반쯤이었다. 한 시사잡지로 부터 수필의 원고청탁을 받았다. 나는 고심하며 며칠간 썼다. 문학적인 글은 처음이지만 잘 썼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판결문, 변론문도 써 봤는데 붓가는 대로 쓴다는 수필을 못 쓰겠나 싶었다. 며칠간 고심해서 쓴 원고를 가지고 잡지사 편집장에게 갔다. 그가 내 원고를 잠시 훑어보곤 입을 열었다. ​ “저하고 잠깐만 저리로 가시죠”​ 그는 잡지사 구석에 있는 칸막이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그가 탁자 위에 나의 원고를 놓더니 의견을 얘기했다.​ “저는 우리 잡지의 귀한 지면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글의 도입 부분을 보니까 공자를 인용하셨네요. 왜 본인만의 것을 담지 않으십니까? 다시 써보시죠.”​ 나는 자존심이 상했다. 그렇지..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손실위험이 없는 투자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손실위험이 없는 투자 살아오면서 어떤 순간이 즐거웠을까.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순간적인 연애도 달콤했다. 그러나 오랜 세월 묵은 된장같이 깊은 맛을 내게 준 것이 책읽기다. 세월 저쪽에 있던 기억 한 장면이 꿈틀거리면서 기어 나오고 있다. 이십대 중반 신촌역 부근의 쪽방에 세 들어 살 때였다. 그날은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나는 따뜻한 아랫목에 배를 깔고 엎드려 추리소설에 빠져있었다. 점심 무렵 석유풍로에 냄비를 올려놓고 인스턴트 우동을 한 그릇 끓여먹으며 소설을 계속보고 있었다. ​ 죽은 아내의 복수를 한 주인공이 경찰에 쫓겨 골목길로 도망치고 있었다. 감정이입이 된 나는 고독한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오후에 책을 다 읽었다. 비는 계속 내..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마음의 벗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마음의 벗 중학교 삼학년 시절 나는 무기정학을 당했다. 학교의 게시판에 처벌내용이 붙었다. 모범생들만 다닌다고 알려진 당시 명문중학교에서 그런 처분은 명예의 사형선고 비슷한 것이었다. 학교에서는 정학기간 동안 어떤 학생도 나를 찾거나 접근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옛날의 선비들의 귀양중의 위리안치(圍籬安置)비슷하다고 할까. 나는 내 방에서 혼자 지냈다. 나는 뚜껑이 덮인 깊고 깜깜한 우물 아래 축축한 흙바닥에 앉아있는 느낌이었다. 그 누군가 뚜껑을 조금 열고 들여다 보아 주기라도 한다면 그 자체만으로 빛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절망하고 있을 때 학교의 금지명령을 어기고 나를 찾아와준 친구가 있었다.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평생 잊지 않겠다고 속으로 다짐했었다.​ 무기정학처분이..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은밀한 기쁨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은밀한 기쁨 내가 아마 아홉살쯤이었을 것이다. 나는 가난한 동네에 살았다. 어느날 이웃 항남이네 집으로 갔다. 그 집 아이들 일곱명 바글거렸다. 그 시절은 집집마다 아이들이 많았다.​ 내가 막 한글을 배웠을 때였다. 동네 전봇대에는 ‘생긴대로 다 낳으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라고 적힌 종이가 붙어있었다. 골목어귀 회벽에 나란히 붙어있던 선거벽보 중에 ‘배고파 못살겠다. 죽기 전에 갈아치자’라는 구호가 지금도 희미하지만 기억에 남아있다. ​ 좁은 골목 어둠침침한 항남이네 집 안방에는 항남이 엄마와 그 집 아이들이 앉아 있었다. 방바닥의 작은 도마 위에는 얇은 어묵 한 장과 간장 종지가 놓여 있었다. 아이들은 모두 어묵을 보고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항남이 엄마는 칼로 예술품을 다루듯..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우리들의 기본자세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우리들의 기본자세 화가 김씨와 박씨는 서로 다른 유파에 속해있어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어느 해 김씨가 미술대전에 작품을 냈는데 마침 박씨가 심사위원장이 되었다. 박씨는 김씨의 대선배였다. 심사는 막바지에 이르러 마침내 최종심이 진행되고 있었다. 심사위원장인 박씨의 낙점에 따라 당락이 결정되는 순간인 것이다. 박씨는 문득 김씨의 작품 앞에 멈추어 섰다. 순간 박씨의 얼굴이 벌레라도 씹은 듯 잔뜩 찌푸려지면서 “개새끼”라는 욕을 내뱉었다. 