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성을 위한 ━━/역사와인물 2607

혜종(惠宗)의 죽음

歷史 Essay 1412 ☞ 혜종(惠宗)의 죽음 왕건의 제2비 소생 혜종(惠宗)은 기반도 미미했고 제3비 신명순왕후(神明順成王后)의 아들 요(堯)와 소(昭)가 호시탐탐 왕위 자리를 넘봐 불안에 떨었다. 이에 왕규(王規) 등이 그 둘을 죽이라고 충고했지만 유약한 혜종은 오히려 자기 맏딸 경화궁주(敬和宮主)를 훗날 4대 광종(光宗)이 되는 소(昭)에게 시집보낸다. 사방에 자기를 죽이려는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상황에서 극심한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며 시름시름 앓기 시작해 재위 2년 4개월 만인 945년 9월 34세를 일기로 세상을 뜬다. 그러나 건장한 그의 죽음은 많은 의구심을 자아낸다. 장성한 아들이 있었음에도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는데 이복동생 둘 중 요(堯)가 3대 정종(定宗 923/945/949)이 된다.

왜곡된 고려사(高麗史) ②

歷史 Essay 1411 ☞ 왜곡된 고려사(高麗史) ② 조선(朝鮮) 시대에 쓰여진 고려사(高麗史)는 945년 왕규(王規)의 반역 조짐이 보이자 서경 총수 왕식렴(王式廉) 군을 서경으로 불렀다고 되어 있지만 이는 날조가 틀림없다. 혜종(惠宗)은 죽기 전까지 자기 아들의 왕위 계승도 이복동생 왕요(王堯) 형제의 계승도 말이 없었다. 이를 보아 서경 군대가 왕요 일파의 부름을 받고 개경(開京)에 진입했을 때 혜종은 이미 병사하거나 살해당한 이후였을 것이다. 왕요 일파가 그의 즉위에 반대하는 세력들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박술희(朴述希) 왕규(王規) 등을 처단한 것이 틀림없다. 왕규나 박술희가 반역죄로 죽었다면 혜종 대에 죽었어야 하는데 둘 다 정종(定宗) 치세 때 죽었다는 것도 그를 반증한다.

안종(安宗) 욱(郁)

歷史 Essay 1410 ☞ 안종(安宗) 욱(郁) 안종 왕욱(郁 ?-997)은 왕건의 제5비 신성왕후 김씨(神成王后 金氏)의 외아들로 938년경 태어났다. 981년에 5대 경종(景宗)이 죽자 그의 왕비 헌정왕후(獻貞王后 966-992)가 사가에 나와 살았는데 왕욱은 그녀와 정을 통하여 임신케 했다. 헌정왕후는 왕건(王建)의 손녀이니 그의 조카가 된다. 이 일이 발각되자 992년 7월 오빠 성종(成宗)이 왕욱을 귀양 보냈는데 바로 그 날 헌정왕후는 아들을 낳고 죽었다. 성종은 헌정왕후가 죽은 후 아이를 보모에게 맡겼는데 아이가 두 살이 되어 아버지를 찾으므로 귀양지로 보냈다. 귀양지 경상남도 사수현(泗水縣-泗川사천)에서 997년 세상을 떴고 남은 아들 대량원군(大良院君)은 나중에 8대 현종(顯宗 位1009..

대종(戴宗) 욱(旭)

歷史 Essay 1409 ☞ 대종(戴宗) 욱(旭) 대종 왕욱(王旭 ?-969)은 왕건(王建)의 제4비 신정왕후 황보씨(神靜王后 皇甫氏)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출생년도는 알 수 없지만 4대 광종(光宗) 20년인 969년에 죽은 기록이 있다. 왕욱은 아버지 왕건의 족내혼 정책에 따라 태조와 제6비 정덕왕후 유씨(貞德王后 柳氏) 소생인 선의왕후(宣義王后)와 결혼해 3남 2녀를 두었는데 세 아들 중 960년생 둘째 치(治)가 981년 6대 성종(成宗)으로 등극하고 두 딸 헌애공주(獻哀公主) 헌정공주(獻貞公主)가 함께 5대 경종(景宗)의 제3,4비가 된다. 그 중 헌애왕후(獻哀王后 964-1029)는 경종의 혈육인 7대 목종(穆宗)을 낳고 헌정왕후(獻貞王后 966-992)는 남편 경종이 죽은 후 태조와 신성왕후 ..

왜곡된 고려사(高麗史) ①

歷史 Essay 1408 ☞ 왜곡된 고려사(高麗史) ① 태조에게 태자를 보살피라는 유명을 받은 박술희(朴述希)가 그를 거역하고 반역을 도모했다는 것이나 왕규(王規)가 혜종(惠宗) 대신 자신의 외손자를 왕으로 세우기 위해 두 번씩이나 암살을 시도하다가 죽었다는 것은 왜곡된 기록이다. 왕규는 문관이라 군사력이 없었고 엄연히 자기의 사위가 왕이고 태조의 2비 소생이 혜종이고 3비 소생으로 결국 3대 4대 왕이 되는 왕요(王堯) 왕소(王昭) 형제가 있는데 16비 소생으로 왕위 서열에서 맨 뒤에 있는 왕자를 옹립하려 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또 두 번씩이나 왕을 시해하려 한 자를 혜종이 살려두었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그가 옹립하려 했다는 광주원군(廣州院君)은 그 후 기록도 없다.

