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성을 위한 ━━/역사와인물 2609

신숭겸(申崇謙) 장군

歷史 Essay 1368 ☞ 신숭겸(申崇謙) 장군 백제군의 장군들이 왕건(王建)을 베었다고 환호했지만 사실 죽은 이는 신숭겸(申崇謙)이었다. 왕건은 그에게 평산 신씨(平山申氏)를 사성(賜姓)해 신숭겸은 시조가 된다. 나중에 고려군이 그의 주검을 수습할 때였다. 숱한 시신 중에 시신을 찾을 길이 막막했다. 더구나 그의 시신은 목이 잘렸으므로 더욱 난감했는데 다행히 왼쪽 발에 북두칠성 모양의 사마귀가 있었다는 제보가 들어와 시신을 수습했다. 지금도 평산 신씨 후손들은 왼쪽 발에 사마귀가 있다 한다. 원래 전남 곡성(谷城) 출신인데 평산은 왕건과 자주 사냥을 나갔던 지역이고 그의 묘가 춘천(春川)에 있는 것으로 보아 뒤에 춘천에 옮겨와서 살게 된 것으로 보인다.

신숭겸(申崇謙)의 죽음

歷史 Essay 1367 ☞ 신숭겸(申崇謙)의 죽음 927년 9월 백제군은 문경(聞慶) 영천(永川) 등을 함락시키며 경주(慶州)로 진입한다. 고려(高麗) 쪽으로 기울어 있는 박씨 정권의 마지막 왕 55대 경애왕(景哀王)을 자진시키고 김씨 왕족인 경순왕(敬順王)을 세우고 의기양양하게 전라도로 철수한다.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은 왕건(王建)은 5천의 기병을 이끌고 남하를 계속해 지금의 대구 공산(公山)에서 역사적인 전투가 벌어진다. 이 대접전에서 왕건군은 공산 남쪽 동수(桐藪-桐華寺) 지역의 미리사(美理寺) 근처에서 백제군에게 완전히 포위된다. 왕건과 용모가 비슷한 신숭겸(申崇謙)이 결단을 내려 왕건을 대피시키고 어의(御衣) 차림으로 변복하고 나와 싸우다가 목이 잘린다. 패주하면서 김락(金樂) 장군도 전사한다.

인질(人質)의 교환(交換)

歷史 Essay 1366 ☞ 인질(人質)의 교환(交換) 견훤(甄萱)은 918년 6월 왕건(王建)이 고려(高麗)를 건국하자 8월에 일길찬(一吉飡) 민합(閔郃)을 파견하여 즉위를 축하한 바 있었다. 두 나라가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925년 10월 지금의 의성(義城)인 조물성 전투(曹物城戰鬪)에서 견훤의 3천 병력이 전세가 불리해지자 왕건은 그 때 일을 기억하며 화친을 청한다. 이에 화친의 의미로 왕건은 사촌 아우 왕신(王信)을 견훤은 생질인 진호(眞虎)를 서로 볼모로 보낸다. 그런데 다음해 4월 고려에 와 있던 진호가 갑자기 병사한다. 그러자 견훤은 고려에서 그를 죽인 것으로 간주해 고려측 인질을 죽여 시신을 보내고 즉시 출병한다. 이 때까지만 해도 고려는 백제에게 전력이 한참 열세였던 때였다.

아자개(阿慈介)의 귀부(歸附)

歷史 Essay 1365 ☞ 아자개(阿慈介)의 귀부(歸附) 견훤(甄萱)의 아버지 아자개(阿慈介)는 경북 상주(尙州)에서 처음에는 농업에 종사하였지만 신라 하대 혼란기에 전국의 지방세력이 봉기하자 885년 상주 사불성(沙弗城)을 근거지로 군대를 일으켜 장군을 자칭하였다. 4남 중 장남인 견훤이 892년 광주를 점거하고 900년 전주를 근거지로 후백제를 세웠을 때도 아자개는 상주에 웅거하고 있었는데 아들과 사이가 안 좋았는지 918년 7월 왕건(王建)의 귀부(歸附) 요청 사신에게 순순히 응했다. 왕건은 즉시 문무백관들이 의례를 연습해 극진하고 파격적으로 일행을 환대했다. 그로서 고려는 낙동강 유역을 교두보로 삼을 수 있게 된다. 아버지의 귀부에 대한 견훤의 반응은 알 수 없다.

