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성을 위한 ━━/역사와인물 2609

혜종(惠宗)의 왕비 ①

歷史 Essay 1399 ☞ 혜종(惠宗)의 왕비 ① 가문이 한미(寒微)하고 주변에 후견 세력도 없는 맏아들 무(武 912/943/945)는 자랄수록 기개가 뛰어나고 지력과 용맹을 겸비한 소년으로 성장한다. 이에 왕건(王建)은 그를 태자로 낙점한 후 무장 세력의 대표 박술희(朴述希)에게 후견하게 하고 병부령(兵部令) 임희(林曦)의 딸을 태자빈으로 삼은 외에도 막강한 호족 세력인 개국공신 왕규(王規)의 딸을 둘째 비로 청주(淸州)지역 호족 김긍률(金兢律)의 딸을 셋째 비로 삼아 뒤를 튼튼히 해 주었다. 그런데 사실 왕규는 왕건에게도 15비와 16비로 딸을 바쳤으니 태조와 혜종의 장인이 되고 김긍률은 다른 딸을 3대 정종에게도 바쳤으니 혜종(惠宗)과 정종(定宗 923/945/949)의 장인이 되기도 한다.

장화왕후 오씨(莊和王后 吳氏)

歷史 Essay 1398 ☞ 장화왕후 오씨(莊和王后 吳氏) 왕건(王建 877/918/943)이 장화왕후를 처음 만난 것은 910년 수군장군(水軍將軍)으로 나주(羅州)에 들렀던 때였다. 시냇가에서 빨래하던 오씨를 만나 동침을 했는데 그녀는 왕건을 만나기 전 용꿈을 꾸었다고 한다. 왕건은 한미(寒微)한 가문의 딸의 자식을 원치 않았기에 침상에다 사정을 했는데 그녀가 얼른 손으로 쓸어 담아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한다. 그 아이가 2대 혜종(惠宗)912/943/945)인데 그래서 얼굴에 돗자리 모양의 주름살이 있어 돗자리 대왕이라고 불렸다고 고려사에 나와 있는데 호시탐탐 왕위를 노리는 이복동생들 왕요(王堯)와 왕소(王昭) 때문에 아마 속이 많이 쓰였기에 얼굴에 주름살이 많았던 것 같다.

왕건(王建) 이후 3왕

歷史 Essay 1397 ☞ 왕건(王建) 이후 3왕 태조 왕건(王建 877/918/943)은 무려 29명의 왕비들 사이에서 왕자 25 공주 9명 등 34명의 자식을 낳는다. 첫째 왕비 신혜왕후 유씨(神惠王后 柳氏)는 자식이 없었으므로 둘째 왕비 장화왕후 오씨(莊和王后 吳氏) 소생의 당시 12세의 맏아들 무(武)를 재위 4년째인 921년에 태자(太子)로 삼는다. 그런데 전 해인 920년 셋째 왕비 신명순왕후 유씨(神明順成王后 劉氏)가 왕자 태(泰)를 낳는다. 그 왕자는 어려서 죽었지만 한미(寒微)한 집안 출신의 장화왕후에 비해 당시 가장 강력한 호족 유긍달(劉兢達)의 딸인 신명순왕후의 연이은 득남은 차후 왕위 경쟁의 서막을 울리는 신호였다. 결국 2대왕은 오씨의 아들이 잇지만 3대 그리고 4대 왕은 유씨의..

제2대 혜종(惠宗)

歷史 Essay 1396 ☞ 제2대 혜종(惠宗) 혜종(惠宗 912/943/945)은 태조(太祖)와 제2왕비 장화왕후 오씨(莊和王后 吳氏)의 외아들로 왕건(王建)이 왕이 되기 한참 전인 912년 어머니의 고향 나주(羅州)에서 출생했으며 이름은 무(武)였다. 미천한 집안 출신이지만 태조의 제1비 신혜왕후 유씨(神惠王后 柳氏)가 소생이 없었으므로 왕건에게는 첫째 아들이었다. 921년 정식으로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936년 후백제 정벌에 참여하여 1등 공신에 책록된 기록을 보면 기골이 장대했던 것 같다. 943년 5월 왕건의 죽음으로 왕이 되었지만 부왕의 제3비 충주 유씨(忠州 劉氏) 일가를 비롯한 반대 세력에게 시달려 하루도 편한 날을 보내지 못 하다가 945년 9월 재위 2년 4개월 만에 33세로 죽는다.