박술희(朴述希)의 죽음

歷史 Essay 1407 ☞ 박술희(朴述希)의 죽음 고려사(高麗史) 박술희전(朴述希傳)에 의하면 945년 정종(定宗) 즉위년 9월 왕규(王規)가 왕명이라고 속여 박술희를 죽였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당시 왕규 자신도 갑곶에 유배되었다가 곧 살해되었으므로 그 기록을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아마도 정종이 박술희를 죽이고 그 살해의 책임을 왕규에게 전가한 것이다. 왕요(王堯) 왕소(王昭) 형제가 서경 총수인 왕식렴(王式廉)을 불러들여 쿠데타를 일으켜 혜종(惠宗)의 무력적 기반인 박술희를 먼저 죽이고 왕규까지 반역으로 몰아 죽인 것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태자 때 부왕을 따라다니면서 많은 전공을 세웠던 건장한 혜종도 단순히 병사한 것이 아니라 박술희가 제거된 후 살해되었던 것 같다.

박술희(朴述希)

歷史 Essay 1405 ☞ 박술희(朴述希) 박술희(朴述希?-945)는 대승(大乘) 득의(得宜)의 아들로 면천박씨(沔川朴氏)의 시조가 된다. 18세에 궁예(弓裔)의 호위병이 되었으나 태조를 섬기면서 전공을 세워 대광(大匡)이 되었다. 921년(태조 4) 태조가 장화왕후(莊和王后)의 소생 무(武)를 태자로 삼고자 할 때 그에게 도움을 청했다. 태조는 그 어머니 집안의 세력이 미약하자 상자에 자황포(柘黃袍)를 담아 오씨 부인에게 주었다. 왕비가 이를 박술희에게 보이니 술희는 태조의 뜻을 알고 왕무의 태자 옹립을 주청하여 그대로 되었다. 태조가 임종할 때 술희는 후왕의 보좌를 유언 받았으며 훈요십조(訓要十條)도 내려 받았다. 혜종(惠宗) 치세 내내 왕의 보좌를 위해 힘썼으며 945년 정종(定宗) 즉위년에 죽었다.

왕규의 난(王規―亂)

歷史 Essay 1404 ☞ 왕규의 난(王規―亂) 경기 광주(廣州) 호족 왕규(王規)는 평생 왕건(王建)을 섬겨 대광(大匡)까지 오르고 두 딸을 태조의 15,16왕비로 들여보내 16비인 소광주원비(小廣州院妃)가 광주원군(廣州院君)을 낳기도 했다. 이 손자를 왕으로 세우기 위해 혜종(惠宗)을 두 번씩이나 살해하려다가 실패하자 난(亂)을 일으켰으며 이복동생 왕요(王堯)가 서경(西京)의 왕식렴(王式廉)을 불러들여 왕규를 죽였다고 고려사는 기록하지만 정황으로 보아 그것은 왜곡이다. 오히려 신명순성왕후 유씨(神明順成王后 劉氏)의 아들로 3대 정종(定宗) 요(堯)와 4대 광종(光宗)이 되는 소(昭)의 세력이 장화왕후 오씨(莊和王后 吳氏) 소생인 유약한 왕 혜종을 내치기 위해 서경의 왕식렴군을 끌어들여 친위대장인 왕..

흥화군(興化君)

歷史 Essay 1403 ☞ 흥화군(興化君) 920년경 태생으로 보이는 흥화군(興化君)은 혜종(惠宗)과 의화왕후(義和王后)의 장남으로 적통(嫡統)이지만 전혀 기록이 없다. 4대 광종(光宗)의 제2비 경화궁부인 임씨(慶和宮夫人 林氏)와 친남매간이므로 광종은 흥화군에게 이복 숙부이자 처남이 된다. 적장자(嫡長子)였음에도 혜종이 재위 2년인 945년 원인 미상으로 사망 당시 나이가 어려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였다고 기록되었으나 920년생이라면 신빙성이 없다. 혜종이 죽을 당시 그가 지명하지도 않은 이복동생 왕요(王堯)가 차기 3대 정종(定宗)이 된 것을 보면 쿠데타가 일어난 것이 틀림없다. 4대 광종 11년 960년부터 시작된 호족들 숙청 때 정종의 아들 경춘원군(慶春院君)과 함께 처형된 것으로 보인다.