옆에서 그 모습을 사람들은 김씨가 결국 낙선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속으로 그를 동정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었다. 다음순간 심사위원장인 박씨는 “개새끼, 그래도 그림 하나는 잘 그린단 말이야”라고 말했던 것이다. 김씨의 작품이 입상했음은..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왜?’라는 질문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왜?’라는 질문 언론이 부장검사와 카지노업자와의 유착관계를 연일 보도하고 있었다. 그 검사는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대학재학중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삼십대에 지청장이 되어 있었다. 그는 출세가 보장된 길을 가고 있었다. 그는 자기 인생을 파괴할 수 있는 뇌물을 받을 사람이 아니었다. 어느 날 저녁 레스트랑에서 그의 얘기를 들었다.​ “집사람과 친한 호텔 사장 부인이 있었어요. 부부동반으로 식사를 하면서 우연히 그 남편을 알게 됐죠. 부부끼리 같이 나자로 마을에 가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친해졌어요. 종종 밥도 같이 먹었죠. 명절 때 친해진 호텔 사장이 와인 두 병이 든 선물을 보냈는데 거절하기 힘들었어요. 호의로 보냈는데 내가 검사라는 직위를 내세우면서 그걸 돌려보내면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학교폭력의 흉터치유법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학교폭력의 흉터치유법 조선일보에 이십대 여성 사진과 함께 독특한 기사제목이 떴다. ​ 학교폭력과 이를 복수하는 주인공의 이야기인 드라마 ‘더 글로리’처럼 학교폭력의 피해를 당한 뒤 유튜브등을 통해 이를 고발했던 표예림씨가 한 호수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유튜브에 ‘이제 그만 편해지고 싶습니다 이젠 더 이상 고통을 감내하고 이겨낼 자신이 없어요. 삶을 지속해야 할 어떠한 것도 남아있지 않습니다다’라고 자살을 암시하는 영상을 올렸다. 증오와 보복 그리고 절망이라는 감정이 뒤얽혀 자신의 생명을 끊어버린 것 같다. 그걸 보면서 중학교 삼학년인 내 손녀는 혹시나?하는 걱정이 피어오른다.​ 나역시 십대에 학교에서 폭력의 피해를 당한 적이 있다. 우쭐대는 성격의 재..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무기수와 권력가의 용서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무기수와 권력가의 용서 한 무기수로 부터 들은 얘기다. 그는 주먹이 강하고 몸이 날렵해 사채업자의 심복으로 있었다. 감옥 안에서 그를 유난히 괴롭히는 교도관이 있었다. 밤이면 아무도 없는 방에 그를 끌어다 놓고 괴롭혔다. 벽에 밀어 부치고 목을 조르고 쓰러지면 밟고 짓이겼다. 찌는 듯한 한 여름에는 재래식 똥통에 머리를 쳐 박고 있게 했다. 그는 괴롭힘을 당하면서 언젠가는 그를 잔인하게 죽여버리겠다고 이를 갈았다. 그는 어느 날 작업장에서 쇠톱 조각 하나를 감추어 들어오는 데 성공했다. 감방에는 몇 명이 함께 있었다. 그는 화장실을 갈 때마다 꾸준히 창에 붙어있는 쇠막대를 조금씩 쇠톱으로 잘랐다. 감방에 있는 다른 죄수들도 눈치를 채지 못할 정도로 미세한 작업이었다. 감방 벽의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달팽이 인간의 마지막 도착지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달팽이 인간의 마지막 도착지 나와 친한 고교선배가 있다. 나이 팔십을 바라보는 그는 컴퓨터의 자판조차 치지 못한다고 했다. 고위직 법관으로 있을 때 비서가 다 해주는 바람에 배우지 못했다고 얼마 전 만난 그 선배의 부인이 이런 말을 했다.​ “남편이 그 나이에 주민센터 컴퓨터 교육반에 등록했어요.아침 열시부터 오후 여섯시까지 점심도 먹지 않고 컴퓨터 공부를 하고 있어요.”​ 노인이 하루에 여덟시간 이상을 집중적으로 공부한다는 것이다. 그 선배는 원래 그런 기질이었다. 고시 공부 시절 삼복 더위에 다락방에서 옷을 벗고 공부하다가 궁둥이 살이 뭉개지면서 팬티의 섬유와 뒤섞인 채 굳어져 응급실에 간 적도 있었다. 그는 사법고시 수석합격자였다. 노력뿐 아니라 그는 좋은 머리도 물려받은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이 정도 쯤이야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이 정도 쯤이야 차를 타고 가면서 유튜브에서 흘러나오는 가수 김수철씨의 강연을 무심히 듣고 있었다. 나의 뇌리에는 작달막한 남자가 커다란 기타 뒤에서 양다리를 앞뒤로 활짝 벌리고 폴짝 뛰던 광경이 남아 있다. ​ “벌써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른지 오십년이 넘었습니다. 