왕건(王建)의 죽음

歷史 Essay 1395 ☞ 왕건(王建)의 죽음 불교의 융성책과 왕위 계승 순위와 서경(평양)의 중시 그리고 공명정대한 인사 등 후대 왕들이 지켜야 할 도리를 10개 항목으로 요약한 국정 지침서 훈요십조(訓要十條)를 내리면서 평생 고려의 안녕을 걱정하던 왕건(王建 877/918/943)은 918년 왕위에 오른 지 26년 되던 해인 943년 계묘년 4월 병석에 누워 5월에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뜬다. 임종을 앞두고 신하들이 슬피 우는 소리를 듣자 왕건은 곡을 멈추게 하고 빙그레 웃으면서 ‘덧없는 인생이 예로부터 그러하니라’라는 말을 남기고 편안히 죽었다. 태조 왕건의 능은 현릉(顯陵)으로 자식이 없었던 제1왕비 신혜왕후 유씨(神惠王后 柳氏)가 함께 묻혀 있다.

사냥꾼 김행파(金行波)의 이부시숙(以婦侍宿)

歷史 Essay 1394 ☞ 사냥꾼 김행파(金行波)의 이부시숙(以婦侍宿) 태조의 19비 대서원부인(大西院夫人)과 20비 소서원부인(小西院夫人)은 자매지간으로 행파(行波)의 딸이다. 동주(東州-鐵原) 출신 사냥꾼 행파는 활을 잘 쏘고 말도 잘 탔는데 태조가 어느 날 서경(西京-平壤)으로 가는 길에 자신의 집으로 청하여 두 밤을 유숙하도록 하면서 두 딸로 하여금 하루씩 모시게 하며 극진히 모시자 태조가 그에게 김씨(金氏) 성(姓)을 하사(下賜)하였다. 그 후 왕에게서 연락이 없자 두 딸은 모두 집을 떠나 여승이 되었다. 나중에 그 소식을 들은 태조가 두 자매를 불쌍히 여겨 서경 성 안에 대서원(大西院) 소서원(小西院)이라는 두 절을 짓고 토지와 농민들을 예속시켜 거처를 만들어 주었다. 두 부인은 비구니로 삶..

이부시숙(以婦侍宿)

歷史 Essay 1393 ☞ 이부시숙(以婦侍宿) 귀인이 유숙할 때 처첩이나 딸을 바치는 풍속을 이부시숙(以婦侍宿)이라고 하는데 옛날부터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王建 877/918/943)은 평양(平壤)을 서경(西京)으로 개발해 자주 찾았는데 어느 날 서경 근처에서 행파(行波)라는 사냥꾼을 만나 기거하게 되었다. 그에게는 딸 둘이 있어서 넷이 함께 사냥을 다녔는데 행파는 밤이면 두 딸을 하루 걸러 들여보내 귀빈을 대접했다. 그러나 태조는 개경(開京)으로 돌아온 후 그 집을 다시 찾지 않았고 두 자매는 시집가지 않고 비구니가 되었다. 나중에 태조가 서경에 갔을 때야 그 생각을 해내 둘을 불러 대서원(大西院) 소서원(小西院)이라는 두 절을 지어 주고 비구니 생활을 계속하게 하였다.

제6비 정덕왕후 유씨(貞德王后 柳氏)

歷史 Essay 1392 ☞ 제6비 정덕왕후 유씨(貞德王后 柳氏) 정덕왕후 유씨는 경기 정주 출신이며 시중(侍中) 유덕영(柳德英)의 딸이다. 920년경 결혼한 것 같고 통틀어 4남 3녀를 낳았는데 왕실의 혈통을 지키기 위한 왕건(王建)의 족내혼(族內婚) 장려 정책으로 그녀 소생의 공주들도 모두 왕건의 아들들과 결혼시킨다. 문혜왕후(文惠王后)는 태조의 아들이자 왕건의 제3비 신명순성왕후 유씨(神明順成王后 劉氏) 소생인 문원대왕(文元大王) 정(貞)과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었고 선의왕후(宣義王后)는 제4비 신정왕후 황보씨(神靜王后 皇甫氏) 소생인 대종(戴宗) 욱(旭)과 결혼한다. 대종 욱은 왕이 못 되었지만 선의왕후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6대 성종(成宗)이 되고 첫딸 헌애왕후(獻哀王后) 즉 천추태후(千秋太后..