혜종(惠宗)의 딸 경화궁부인(慶和宮夫人)

歷史 Essay 1402 ☞ 혜종(惠宗)의 딸 경화궁부인(慶和宮夫人) 경화궁부인(慶和宮夫人)은 혜종(惠宗 912/943/945)의 딸이지만 어머니 의화왕후(義和王后)의 성을 따라 임(林)씨로 칭하였다. 혜종(惠宗)은 막강한 이복동생들에 대한 신뢰의 표시로 자신의 딸인 공주를 둘째 아우이며 나중에 광종(光宗 925/949/975)이 되는 왕소(王昭)에게 출가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미 왕족내혼을 통하여 왕실에서의 위치가 확고하게 된 동생 왕소에게 자기의 딸을 출가시킴으로써 혜종 자신의 신변안전을 도모하고 정치적 생명을 연장시키려는 노력의 소산이었을 것이다. 그처럼 빈약한 혜종의 왕권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혜종의 딸인 공주이면서 광종의 왕후인데도 불구하고 왕후가 아닌 경화궁부인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낙랑공주(樂浪公主)

歷史 Essay 1401 ☞ 낙랑공주(樂浪公主) 공주의 아버지는 태조 왕건(王建)이고 어머니는 태조의 제3비 신명순왕후 유씨(神明順成王后 劉氏)이므로 친오빠 둘이 3대 정종(定宗) 4대 광종(光宗)이 된다. 935년 11월 신라의 마지막왕 김부(金傅-敬順王)가 항복하자 왕건은 아홉 딸 중 맏딸 낙랑공주를 성무부인 박씨(聖茂夫人 朴氏) 소생의 공주와 함께 김부에게 보내고 자신은 신라왕실에서 제5비 신성왕후 김씨(神成王后 金氏)를 맞아들인다. 태조의 정책에 따라 고려왕실의 공주가 왕씨 아닌 다른 성에게 결혼하는 예는 극히 드물었는데 두 공주를 보낸 것은 경순왕(敬順王)에 대한 예우와 고려 왕실을 신라왕실과 대등하게 상승시켜 신라세력을 융합하기 위함이었다. 공주의 생몰년도는 미상이고 결혼 후 자녀는 없었던 것..

혜종(惠宗)의 왕비 ②

歷史 Essay 1400 ☞ 혜종(惠宗)의 왕비 ② 혜종(惠宗 912/943/945)은 한미(寒微)한 외가를 보완하기 위해 부왕의 노력으로 4명의 왕비를 두었다. 10세 때 병부령(兵部令) 임희(林曦)의 딸을 의화왕후(義和王后)로 맞았는데 아들 홍화군(興化君)과 4대 광종(光宗 925/949/975)의 제2비가 되는 경화궁부인(慶和宮夫人)과 정헌공주(貞憲公主) 등 1남 2녀를 낳았다. 제2왕비는 후광주원부인(後廣州院夫人)으로 태조 왕건(王建)에게 15째 16째 부인으로 딸을 바쳤던 왕규(王規)의 딸이다. 제3왕비는 청주원부인(淸州院夫人)으로 청주는 초기에 반란이 빈번했던 곳이라 태조가 주선해 현지 호족 김긍률(金兢律)의 딸을 맞은 것이다. 제4왕비는 궁녀(宮女) 출신인 애이주(哀伊主)이다. 경주 사람 대..

혜종(惠宗)의 왕비 ①

歷史 Essay 1399 ☞ 혜종(惠宗)의 왕비 ① 가문이 한미(寒微)하고 주변에 후견 세력도 없는 맏아들 무(武 912/943/945)는 자랄수록 기개가 뛰어나고 지력과 용맹을 겸비한 소년으로 성장한다. 이에 왕건(王建)은 그를 태자로 낙점한 후 무장 세력의 대표 박술희(朴述希)에게 후견하게 하고 병부령(兵部令) 임희(林曦)의 딸을 태자빈으로 삼은 외에도 막강한 호족 세력인 개국공신 왕규(王規)의 딸을 둘째 비로 청주(淸州)지역 호족 김긍률(金兢律)의 딸을 셋째 비로 삼아 뒤를 튼튼히 해 주었다. 그런데 사실 왕규는 왕건에게도 15비와 16비로 딸을 바쳤으니 태조와 혜종의 장인이 되고 김긍률은 다른 딸을 3대 정종에게도 바쳤으니 혜종(惠宗)과 정종(定宗 923/945/949)의 장인이 되기도 한다.

장화왕후 오씨(莊和王后 吳氏)

歷史 Essay 1398 ☞ 장화왕후 오씨(莊和王后 吳氏) 왕건(王建 877/918/943)이 장화왕후를 처음 만난 것은 910년 수군장군(水軍將軍)으로 나주(羅州)에 들렀던 때였다. 시냇가에서 빨래하던 오씨를 만나 동침을 했는데 그녀는 왕건을 만나기 전 용꿈을 꾸었다고 한다. 왕건은 한미(寒微)한 가문의 딸의 자식을 원치 않았기에 침상에다 사정을 했는데 그녀가 얼른 손으로 쓸어 담아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한다. 그 아이가 2대 혜종(惠宗)912/943/945)인데 그래서 얼굴에 돗자리 모양의 주름살이 있어 돗자리 대왕이라고 불렸다고 고려사에 나와 있는데 호시탐탐 왕위를 노리는 이복동생들 왕요(王堯)와 왕소(王昭) 때문에 아마 속이 많이 쓰였기에 얼굴에 주름살이 많았던 것 같다.