저는 그 세월 동안 매일 두 시간 이상 기타 연습을 해왔습니다. 나이 먹은 지금도 합니다. 향상을 위한 게 아닙니다. 유지하려고 해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심지가 들어있는 말이었다. 그에 대한 나의 선입견이 너무 가벼웠던 것 같다. 그의 강연이 계속되고 있었다.​ “동시에 두 가지를 할 수 없어요. 돈이 안 나오더라도 한가지 일에 전념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가수가 돈이 없다고 해서 식당을 운영하면서 에너지를 쏟..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인간은 겨울을 견디는 나무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인간은 겨울을 견디는 나무 사십대 중반쯤 검진센터 의사로 부터 암 선고를 받은 일이 있었다. 그 순간 앞이 캄캄해지고 막막했었다. 어떻게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 하고 화가 났었다. 그렇지만 나의 능력으로 그 무엇도 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불운을 인정하고 단념할 수 밖에 없었다. 장기 하나를 떼 버리고 살아났다. 단념하니까 행운이 온 것 같기도 했다.​ 오십대 초반 백내장 수술을 받았다. 부작용의 확률이 0.02퍼센트도 안 되는 안전한 수술이라고 했다. 그런데 내가 그 작은 확률에 걸렸다. 대학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내 눈알에 주사침을 박고 약을 집어넣었다. 일년 후 다시 탈이 났다. 이번에는 안구에 넣었던 인공렌즈가 마음대로 자리를 이탈했다는 것이다. 다른 대학병..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그들이 남긴 향기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그들이 남긴 향기 법무장교 동기생 중의 한 사람이 암에 걸렸다. 그는 나이를 먹었어도 열심히 중국어를 공부했다. 그는 죽기 얼마 전 동기생들에게 사과 한 상자씩을 택배로 보냈다. 마지막 선물이었다. 그가 죽은 후 문 앞에 덩그라니 남은 사과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삶을 마치고 떠나간 후 그의 빈자리같았다. 마음이 애잔했다.​ 법무 장교 훈련 시절 같은 내무반에서 생활했던 또 다른 인물이 있었다. 군대 시절 내가 모략을 받은 적이 있다. 보안부대에서 내가 뇌물수수의 혐의가 있다고 첩보를 올린 것이다. 아마도 지역 보안부대장과 싸운 것이 그런 보복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당시 그 기관은 국가권력의 정점이었다. 그곳에서 흰걸 검다고 해도 그렇게 만들어야 하는 분위기였다. 나는 육군본부에..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나만 불행한 것 같을 때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나만 불행한 것 같을 때 그 모자가 다급하게 한 번만 더 돈을 꿔 달라고 했다. 사채업자에게 돈을 얻었는데 죽을 지경이라고 했다. 이도저도 안 되면 자살을 하겠다고 했다. 그 모자는 우연히 알게 된 의뢰인이었다. 미용사였던 엄마가 사채업자에게 걸려들어 어린 아들과 도망 다녔다. 찜찔방을 전전하면서 돈이 없었다. 아들에게는 라면을 사 먹이고 엄마는 물에 불린 건빵 한 봉지로 끼니를 때웠다. 모자는 마지막에 노숙자가 되어 서울역 앞 광장으로 내몰렸다. 변호사인 나는 그 모자를 위해 사채업자와 싸움을 했다. 사채업자는 판사 앞에서도 독을 내뿜으며 바닥에 드러누웠다. 모자를 묶었던 악마의 사슬을 풀어주었다.​ 모자는 작은 음식점을 차렸다. 매일 밤을 새우면서 몇백개씩의 만두를 빚었다.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내가 있을 자리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내가 있을 자리 아름다운 마음 한 조각을 담은 댓글을 보았다. 연휴에 노가다 일을 하며 먼발치에서 평화로운 연휴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있다고 했다. 돈이 없어 여행을 못하지만 일하는 자리에서 파란 하늘을 보고 들꽃과 나무를 본다고 했다. 먼발치에서 평화로운 모습들을 바라보고 무언가를 느끼는 것이 여행과 결을 같이 하는 게 아니냐고 했다. 그는 일을 사랑하고 마음의 제단에 음악을 바치고 산다고 했다. 마음이 열리고 영혼의 눈이 열린 성자 같은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가 있는 자리는 어떤 곳이든 주변이 평화로운 색깔로 물들 것 같다. 일정표에 끌려다니고 인증샷으로 자랑하기 위한 여행은 의미가 없는게 아닐까.​ 자유로운 영혼이 무한한 시공간을 돌아다니며 지극히 평온한 제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