제5비 신성왕후 김씨(神成王后 金氏)

歷史 Essay 1391 ☞ 제5비 신성왕후 김씨(神成王后 金氏) 신성왕후 김씨는 신라 왕족 경주김씨(慶州金氏)로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敬順王)의 큰 아버지 김억렴(金億廉)의 딸이다. 김씨가 왕건(王建)의 제5비가 된 것은 신라가 망한 직후이므로 936년 초로 보인다. 935년 11월 경순왕이 항복할 뜻을 표시하자 왕건이 답례로 사신을 보냈다. 사신은 왕건이 신라 종실과의 결혼을 원한다고 전하자 경순왕이 사촌 누이를 시집보낸 것이다. 김씨 소생으로는 외아들 안종(安宗) 욱(郁?-997)이 있는데 나중에 왕건의 제4비 신정왕후(神靜王后) 황보씨(皇甫氏)의 외손녀이며 5대 경종(景宗)의 왕비였던 조카 헌정왕후(獻貞王后)와 밀애에 빠져 대량원군(大良院君)을 낳는다. 그 대량원군이 나중에 목종(穆宗)의 뒤를 ..

제4비 신정왕후 황보씨(神靜王后 皇甫氏)

歷史 Essay 1390 ☞ 제4비 신정왕후 황보씨(神靜王后 皇甫氏) 신정왕후(神靜王后 ?-983)는 황주(黃州) 사람으로 대광(大匡) 황보 제공(皇甫悌恭)의 딸이다. 그녀 소생으로는 6대 성종(成宗)의 아버지 대종(戴宗) 왕욱(旭?-969)과 4대 광종(光宗)의 비이며 5대 경종(景宗)의 어머니가 되는 대목왕후(大穆王后)가 있다. 920년에 왕건(王建)과 결혼한 것을 보면 출생은 904년경으로 추정되고 태조가 죽은 후 40년을 더 살았으니 80세경이었을 게다. 며느리 선의왕후(宣義王后)가 일찍 죽는 바람에 6대 성종을 비롯한 손자들에게 많은 애정을 쏟았다. 그녀는 덕이 많고 검소하고 슬기로워 백관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고 한다. 나중에 천추태후(千秋太后)가 되는 헌애왕후(獻哀王后 964-1029)와 ..

제3비 신명순성왕후 유씨(神明順成王后 劉氏)

歷史 Essay 1389 ☞ 제3비 신명순성왕후 유씨(神明順成王后 劉氏) 유씨는 충주(忠州) 호족이며 내사령(內史令) 유긍달(劉兢達)의 딸이다. 결혼 연도는 920년으로 추정되는데 왕건(王建)이 왕이 된 후 맞이한 첫 부인으로 그만큼 충주 세력을 포용할 필요성이 컸음을 반증하는 정략결혼이다. 그녀는 5남 2녀를 낳았는데 그 중 두 아들이 3대 정종(定宗) 4대 광종(光宗)으로 즉위했으며 그녀의 소생 낙랑공주(樂浪公主)는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敬順王)에게 바쳐짐으로 신라세력을 포용하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900년을 전후에 태어난 것으로 보이는 그녀는 나중에 광종(光宗 位949-975)이 그녀를 위해 재위 중인 954년 숭선사(崇善寺를 창건해 명복을 빌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950년 경에 죽은..