이흔암(伊昕巖)의 난(亂)

歷史 Essay 1364 ☞ 이흔암(伊昕巖)의 난(亂) 이흔암(伊昕巖)은 공주(公州) 지역을 담당하는 대장군으로 궁예(弓裔)의 총애를 받던 장군이었다. 918년 왕건(王建)의 쿠데타로 주군이 시해된 것에 충격을 받고 왕건을 시해할 목적으로 분위기도 살필 겸 철원(鐵原)으로 올라왔다. 그가 병력을 이끌고 오는 바람에 백제(百濟)가 냉큼 공주를 점령했다. 주둔지 이탈만으로 처형할 수도 있었지만 왕건은 증거가 없다고 주저하면서 나인을 그의 집으로 밀파했다. 이흔암의 부인이 화장실에서 “남편일이 실패하면 나도 죽을텐데” 라는 말을 듣고서야 그를 불러다가 꾸짖었다. 눈물을 흘리며 후회했지만 저잣거리에서 처형되었다. 918년 6월 고려(高麗)를 건국한지 한달 만이었다.

환선길(桓宣吉)의 난(亂)

歷史 Essay 1363 ☞ 환선길(桓宣吉)의 난(亂) 왕건(王建)은 918년 6월 고려를 건국한 지 4일 만에 죽을 고비를 넘긴다. 왕건과 함께 고려 건국에 참여했던 마군장군(馬軍將軍) 환선길(桓宣吉)이 아내의 부추김으로 왕위를 노리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환선길의 역모계획은 마군장(馬軍軍) 복지겸(卜智謙)에 의해 왕건에게 보고되었는데 증거부족으로 무마시키려는 중 환선길은 50여 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내전에 침입하여 마침 신하들과 회의를 하던 왕건에게 칼을 겨눈다. 그러나 왕건이 태연한 태도를 보이고 겁을 먹지 않자 복병이 숨어 있다고 생각해 겁을 먹고 도망간다. 결국 그는 근위병들에게 잡혀 처형당하고 그의 동생 환향식(桓香寔)도 같은 혐의로 처형된다.

고려(高麗)라는 국호(國號)

歷史 Essay 1362 ☞ 고려(高麗)라는 국호(國號) 1392년 이성계(李成桂)가 나라를 세우고 정한 국명 조선(朝鮮)은 기원전 2333년 단군(檀君)의 조선을 그대로 차용한 것인데 우리는 구별하기 위해 고조선(古朝鮮)이라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궁예(弓裔)도 895년 건국하면서 고려라는 국호(國號)를 사용했다. 나중에 904년 마진(摩震) 911년 태봉(泰封)으로 바꾸긴 했지만 애초에는 고구려(高句麗)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였다. 그런데 왜 고구려(高句麗)가 아니고 고려였나. 고구려는 장수왕(長壽王) 시절 국호를 고구려에서 고려로 바꿔 668년 망국 때까지 이어진 것인데 우리가 편의상 고구려라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궁예는 고려라는 이름을 쓴 것이고 나중에 918년 왕건(王建)도 건국하면서 고려(高..