제2비 장화왕후 오씨(莊和王后 吳氏)

歷史 Essay 1388 ☞ 제2비 장화왕후 오씨(莊和王后 吳氏) 장화왕후 오씨(莊和王后 吳氏)는 나주(羅州) 호족 다련군(多憐君)의 딸이다. 수군대장으로 출정한 왕건(王建)이 나주의 한 우물에서 빨래를 하던 오씨를 만났는데 바가지에 나뭇잎을 타서 주었다 한다. 이유를 묻자 급하게 마시면 체할 것 같아 그랬다고 했다. 태조가 그녀와 시침(侍寢)하여 912년 낳은 아들이 혜종(惠宗)이다. 고려사(高麗史)에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오씨 집안이 미약하여 왕건이 후손을 안 보려고 돗자리에 사정하자 오씨가 그것을 즉시 취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혜종은 그로 인해 얼굴에 돗자리 자국이 있었다 한다. 아마 왕위 경쟁에서 항상 불안했기에 얼굴에 주름살이 많아져 그런 얘기가 생겼을 것이다.

해주 오씨(海州 吳氏)

歷史 Essay 1387 ☞ 해주 오씨(海州 吳氏) 우리나라 오씨(吳氏) 성(姓)의 기원은 중국 오(吳)나라에서 시작된다. 부차(夫差)의 손자 루양(縷羊)이 천자에게서 오씨 성을 하사받고 오나라의 왕이 되어 오씨가 생겼다고 한다. 우리나라 오씨의 시초는 신라 지증왕(智證王) 원년인 500년에 제(齊)나라 오첨(吳瞻)이 신라로 귀화해 김종지(金宗之)의 딸을 맞아 2남 1녀를 낳으면서 시작된다. 그 두 아들 중 한 명이 후손을 퍼뜨렸고 그 가운데 황해도 해주에 자리잡은 해주 오씨(海州 吳氏)가 크게 번창했다. 오첨의 11세손인 오희(吳禧)는 3남 1녀를 두었는데 그 중 오다련(吳多憐)의 딸이 바로 고려 태조비 장화황후(荘和王后)가 되었으며 그녀의 아들이 고려 2대 임금인 혜종(惠宗 912/943/945)이 ..

왕건(王建)의 첫 부인 신혜왕후(神惠王后) 류(柳)씨

歷史 Essay 1386 ☞ 왕건(王建)의 첫 부인 신혜왕후(神惠王后) 류(柳)씨 왕건(王建)보다 6살 쯤 늦은 884년생으로 추정되는 류씨 부인은 황해도 개풍군(開豊郡) 정주(貞州) 지역의 호족 류천궁(柳天弓)의 딸이다. 903년 왕건이 군대를 거느리고 정주를 지날 때 용모에 반해 그 집에 유숙하였는데 아버지가 극진히 대접해 주었다. 그 후 잊고 있었는데 기다리던 류씨는 결국 출가를 했다. 나중에 소식을 알게 된 왕건이 다시 불러 부부가 되었다. 918년 왕건이 복지겸(卜智謙) 등 신하들이 쿠데타를 부추길 때 망설이던 남편에게 갑옷을 입혀주며 용기를 주어 제1왕후가 된다. 나중에 왕건이 죽은 후 그 무덤에 합장되는 행운을 누렸으나 둘 사이에 혈육은 없었고 사망연대도 미상이다.

왕건(王建)의 가족

歷史 Essay 1385 ☞ 왕건(王建)의 가족 왕건(王建)은 총 29명의 아내를 두었으며 그들에게서 25남 9녀를 얻었다. 제1비 신혜왕후 류씨(神惠王后 柳氏)는 자식이 없었고 제2비 장화왕후 오씨(莊和王后 吳氏)는 2대왕 혜종(惠宗)만 낳았으며 제3비 신명순성왕후 유씨(神明順成王后 劉氏)는 5남 2녀를 낳았는데 그 중 3대 정종(定宗) 4대 광종(光宗) 그리고 경순왕(敬順王)에게 시집보낸 낙랑공주(樂浪公主)가 있다. 제4비 신정왕후 황보씨(神靜王后 皇甫氏)는 6대 성종(成宗)의 아버지 대종(戴宗) 욱(旭)과 4대 광종(光宗)의 비(妃) 대목왕후(大穆王后) 등 1남 1녀를 낳았다. 제5비 신성왕후 김씨(神成王后 金氏)는 8대 현종(顯宗)의 아버지 안종(安宗) 욱(郁)만 낳았다. 그 외 제6비 정덕왕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