왕건(王建)은 도선(道詵)을 만나지 못 했다

歷史 Essay 1361 ☞ 왕건(王建)은 도선(道詵)을 만나지 못 했다 고려사(高麗史)에 도선대사(道詵大師827-898)가 왕건(王建877-943)에게 도선비기(道詵秘記)라는 책을 전해주었다 하지만 이는 도선이 입적할 때 왕건이 궁예(弓裔)의 휘하에 들어가 막 활동을 시작할 때였다는 점을 보면 사실일 리가 없다. 오히려 견훤(甄萱867-936)은 가르침을 받았을 수도 있고 특히 견훤의 왕사(王師) 경보 스님은 도선에게 많은 가르침을 받았을 것이다. 경보(慶甫869-948)가 나중에 왕건에게 귀의했으므로 간접적으로 도선의 가르침을 전했을 수는 있겠지만 직접 둘이 만났을 가능성은 없다. 신라말 도선의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이 왕건의 세력확대와 건국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므로 그 얘기는 후세에 창작된 것이다.

고려(高麗) 건국

歷史 Essay 1360 ☞ 고려(高麗) 건국 신라 진성여왕(眞聖女王) 20년인 896년 20세에 아버지와 함께 궁예(弓裔)의 휘하로 들어간 왕건(王建 877-943)은 송악태수가 되었으며 2년 뒤인 898년 궁예가 송악으로 도읍을 옮길 때는 공사를 감독하여 벼슬이 올랐다. 다시 2년 뒤 900년에는 경기도 충청도 일대를 점령한 공으로 아찬(阿飡)에 올랐으며 903년에는 해군을 이끌고 후백제 후방인 금성(錦城)을 정벌하여 나주(羅州)로 고치고 군대를 주둔시켜 궁예가 가장 신임하는 장수가 되었다. 이어 후백제 견훤(甄萱)과의 전투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913년 재상(宰相)으로 승진한다. 궁예의 학정을 견디다 못해 군의 옹립을 받은 왕건은 918년 6월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高麗)를 건국한다.

사성(賜姓)정책

歷史 Essay 1359 ☞ 사성(賜姓)정책 호족(豪族)들과의 정략결혼 외에도 왕건(王建)은 사성(賜姓)정책을 썼다. 왕건 자신도 원래 왕씨(王氏)가 아니었다. 할아버지 작제건(作帝建) 아버지 용건(龍建) 본인 왕건(王建) 등 마지막 글자가 建이었는데 자신부터 왕씨 성을 쓰고 명주(溟州-강릉江陵)의 신라 왕족 김순식(金順式)이나 큰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왕씨 성을 하사하는가 하면 지방호족을 장악하기 위해 토성(土姓)을 나눠 주며 일정 지역에 살게 했다. 박가(朴哥) 성을 지닌 집단이 반남(나주-羅州)에서 거주하면 반남 박씨(潘南 朴氏)라고 하는 식이다. 그리하여 삼국시대에는 왕실과 귀족들만 사용하던 성씨(姓氏)와 본관(本貫)은 고려부터 일반화된 것이고 양인(良人)은 물론 천민(賤民)까지 성씨를 얻기 시작..

호족(豪族) 우대 정책

歷史 Essay 1358 ☞ 호족(豪族) 우대 정책 왕건(王建)은 다음 해인 919년 도성을 송악(松嶽-開城)으로 옮긴다. 궁예(弓裔)의 터전이었던 철원(鐵原) 주민들의 반감을 의식해 자신의 기반인 송악으로 옮겨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함이었다. 태봉(泰封)은 원래 호족연합국가(豪族聯合國家)였는데 왕건은 고려(高麗) 건국 후 각 지방 호족들을 견제하고 유화할 필요성을 절감한다. 그래서 유화적인 성품을 앞세워 각 지역의 유력한 인물들과 결혼을 통한 인척 관계를 맺는다. 그 결과 황해 9 경기4 충청 3 강원 3 전라7 경상 6 미상 2 등 무려 29명의 부인에게서 27남 8녀를 얻는다. 그리고 삼국시대에는 왕실과 귀족들만 성(姓)을 사용했는데 왕건은 사성(賜姓)정책을 실시한다.

왕건(王建)의 쿠데타

歷史 Essay 1357 ☞ 왕건(王建)의 쿠데타 공식 기록에는 복지겸(卜智謙) 등 네 장수가 궁예의 폭정에 시달리다 못해 왕위를 권하고 수차 망설이던 중 신혜황후 유씨(神惠皇后 柳氏) 부인이 갑옷을 가져와 결단을 촉구했다고 되어 있지만 왕건(王建 877-943)의 거사는 철저히 준비된 쿠데타였다. 이는 궁예를 제거한 후 환선길(桓宣吉) 이흔암(伊昕巖) 등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공주(公州) 이북의 30여 성이 한꺼번에 후백제(後百濟)로 귀의했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결국 궁예 사후 옛 백제 호족들이 하도 많이 떨어져 나가 몇 년 만에 태봉(泰封)의 국력이 후백제보다도 떨어졌다. 그러나 왕건은 타고난 리더십을 발휘해 호족들을 끌어들여 고려(高麗) 정국을 안정시키고 삼국 통일을 완수했다.

궁예(弓裔)의 관심법(觀心法)

歷史 Essay 1356 ☞ 궁예(弓裔)의 관심법(觀心法) 궁예(弓裔)의 소위 관심법(觀心法)이 등장한 것은 905년 도읍을 철원(鐵原)으로 옮긴 후부터였는데 처음에는 궁녀(宮女)들이나 하급 관리들을 제거할 때 동원했지만 915년 그 칼날이 왕후(王后)에게 향한다. 궁예는 왕비 강씨에게 간음했다는 누명을 씌워 인두로 국부를 지져 죽였으며 그 동안 청광보살(靑光菩薩), 신광보살(神光菩薩)이라며 신격화했던 두 아들까지 죽였다고 고려사는 전한다. 그러나 처음에 송악(松嶽)을 본거지로 해 고구려의 부활을 목표로 나라 이름까지 고려라고 하다가 갑자기 국명도 바꾸고 철원으로 옮긴 것에 대해 패서(浿西-황해도)지방 출신 호족(豪族)들의 불만을 대변하며 왕비가 자주 반기를 들어 작심하고 제거한 것으로 보인다.

궁예(弓裔)의 몰락

歷史 Essay 1355 ☞ 궁예(弓裔)의 몰락 913년 왕건(王建)을 시중으로 임명해 후삼국의 주도권을 쥐게 되자 궁예(弓裔)는 차츰 그 난폭성을 드러낸다. 터무니없는 독심술을 내세워 바른말하는 승려와 신하들을 죽이고 심지어는 왕비와 두 아들까지 처참하게 살해하는 등 폭정을 하자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 등이 왕건을 찾아와 모반을 도모하자고 부추긴다. 왕건은 망설이다가 부인 유씨의 설득에 힘입어 군사를 모아 왕궁으로 진격한다. 왕건이 군사를 몰고 왕성으로 온다는 소리를 들은 궁예는 포기한 듯 변복을 하고 왕궁을 빠져 나가 강원도 평강(平康)에서 주민들에게 살해된다. 드디어 918년 무인년 6월 왕건은 국호를 고려(高麗)로 하여 왕에 오른다.

후삼국시대(後三國時代)

歷史 Essay 1354 ☞ 후삼국시대(後三國時代) 후삼국시대(後三國時代)는 견훤(甄萱)이 후백제를 세운 892년부터 고려(高麗)가 재통일을 한 936년까지 45년을 일컫는다. 후삼국시대 초기의 주도세력은 전라도 전지역과 경상도의 진주(晉州) 합천(陜川) 등 서남부 지역 그리고 상주(尙州) 청주(淸州) 공주(公州)를 아우르는 영토를 확보한 후백제(後百濟)였다. 그러다가 궁예(弓裔)가 힘을 정비하여 판세는 조금씩 변해갔다. 이는 896년 왕건(王建877-943)이라는 뛰어난 장군이 귀부한 덕이었다. 덕망 높고 추종자도 많았던 덕에 전쟁에서도 유리한 입지를 확보한 왕건은 전라도 나주(羅州)를 비롯하여 충주 청주 상주 등을 차례로 점령해 견훤을 궁지로 몰아넣고 후고구려(後高句麗)에 이은 태봉(泰封)의 명실상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